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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스턴스 단평

<과연 할리우드는 젊음에 특권을 부여하는가>

by 조성현 Feb 14. 2025

  엘리자베스 스파클이 한 시대를 풍미한 여배우임은 분명하다.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그녀의 이름이 새겨진 것은 물론이요, 오스카 상을 탄 배우라는 언급은 영화에 명확히 등장한다. 명예의 거리에 새겨진 그녀의 이름은 처음에는 많은 이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명소로서 존재하나, 시간이 지날 수록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져간 오래된 과거의 영광으로만 남는다. 반짝이던 명패는 점차 그 색이 바래져가며 금이 가고 사람들의 발 아래 짓밟힌 채 더러워져 간다. 더 이상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낡은 기념패는 어느 행인이 실수로 햄버거를 떨어뜨림으로서 케첩 범벅이 된다. 붉은 케첩으로 범벅된 엘리자베스의 기념패를 비추며 영화는 그 영광 위로 피를 뿌릴 것을 암시한다. 그렇게 오프닝이 종료되고 <서브스턴스>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서브스턴스>는 명백히 바디호러 영화임을 오프닝부터 천명하고 시작한다. 그러나 영화에 있어 관객에게 가장 불쾌하게 다가오는 장면은 후반부의 바디 호러쇼가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 불쾌하게 다가오는 장면은 하비(데니스 퀘이드)가 엘리자베스(데미 무어)에게 수다를 떨며 자신의 엔터테인먼트 철학을 떠들어대는 장면이다. 입가에 지저분하게 소스를 묻혀가며 너절한 이야기를 떠들어대는 하비의 음식물 섭취는 질척한 소리와 함께 관객에게 역한 느낌을 전달하고자 한다. 이 과장된 사운드 젊고 아름다운 여성만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가치가 있다는 속물적이고 천박한 인식은 본능적인 불쾌감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하다.


 엘리자베스는 더 이상 젊지 않다는 이유로 에어로빅 쇼의 진행자에서조차 해고된다. 오스카 수상자라는 그녀의 과거의 영광은 이제 빛이 바랬고, 더이상 세상이 그녀를 찾지 않는다는 현실은 그녀를 자기혐오에 빠지게 만들며 이 혐오로부터 비롯된 욕망이 그녀가 의문스러운 약물 '서브스턴스'에 손을 대는 계기가 된다. 약물의 효과로 젊은 육체의 '완벽한 이목구비'를 가진 수(마가릿 퀄리)가 탄생하고, 영화는 수가 춤을 추는 동안 그녀의 특정 부위를 연달아 클로즈업하여 관객에게 조각조각 선사한다. 마치 하비의 만찬에 올려진 음식들과 같이.


 젊은 여성에 대한 할리우드의 소비적 활용을 영화는 비판적 관점으로 열거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소 근본적 의문이 든다. 과연 작금의 할리우드는 젊음에 특권을 부여하는가. 젊은 여성에 대한 휘발적 소비를 비판한 작품은 이미 과거부터 존재해왔다. 당장 이 영화의 모태가 되었던 <죽어야 사는 여자>만해도 그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자리잡고 있으며, 해당 작품은 1992년 개봉작이다. 그렇다면 각종 상업영화의 고장인 할리우드는 30년이 넘는 시간동안 조금도 진보하지 못 했다는 말인가. 수많은 배우와 영화계 관계자가 오스카에서 외쳤던 말들은 허공에 외치는 단말마일 뿐이었을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가 말하고자하는 메시지의 가장 훌륭한 반례가 주연인 '데미 무어'이다.


 <사랑과 영혼>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데미 무어는 어느덧 만으로도 60대에 접어들었다. 데미 무어의 필모그래피는 그녀가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음을 방증한다. 이미 과거의 영광과 함께 흘러가버린 젊은 여배우들에게 밀려난 배우라고 하기엔 보기 힘든 활동량이다. 당장 <서브스턴스> 이후 그녀에게 쏟아진 찬사들을 들여다보자. 성공적인 연기 변신과 뛰어난 연기력에 대한 호평은 있으나, 그 누구도 '데미 무어의 부활'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는다. 그녀는 부활한 적이 없다. 단 한 차례도 죽은 적이 없으니.


 데미 무어만이 특별한 반례도 아니다. 귀네스 펠트로, 줄리안 무어, 조디 포스터 등등 수많은 여배우들은 여전히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자신의 연기력을 은막 위에 드러내고 있다. 과거 수많은 여배우들이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갔음은 사실이지만, 이는 단순 여성에게만 국한된 문제도 아니며 단순히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주연에서 멀어지는 트렌드가 아님은 분명하다.


 <서브스턴스>는 메시지를 명확히 전달하는 데에는 분명 성공한 영화이다. 젊음과 성공, 그리고 명성에 대한 집착이 만들어내는 파멸과 더불어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의 휘발적인 여성의 활용까지 감독은 적절하게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드러낸다. 남성들의 너절한 욕망을 향한 조소는 덤이다. 그러나 2024년의 말미에 개봉하는 영화가 담기엔 메시지가 다소 올드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오프닝의 엘리자베스의 기념패가 바래질만큼 시간은 많이 지났다. 시간이 지날 수록 더 나아진 세상이 도래한다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싶다는 염원이 드는 것이 이상한 일일까.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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