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을 가장한 작별 인사>
1889년 1월 3일, 프리드리히 니체는 토리노의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서 마부에게 매를 맞고 있는 말을 발견한다. 이를 본 니체는 충격을 받고 뛰쳐나가 말의 목을 끌어안고 울기 시작한다. 이 날을 기점으로 니체는 이틀을 꼬박 앓다가 "어머니, 전 바보였어요."라는 말을 내뱉은 후 미쳐버린다. 10년을 광인으로써 살아가던 니체는 결국 그 광기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사실 이 이야기의 진위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혹자는 이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일종의 철학적 비유로 받아들이는 시선 역시 존재한다. 이를테면, 마부에게 채찍질을 당하던 말을 예수로 해석하는 등의 방식 말이다. 만일 그 해석이 맞다면 광장에서 채찍질을 당하는 말을 보며 니체는 흡사 예수에게 행해지던 고난을 말에게 투영했다는 것인데,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생각하자면 참으로 파격적이기도 하다.
<토리노의 말>의 도입부는 이러한 니체의 시선만큼이나 파격적이다. 6분의 도입부는 암전된 화면에서 니체의 일화를 소개하는 나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이후, 영화 내내 흐르는 단조롭고도 음산한 음악과 함께 다양한 방식으로 카메라를 활용한다. 말을 정면으로부터 클로즈업하기도 하고 카메라를 말에서 마부로 옮겨가 그를 중점적으로 포착하기도 하며, 멀리에서 마차 전체를 담아내기도 한다. 흙먼지를 뚫고 나가는 지친 말 한마리와 마차, 그리고 마부만을 비춰주는 이 시퀀스는 어떠한 내러티브도 담고 있지 않으며 그저 이러한 방식으로 다양하게 인물과 사물을 포착할 수 있음에만 집중한다.
영화 전체는 정확히 이 도입부와 일치하여 진행이 된다. 특별한 내러티브라 부를만한 것이 없으며 단조로운 일상을 비춰준다. 그들은 매일 아침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고, 옷을 갈아입고, 일과를 시작하기 전 술 한잔을 들이키며, 식사로 감자 한 알을 먹는다. 이 단조로운 일상에 변화를 주는 요소는 이따금씩 발생하는 아주 단편적인 이벤트 이외엔 카메라의 각도가 고작이다. 정확히는 감독이 알고 있는 다양한 촬영 기법을 모조리 영화에 적용하겠다는듯한 일종의 목적 의식이 드러난다.
주목할 점은 이 영화가 진행되는 일수가 정확히 6일이라는 점이다. 6일이라는 시간동안, 부녀의 주변에서는 무언가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한다. 첫날엔 나무좀을 갉는 소리가 사라지며, 물이 사라지고, 빛이 사라지고 종국엔 불 마저 사라진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배경음악에서 악기가 사라지기도 한다. 6분의 도입부, 그리고 6일 간 진행되는 종말. 이 모든 플롯이 끝나고 난 뒤 찾아오는 것은 암전이다. 문명을 이룩하게 한 요소들이 차츰 사라져가나 일개 인간인 마부와 그 딸은 저항하지 못 한다. 떠나려고 하지만 이윽고 돌아온다. 이유는 명확히 밝히지 않지만 관객은 어렴풋이 추정한다. (사실 이유를 구태여 찾아 말하는 순간, 오히려 영화의 가치가 떨어졌으리라 생각한다.)
다가오는 끝에 대한 무기력함을 영화는 건조한 분위기로 조용히 드러낸다. 니체의 울부짖음과는 대비되는 모습이다. 채찍질 당하던 말을 끌어안던 순간 니체의 세상은 끝났다. 마부의 세상은 그보다 6일이 더 지속되었으나 결국 끝을 맞이한다. 더 이상 부지런히 비추어줄 일상이 존재하지 않음을 마부는 생감자를 씹으며 보여준다. 그토록 다양한 방식으로 마부의 삶을 비추어주던 카메라도 이제는 더는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이윽고 암전이 이어지며 영화는 끝난다.
한 사람의 세계가 끝난 이후는 어떠한 이야기가 진행될까. 과연 마부와 딸은 어떠한 생을 이어가게 될까. 마부가 내뱉는 마지막 대사는 '먹어라. 먹어야만 한다.'이다. 절망적인 표정으로 생감자를 씹으며 마부는 말한다. 분명 이어오던 세계가 끝남은 절망적이다. 그러나 그 고통을 삼키며 삶은 이어져야 한다. 감독 벨라 타르는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자신의 세계가 막을 내림을 고했다. 암전 이후가 어찌 이어질 지는 확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마부처럼 자신의 입에 생감자를 밀어넣지 않을까. 그렇게 그는 그 나름대로의 인사를 관객에게 건넨다. 내게는 이것이 감독 특유의 조용한 작별로 받아들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