엄마, 부끄러워서 먼저 놀자고 말을 못 하겠어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다면 육아가 덜 힘들었을까?
"이제 잘 시간이야"
이부자리에 누운 둘째 곁에 앉아 다리를 살살 주물러주다가 낮에 아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떡집시리즈 동화책을 읽고, 엄마 난 부끄럼을 없애주는 인절미떡을 먹고 싶어라고 말했었다.
남편 퇴근길에 인절미 사 오라고 부탁하는 걸 깜빡했다.
"부끄럼 없애주는 인절미떡을 먹으면 무슨 일이 생겨?"
"친구들한테 놀자고 얘기할 수가 있어"
"부끄러워서 먼저 놀자고 말을 못 하겠어? 그래서 교실에서 책만 읽은 거야?"
"응"
"그렇구나, 대신에 엄마가 부끄럼 없애주는 미역국을 아침밥으로 한 그릇 줄게. 맛있게 먹고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 먼저 놀자고 얘기해 보자"
풀어진 표정으로 새근새근 잠든 둘째를 확인하고 방에서 나왔다. 원래 끓이려던 미역국이었는데, 그럴듯한 이름이 붙은 미역국이 되는 순간이었다. 불린 미역을 들기름에 볶으면서 이번에도 둘째가 3살이던 때를 생각했다. 내 마음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고, 그로 인해 5살이었던 첫째의 문제행동이 발현되던 시기였다.
당시 내가 생각했던 둘째는 눈치가 빠르고 야무져서 자기 할 일은 스스로 잘하는 아이였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둘째는 엄마가 화내고 소리 지르고, 자신의 5살짜리 오빠와 엄마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자신이 어리광 부리거나 투정을 부려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제대로 보호받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원래도 웃음이 헤프지 않고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는데, 둘째는 더욱 표정을 숨겼고 어른들을 어려워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알아채고 표현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둘째가 5살이 되고 2학기 들어서부터 어린이집 등원을 거부했다. 3년째 다니는 어린이집이었고 눈에 띄는 문제요인은 없었다. 매일 아침 1~2시간씩 등원전쟁을 치르면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퇴소를 하고 가정보육을 했다. 2년이 지나서야 둘째가 말을 해줘서 그 이유를 알았다. 당시 둘째만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친구가 있었고 그게 너무 힘들고 불편했는데, 도와달라는 말을 그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린이집에 선생님이 몇 명이고, 집에 오면 엄마 아빠도 있는데 '친구가 괴롭혀서 속상해' 한마디를 하지 못해 그 긴시간을 힘들어했다고 생각을 하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에릭슨의 심리사회적 발달이론에 따르면 3세는 유아기에 해당하고, 이 시기는 2단계, 자율성 대 수치와 회의 단계다. 겉으로 보기엔 자기중심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통해 자율성과 사회적인 회의감을 적절히 경험하고 해결해 가면서 의지를 발달시키고, 이것이 개인이 사회에서 기능하는 구성원이 되는 단초 역할을 한다(crain, 2010).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에릭슨의 심리 사회적 발달 이론 [Erikson’s psychosocial developmental theory] (심리학용어사전, 2014. 4.)
둘째의 기관 및 학교생활에 더욱 관심을 갖도록 노력하고,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미세한 표정이나 행동변화를 허투루 보지 않는다. 변화가 감지될 땐 둘째가 편하게 말할 수 있도록 자주 말을 건다. 대화를 하다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 힘들어하면 대신 말로 풀어주며 감정을 읽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매일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아주 천천히어도 후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다면 육아가 덜 힘들었을까?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라서 알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지금까지 겪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아픔, 그것들을 견뎌온 노력의 시간들이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는 그때의 나대로 최선을 다했고 견뎌냈다.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
부끄럼 없애주는 미역국을 열심히 끓였고, 맛있게 먹여서 학교에 보냈다. 응원의 한마디도 잊지 않았다. 학교 끝나고 만났을 때 둘째의 목소리가 부디 밝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