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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클라베 단평

<되돌아오는 확신에 대한 경고>

by 조성현 Feb 24. 2025

 새로운 교황의 선출을 위해 행해지는 콘클라베는 수단에 불과하다. 드러내놓고 정치물임을 표방하고 있는 이 영화는 배경을 로마 카톨릭으로 삼고 있지만 대립의 요소는 현실 정치에서 드러나는 트럼피즘과 다양성이다. 테데스코가 이야기하는 무슬림과 동성애자에 대한 배척과 로마 카톨릭의 전통 부활은 현재 미국의 보수 진영의 논리를 연상시킨다. 반면 벨리니 추기경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진영은 여성과 동성애자의 권리 신장 등을 그 가치로 가진다. 영화는 이를 숨기지 않고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그대로 드러낸다. 그 과정에 있어 현재 미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다양성에 대한 논쟁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은 결코 과한 일이 아니다.


 로렌스 추기경이 콘클라베를 진행하기에 앞서 추기경들을 대상으로 짧은 연설을 시작한다. 본격적으로 콘클라베의 시작을 알리기 위한 과정이지만, 로렌스는 잠시 숨을 고른 뒤에 자신이 하고픈 이야기를 하겠노라 선언한다. 그 연설의 내용은 '확신'이라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으로, 우리는 모두 인간이기에 실수를 하고 죄를 짓기에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하는 자가 교황으로써의 자격을 갖출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마치고 난 뒤, 로렌스는 연단 위에서 내려온다. 테데스코로 대표되는 '고립주의자'에 대한 확신을 사실상 비판하는 내용으로 보이며, 로렌스는 이 연설을 마친 이후 추기경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다.


 분명 테데스코의 이야기 대다수는 위험하다. 그러나 일견 그의 논리가 일리가 있게 느껴지는 장면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문제이다. 주변의 테이블을 테데스코가 둘러보며 각자 자신들의 나라 사람들끼리 모여있는 것을 지적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물론 이는 멜팅팟(Melting Pot)과 샐러드볼(Salad Bowl)로 대표되는 하나의 미국이냐, 다양성의 인정이냐의 문제로 보인다. 하나의 사회로 통합되어 사회의 일원으로 녹여져 살아가는 멜팅팟과 각자의 다양성을 인정한채로 하나의 공동체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샐러드볼에 대한 논의는 과거부터 진행되어 왔다. 테데스코가 공약하는 라틴어의 사용이라는 전통을 되살림은 이 중 멜팅팟의 철학에 가까워보인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교회라는 공동체에 있어 관용과 통합이라는 가치를 추구한다는 점에 있어 라틴어의 사용을 통해 다양한 국가에서 임명된 추기경들이 상호 교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과연 나쁜 일인가. 오히려 다양성을 인정함으로 인해 각자가 고립되어버리는 결과가 일어난다는 테데스코의 주장은 일리가 있게 느껴진다. 감독은 테데스코에게 수구적인 이미지를 입혀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의 논리에서 설득력이 느껴지는 순간 이는 실패한 시도로 느껴진다.


 이 연출 실패의 근원적 원인은 감독 본인의 사상이 절대선이라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로렌스는 본작의 주인공이며 분명 선량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가 단장이라는 책무에 맞게 행동한 것인가는 다른 문제이다. 콘클라베를 주최하고 진행하는 단장의 역할을 맡는 이가 공적인 자리에서 한 쪽 진영에 대한 부정적인 정서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것은 분명 중립성을 훼손하는 행위이다. 각종 진상을 밝혀내는 인물을 단장으로 설정하는 것은 권위를 가진 이가 정의로운 일이라는 명분으로 한 쪽의 진영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길 바란 것이라 비춰진다.


 작중 로렌스는 원칙을 어겨가며 콘클라베, 즉 정치의 장에 깊숙히 개입한다. 그 과정에서 불의와 타협을 하느냐를 두고 벨리니와 언쟁을 벌이기도 한다. 문제는 감독은 그들을 선한 이들로 설정하며 이들의 행동은 '거악을 막기 위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한다. 테데스코의 헤이트스피치의 위험성만큼이나 위험하게 다가오는 태도이다.


  차라리 이 영화가 피카레스크 물이었다면 어땠을까. 개성없는 하나의 오락영화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서부전선 이상없다(2014)>를 촬영한 감독 '에드바르트 베르거'라면 그 이상의 결과물을 창출해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굳이 현실의 정치를 그대로 이식하여 콘클라베에 대입할 필요가 있었을까. 아니, 대입하더라도 선악의 구도로 나누는 것은 조금은 위험한 것은 아니었을까. 로렌스 추기경은 연단 위에서 '확신'에 대한 경고를 이야기한다. 좋은 연설이다. 그러나 그 연설이 감독 본인을 향해 돌아온다해도 같은 잣대로 바라볼 수 있을지는 조금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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