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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우 이야기

흐르는 이야기를 담기엔 '야옹'과 '멍멍'이면 충분하다.

by 조성현

영화의 자막을 담당하는 사람은 여지껏 자신이 해왔던 일 중 가장 쉬운 일을 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활자가 필요한 부분은 도입부가 끝난 후 올라오는 제목과 엔딩 크레딧이 고작이니까. (그나마도 엔딩크레딧은 사실 자막이 필요치 않다.) 영화에서 오가는 대사는 동물들의 울음소리들뿐이다. 애초에 주인공이 고양이인데다가 동료는 카피바라, 여우원숭이 등의 동물들이니 당연한 일이다. 사실 그렇기에 영화는 몇가지 해소되지 않는 의문점을 관객에게 던져준다.


이 영화에 인간은 등장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인간의 흔적은 등장하지만, 인간이라는 종족 자체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설마하니 고양이 스스로가 자신의 모습을 깎아만든 석상을 집 주변에 설치해두고 그림을 그리고 목조 조형물을 깎아낼 리는 만무하지 않나. 이유는 드러나지 않지만 한순간에 인간이 사라져버렸음은 확실해보인다. 재앙이 닥쳐온 땅을 버려두고 떠났을 수도 있고, 한순간에 천벌을 받아 멸종했을 수도 있으며, 어쩌면 사실 우리가 보아온 동물들이 사실은 인간이 변한 존재일 수도 있다.


제목이 어째서 <플로우>인가 역시 하나의 의문이다. 고양이의 이름일까, 아니면 물이 흐르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정한 제목일까. 두 가지의 가능성 모두 관객에게는 그다지 어색하지 않다. 애초에 이 이야기는 갑작스러운 홍수가 난 세계에서 고양이와 그의 친구들이 돛단배 하나에 몸을 맡기고 정처없이 떠다니는 이야기이다. 물이 흐르는대로 움직이는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고 하기에 제목을 <플로우>라고 정했다라고 한다면 고개를 끄덕거릴 관객은 적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귀여운 고양이의 이름을 '플로우'라고 붙였다라고 해도 마찬가지로 신빙성있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사실 위의 의문점들은 그다지 중요치 않다. 오히려 그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설명적이다.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흐른다는 것' 그 자체이다. 갑작스레 닥쳐온 홍수 속에서 각자의 터를 잃어버린 동물들이 유대를 형성하고 새로운 세상을 모험해나가는 이야기야말로 영화의 큰 골자라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서로를 이해하지 못 해 위협하기도, 의미없는 것에 집착하기도 하지만 결국 서로를 이해하고 도와주는 '인간적인' 모습으로 유대를 형성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 인간적인 정서를 느끼게 하는 데에는 인간의 언어 따위는 필요치 않다. 카피바라는 배 위의 동료들을 먹이기 위해 바나나를 따고, 고양이는 스스로 힘으로 사냥한 물고기를 나눈다. 다큐멘터리 등지에서 나오는 본인의 먹이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죽고 죽이는 잔혹극 따위는 영화에서 펼쳐지지 않는다.


그들의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하는 데에는 '야옹'과 '멍멍'이라는 울음소리만으로도 충분하다. 구태여 다른 설명은 필요치 않다. 관람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이야기를 떠다니는 돛단배에 몸을 뉘이고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 뿐이다. 영화 속 세계에 범람한 물과 같이 영화는 넘쳐흐르는 볼거리와 따스함을 선사한다. 이 이야기를 즐기며 감독의 철학을 분석하는 것 역시 좋다. 하지만 그저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 귀여운 동물 친구들의 이야기를 오롯이 즐기는 것 역시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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