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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장평

박쥐, 아가씨, 헤어질 결심 : 결핍이 만들어낸 구원과 몰락의 두 얼굴

by 조성현

(2025 부산일보 신춘문예 응모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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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순간, 머릿속의 코끼리는 그 묵직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무언가를 금기시하는 순간, 대중들의 머릿속엔 그 금기에 대한 강력한 이끌림이 시작된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금서를 탐독하고 금단의 관계에 매혹을 당한다. 현대사회에서 이는 ‘스트라이샌드 효과’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어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다. 그렇기에 작금의 세태에서 금기를 건드리는 것은 사실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이야기다. 박찬욱이라는 감독이 저명한 감독의 반열에 올라있다 한들, 이미 불륜과 같은 금지된 사랑을 다루는 컨텐츠가 범람하는 시장에서 단순히 금기를 건드리는 선에서의 플롯은 그다지 참신하지 않다. 그러나 그 금지된 사랑이라는 것이 상대에게 있어 구원의 손길이 된다는 역설을 지니게 되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진다. 금단의 관계가 가져오는 파멸과 동시에 그 관계의 존재로 인해 탄생하는 구원이라는 개념을 동시에 채용하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의 미디어와 컨텐츠에서 금단의 사랑은 그 자체를 아름답게 묘사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1945년 데이비드 린의 <밀회>라는 영화가 개봉한 이래, 수많은 금단의 사랑을 다룬 컨텐츠는 우후죽순 생겨났고, 그 중의 대다수는 캐릭터 간의 내밀한 면을 들여다보며 심리상태를 묘사하는 데에 중점이 맞추어져 있다. 한 쌍의 금지된 사랑에 매몰된 이들의 이야기는 보통 그들의 애정과 낭만에 철저히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관객에게 있어 기존의 윤리와 도덕에 의구심을 품게 하는 방식으로 접근한다. 그렇기에 때때로 이러한 종류의 작품들은 도덕성을 경시하게 만드는 부작용이 있다고 지적받고는 한다. 그리고 이제 이 글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박쥐>, <아가씨>, <헤어질 결심>이라는 세 작품 역시 금단의 사랑이라는 것을 그 소재로 삼기에 이러한 논란에서 자유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조망하고자 하는 세 작품은 기존의 작품과는 다른 명백한 차이점이 도드라진다. 단순히 상호 간의 애정이라는 측면의 애틋함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상황과 맥락의 측면에서까지 파멸과 구원이라는 키워드를 교직해냈다는 점에서 기존의 작품들과 대비되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몰락을 가져올(혹은 가져오고자 하는) 이가 주요 인물들에게 있어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자라는 측면은 박찬욱의 역설적 세계관을 드러내는 핵심적 장치로 보인다.


누군가는 세 가지 영화를 하나로 묶음에 있어 다소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다. <박쥐>와 <헤어질 결심>은 시대적 배경이 현대이며, <아가씨>는 시대극이다. 또한, 두 작품과는 달리 <아가씨>는 불륜이 중심소재가 아닌 동성애가 그 주요 소재이다. <박쥐>는 뱀파이어라는 다소 장르적 장치가 플롯에 개입하나, 나머지 두 작품은 지극히 현실에 있을 법한, 판타지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헤어질 결심>의 경우, 두 작품과는 다르게 일종의 수사물적인 성격을 띠며 앞선 두 작품과는 다르게 두 인물이 육체적인 관계를 나누지 않는다는 큰 차이점을 보인다. 이렇듯 각각의 작품을 짚어보면 그 각자의 작품은 성질이 확고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 작품에서 애정을 이루는 연인들은 단순히 육욕으로 인해 서로에게 끌리는 존재들이 아니다. 여타 금단의 사랑을 다루는 작품 역시 단순한 육욕만으로 서로를 끌어당기지는 않는다고 누군가는 항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와는 조금 다른 점이라 한다면 기본적으로 박찬욱의 세계관에서의 주요 인물들에겐 근원적으로 애정과는 관련이 없는 어떠한 결핍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 결핍은 인물의 내면에 커다란 구멍을 형성했으며, 이 구멍을 메꿔줄 수 있는 존재가 파멸을 몰고 올 존재라는 아이러니함은 언급할 세 작품에 있어 공통으로 드러나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결핍을 지닌 등장인물들을 창조하여 직조해낸 이야기는 동질한 결말로 나아가지 아니한다. 예컨대, <아가씨>의 경우는 구원으로 나아가지만, <헤어질 결심>은 몰락으로 그 끝을 맺는다. 그렇기에 <박쥐>에서 <헤어질 결심>에 이르기까지 박찬욱의 필모그래피는 어째서 특정한 방향성을 지니고 나아갔는지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이런 의문을 가지고 구원과 몰락이라는 키워드를 실로 삼아 작품 하나를 짜내는 그의 방식을 조금이나마 따라 해보고자 한다. 역설이라는 키워드로 그의 작품들을 엮어내어 분석하고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도출해보고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라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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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다른 단어들이 서로 오묘하게 혼재되어있는 역설성이 도드라지는 작품이다. 공포와 사랑이, 식욕과 색욕이, 타락과 숭고함과 같은 서로 다른 개념들이 한 장면에 동시에 뒤섞인 채 그 모습을 선보인다. 이러한 혼재되는 양상이 <박쥐>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특질이다. 이 지속적인 개념의 뒤섞임은 오묘한 결말로 나아간다.

맨발로 도로를 질주하던 태주의 앞에 상현이 나타나는 순간, 태주는 멈추어선다. 캄캄한 밤, 태주는 상현이 자신의 앞에 서 있음을 인식하고 숨을 고른다. 순간 카메라는 태주의 흰 피부 위로 강하게 맥박치는 혈관에 클로즈업한다. 태주는 자신이 슬립 차림의 외간남자에게 보이기에는 다소 민망한 차림이라는 것을 인식하고는 손으로 몸을 가린 체 상현에게서 도망치듯 뒤돌아 뛰어간다. 그 순간, 상현은 그녀의 뒤에 빠르게 접근해 그녀를 번쩍 들어 올린다. 태주는 놀라 숨이 잠깐 멎고, 카메라는 땅에 붙어있는 상현의 발 앞, 지상에서 떨어져 있는 태주의 맨발을 보여준다. 상현은 자신의 구두를 벗고 태주를 그 구두 위에 올려주어 맨발에 구두를 신겨준다. 식욕과 색욕이 교차하는 순간이고, 공포와 사랑이 교차하는 순간이며, 신부로서의 숭고함과 뱀파이어로서의 타락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뱀파이어 상현은 노신부 앞에서 더는 욕망을 거스르기 힘듦을 고해한다. 태주의 흰 피부 위로 드러나는 혈관은 상현의 두 가지 욕망을 동시에 자극한다. 뱀파이어로서 상현은 자신의 송곳니를 박아넣어 그녀의 피를 빨고 싶다는 욕망에 시달린다. 그러나 동시에 조명 아래 도드라지는 흰 피부에 성적인 욕망이 동하기도 한다. 이 순간적으로 틈입된 장면에서 두 가지 혼재된 욕망은 한 개의 개념으로 통합되어 찰나에 지나간다. 그리고 카메라는 이를 비춰주기만 할 뿐, 상현의 어느 욕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지 굳이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해보자면 일반적으로 식욕과 색욕은 욕망이라는 점에서의 공통점을 갖출 뿐, 동시에 발현되는 유형의 충동은 아니다. 이 두 가지 욕망이 교차하는 지점은 마치 두 욕망이 한순간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 일반적 상식을 무시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후에 상현과 태주의 정사 장면에서 상현은 관계를 맺는 도중 태주를 깨물고 두 가지 다른 욕망에 동시에 잠식된 상현의 모습으로서 교차의 정당함을 주장한다.

인간은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 불안함을 느낀다. 발이 닿지 않는 깊이의 물속에서 패닉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인간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또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들려 땅에 발이 떨어진 채 들춰져 업혀 끌려가는 모습 역시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다. 땅에서 떨어진 발은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불가항력을 의미하며, 인물이 본인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환경에 놓여있음을 드러내 준다. 태주에게 있어 상현에게 들려 땅에서 떨어진 발은 그녀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자유가 빼앗겼음을 의미한다. 강제성에 의한 통제는 본질적 공포를 가져온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사랑을 의미하기도 한다. 상현이 태주를 잡아 세우는 것은 그녀를 해치기 위함이 아니다. 그녀의 발에 박힌 굳은살을 안쓰러워했던 상현이 자신의 구두를 신겨주기 위한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다. 괴이하게 뒤틀린 가부장제로 인해 자신의 남편에게 붙일 핫팩을 늦게 가져왔다며 뺨을 때리는 양어머니와 모자란 티를 부지런히 드러내는 그 아들에게서는 받을 수 없었던 상냥함이다. 사랑을 표하는 대상과 상냥함에 대한 결핍을 지녔던 이의 맞닿음이 사랑을 형성한다는 것은 그리 어색한 일은 아닐 것이다.

숭고함과 타락이라는 점 역시 그러하다. 도망치는 여자를 단숨에 좇아 그 뒤를 잡아채 들어 올리는 것은 거친 완력으로부터 비롯된 행위이다. 이 행위는 분명히 강제성을 동반한 행위이며 압도적인 힘으로서 한 여성을 제압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말을 듣고 심적인 안정을 부여해주는 신부의 인자함보다는 자신의 완력에 의존하며 도망치는 사냥감을 쫓는 맹수, 즉 흡혈귀의 정체성에 더 부합하는 행위이다. 이 순간, 신부로서의 상현은 그 정체성이 타락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그렇게 잡아챈 사냥감의 피를 빠는 선택이 아닌 자신의 구두를 내어주는 선택을 한다. 이 순간은 간디가 달리는 기차 안에서 자신의 신발을 벗어 창밖을 던졌다는 일화마저 생각나게 한다. 심지어 한 짝을 잃어버린 김에 던졌다는 간디와는 달리, 상현이 구두를 내어주는 행위는 맨발의 태주에게 자신이 가진 유일한 것을 내어주는 행위라는 측면에서 부정할 수 없는 숭고한 선택이다.

이렇듯, <박쥐>의 연달아 교차하는 역설은 종국에는 파멸과 구원이라는 교차할 수 없을듯한 두 개념의 접합으로 향한다. 태주를 정서적으로 옥죄어오던 양어머니와 남편으로부터의 구원은 신부 상현의 타락으로서 이루어진다. 순교라는 이름의 자살을 꿈꾸던 상현이 끝끝내 자신을 사랑하는 이와 최후의 일출을 바라보며 소멸하는 순간은 타락한 신부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기도 하나, 인간 상현으로서 도덕성을 회복하는 구원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처연한 기도문을 읊으며 스러져가기를 소망했던 신부 상현은 사랑하는 이와 일출을 마주하며 거룩한 자살을 택한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태주에게도 동시에 일어난다. 학대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던 태주는 흡혈귀라는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완력의 상현으로부터 구원받지만, 동시에 남편을 살해했다는 죄책감이라는 짐을 짊어지게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본인마저도 인간성을 잃고 상현과 같은 흡혈귀로 타락한다. ‘여우가 닭 잡아먹는 게 죄냐?’라며 인간성을 잃고 뱀파이어로서의 욕망에만 충실하던 태주는 종국에 이르러 상현과 함께 자살하기를 택하며 그가 선물했던 구두를 자신의 발에 신는다. 신부 상현은 태주로 인해 욕망에 휩쓸려 타락하였으나 인간으로서 남길 택하며 구원받았다. 태주는 상현에 의해 탄생하였으며 타락하였고 구원받고 죽음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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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의 뜨거운 감자 중 하나인 동성애를 다룬 작품인 <아가씨>의 시대적 배경은 일제강점기다. 개인의 성적 지향성이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느냐는 의문은 차치하고서라도, 현대사회에 이르러서야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된 동성애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에서는 찬반을 논할 대상조차 되지 못할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시대적 맥락상 동성애는 금기시된 사랑이 분명하며, 나아가 제국주의 국가의 귀족 규수 일본인과 ’그 자신도 소매치기이자 사기꾼‘인 식민지국의 밑바닥에 있는 남숙희의 신분적 괴리 역시 시대적 상황의 금기라는 측면에 있어 들어맞는 부분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박쥐>와 마찬가지로 아가씨에는 수많은 역설이 드러나며, 결국엔 이 역설들은 파멸과 구원이라는 교집합으로 귀결이 된다.

히데코(김민희)가 숙희(김태리)를 서재로 데려가 이모부 코우즈키(조진웅)의 그 음란한 학대를 드러내는 순간, 숙희는 히데코의 고통을 마주하고 분노한다. 책을 북북 찢어버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물속에 집어 처넣어버린 후, 물감을 뿌리고 연신 즈려밟는 방식으로 숙희는 코우즈키의 그 음탕한 컬렉션을 완전히 망쳐놓는다. 히데코는 처음에는 주저하나 이윽고 용기를 내어 숙희의 행동에 동참한다. 위압적이고도 강압적이었던 성적 학대와 폭력으로부터 히데코가 숙희의 도움으로 용기를 찾고 벗어나기를 택하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이윽고, 숙희의 손을 잡고 그녀를 억압하던 저택의 돌담을 넘은 뒤, 평원으로 달려가며 히데코는 자신을 묶어두던 굴레를 끊고 자유를 만끽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히데코의 독백으로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

히데코의 독백은 시나리오의 흐름상 표면 그대로 읽어도 어색함이 없는 대사이다. 숙희는 명백히 사기꾼으로서 히데코의 저택에 들어선 인물이고, 작품의 전개 과정에서 자신의 목적의식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히데코와 숙희가 육체적으로 관계를 맺은 이후에도 숙희는 히데코에게 후지와라 백작의 처가 되기를 종용한다. 물감처럼 번져나갔던 사랑과는 달리 파도처럼 덮쳐오는 분노에 히데코는 숙희의 뺨을 때리고, 그녀가 스스로 목을 매기를 택할 때에서야 숙희는 자신이 저택에 들어온 이유를 고백한다. 2막에 이르러서 진실을 밝히는 과정에서 그들이 서로 감춰왔던 비밀을 털어놓는 순간, 새로운 계획이 수립되고 그 계획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을 옭아매던 족쇄에서 벗어나는 순간을 맞는다. 그로 인해 히데코는 코우즈키의 음란한 학대에서 벗어나게 되기에 숙희는 플롯 상 건조하게 히데코의 구원자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이 대사를 표면 그대로만 해석하는 이는 드물 것이다. 금기시되는 사회적 편견 내지는 범주 아래, 그들의 사랑은 결코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시선만으로 인식되지 못한다. 심지어 그들 자신도 이것을 알고 있기에 조선을 떠나 상해로 가는 과정에서 히데코는 남자인 척 변장을 하고 탈출을 시도한다. 그런데 이 둘의 도피는 코우즈키의 그 음란한 모임과 대비해서 생각해보면 참으로 괴이한 모습이다. 코우즈키의 그 음란한 집회는 비록 은밀한 변태들의 집합이었다고는 하나, 그 참여자가 여럿이었으며 그들 전부가 히데코에게 단체로 음탕한 행위를 강요하는 역설적이게도 소수의 인원에게나마 공개되어있는 모임이었다. 불건전하며 폭력적인 모임보다도 더 비밀스러워야 하는 히데코와 숙희의 사랑이라는 것은 그 순수성이 더욱 강함에도 드러낼 수 없다. 드러내는 순간, 그들은 손가락질받고 모욕당할 사랑을 한다. 그렇기에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면 그들의 사랑은 몰락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몰락의 위험을 내포한 사랑이 그들을 구원하는 감정이 된다는 것은 또 하나의 역설이다. 코우즈키의 성적 학대를 받으며 살아가던 히데코 뿐 아니라, 히데코에 대한 애정이 아니었다면 자신의 치부를 솔직히 드러낼 생각을 하지 못했을 숙희 역시 그 금기로 인해 구원받은 대상이 된다. 파멸이 곧 그들에게 구원이고 은밀한 것이 가장 순수한 것이다.


나아가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사회적인 체계로 인해 형성된 것으로 바라보는 순간, 새로운 관점이 펼쳐진다. 제목인 <아가씨>를 들었을 때, 다수의 관객은 김민희가 분한 이즈미 히데코를 칭하는 호칭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히데코만이 아가씨였을까. 히데코가 숙희에게 ’아가씨 놀이’를 하자며 그녀의 머리에 비녀를 꽂아 쪽 찐 머리를 해줄 때, 히데코와 숙희의 뒷모습이 한 화면에 나란히 배치된다. 그 모습은 놀랍도록 흡사하다. 둘이 같은 성적 지향을 지녔음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같은 존재임을 나타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얼핏 들어서는 이해가 가지 않을 이야기일 것이다. 부잣집 자제로 태어나 값비싼 옷과 장신구에 둘러싸여 살아간 일본 귀족의 규수 히데코와 도둑의 딸로 태어나 사기꾼으로서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던 숙희는 분명히 대비되는 신분적 차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가씨’라는 단어에 내포되어있는 의미를 생각해본다면 숙희 역시 ‘아가씨’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


히데코와 숙희의 신분이라는 사회적 체계를 무너뜨리는 장치는 ’어머니의 부재‘이다. 두 인물은 모두 어머니의 부재를 앓는 존재이다. 고결한 아가씨와 비천한 하녀가 같은 상실을 앓는다는 사실은 두 인물의 교감을 이루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 두 인물의 균일한 상실은 신분이라는 사회적 체계를 넘어 인간 대 인간으로서 숙희와 히데코가 동질감을 느끼게 한다. 히데코가 어머니에 대한 막연한 상실감을 말할 때, 숙희는 자신의 목적성을 잊어버리고 히데코의 얼굴을 부여잡고 그녀에게 위로를 건넨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숙희가 마치 히데코의 엄마라도 된 듯, 그녀보다 높은 위치에서 마치 아기의 얼굴을 감싸 안는 듯한 모습으로 그녀를 위로를 건넨다는 점이다. 신분의 상하가 역전되며 둘의 계층적 경계선은 허물어진다. 더불어, 히데코에게서 보이는 담대함이라는 성격이 신분의 경계를 허무는 숙희의 행동으로부터 드러난다.


장면을 언급한 부분에 있어 숙희는 히데코에 가해진 성적 학대에 분노하며 코우즈키의 서책들을 망가뜨리고 히데코의 손을 이끌고 들판으로 나간다. 그때의 숙희는 물감을 풀어 발로 서책들을 밟으며 히데코에게 해방을 위한 움직임을 보일 것을 종용한다. 또한 들판으로 나서는 장면에서 숙희는 히데코가 돌담을 넘어서기를 머뭇거리자 그녀의 발아래 짐가방들을 놓아 계단을 만들어주며 히데코가 돌담을 넘어설 수 있도록 조력한다. 이때의 히데코는 수동적이며, 숙희는 당차고 능동적이다. 그런데 2막에서 후지와라가 히데코에게 ’아가씨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라며 고백하는 데에는 히데코의 담대함이 바로 그 이유였음을 상기하면 이는 의미심장하다. 위 장면에서 담대함으로 히데코를 이끄는 이는 숙희였고 히데코는 구원의 손길을 맞잡고 가까스로 벗어나는 수동적 존재였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고귀한 아가씨의 매력적인 부분을 가장 낮은 위치의 신분을 가진 숙희가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그 둘이 단일한 인간상임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고귀함과 천함의 구분이 무의미해지고 오로지 사랑이라는 가장 순수한 감정을 통해 균일한 것으로 동치 되는 순간, 둘은 모두 ’아가씨’로서 정의되어 폭압적인 남성들의 변태성에서 벗어나 자신들만의 세상으로 구원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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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형사와 그 수사대상인 여성의 위험한 관계라는 것은 매우 낡은 소재이다. 이미 샤론 스톤이 전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원초적 본능>이 1992년에 개봉이 된 작품임을 상기해본다면 그 위험한 관계라는 것은 이미 30년 가까이 된 케케묵은 소재이기에 그리 참신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헤어질 결심>은 이런 새롭지 못한 종류의 이야기들이 흔히 맺고자 하는 정의의 실현과는 궤가 다른 형식을 취한다. 기본적으로 영화의 서사를 관통하는 주제는 엇갈림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본다면 한국인이 아닌 중국인 탕웨이를 굳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것이 이해가 간다. 언어의 엇갈림으로 상징되는 두 사람의 마음의 엇갈림은 작중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그리고 종국에는 백사장에서 스스로를 파묻고 죽음을 택하는 서래와 그녀를 찾으며 애타게 헤메이는 해준의 모습으로 그 엇갈림의 비극을 극대화하는 데에 감독은 성공한다. 이것은 기존의 평범한 수사물에서의 형사와 팜므파탈 간의 관계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비극성이라는 것은 어디에서부터 강화되는 것인가. <헤어질 결심>은 그 소재부터 상대에 대한 관계성까지 <박쥐>와 유사한 성질을 보인다. 불륜이라는 소재뿐 아니라, 팜므파탈이라는 캐릭터의 유사성, 여성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타락하는 남성 주인공과 자신을 타락시킨 상대로 인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는 아이러니까지 그 모든 점이 굉장히 유사성을 가진다. 그러나 동시에 <헤어질 결심>은 <아가씨>와도 적지 않은 연관성을 보인다. 위에 언급한 <아가씨>의 대사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는 해준이 서래에게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말이다. 서래는 분명 해준을 이용하려 한 인물이었고 해준은 그녀의 계획으로 인해 형사로서의 자부심마저 흔들릴만큼 큰 혼란을 겪는다. 그러나 그녀는 해준이 기존에 앓던 불면증의 원인인 ‘질곡동 사건’의 실마리가 될 말을 던져주며, 그에게 있어 구원임을 명백히 암시한다. 불면증을 앓으며 괴로워하던 해준은 서래가 속삭이는 말과 그녀의 숨소리를 들으며 편안히 잠을 청한다. 해준이 서래에게 이끌리는 것은 색욕으로 인한 것만은 아니다. 그에게 있어 서래는 한 가정의 남편으로서는 타락이지만 인간으로서는 구원인 아이러니한 존재이다.


깊은 밤, 해준은 서래의 행동을 지켜본다. 관찰이라는 이름의 관망이고, 관망이라는 이름의 관음이다. 형사의 신분으로 수사라는 명목하에 지켜보고 있기는 하지만, 엄연히 그녀의 말 하나하나 몸짓 하나하나를 훔쳐보며 담아두고, 수사는 명백히 뒷전으로 치우쳐져 있다. 해준은 형사가 아닌 한 명의 남성으로서 매혹당했음이 확실하지만 애써 그걸 부정하듯이 서래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기록해나간다. 그러나 결국엔 자신의 감정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한 체 독백으로 “우는구나, 마침내”라는 말을 내뱉는다. 서래와 해준이 처음 마주한 순간, 서래의 입에서 어색한 한국어로 나오던 “마침내 죽을까 봐.”라는 말이 연상되는 대사이다. 서래의 집안을 들여다보는 해준은 마치 그 옆에 있는 듯 상황을 묘사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그녀의 옆에 있는듯한 모습으로 카메라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카메라는 우는 듯 어깨를 들썩이는 서래의 감추어진 얼굴을 포커싱함으로써 실은 서래가 그저 시늉만을 하고 있다는 진실을 관객에게 폭로한다. 이 폭로를 통해 관객은 서래가 해준을 이용하고 있음을 파악한다.


그러나 이후의 장면에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해준을 이용한 서래의 모습은 전형적 팜므파탈의 모습과는 다소 괴리감을 보인다. 서래는 해준의 골치를 아프게 하던 사건의 실마리를 던져주는 것은 물론, 함께 사찰을 거니는 도중 해준이 당신의 결백을 믿었다는 듯한 말에 해준을 바라보던 시선을 떨군다. 서래가 해준을 이용하려는 계획과는 별개로 해준을 향한 마음에 진심이 묻어있음을 알 수 있는 장치다. 그 시점 이전부터 이미 그녀는 사랑에 빠진 여자이다. 해준이 그녀를 떠나가는 순간에서야 그녀는 이를 깨닫고 ‘붕괴’된다. 질곡동 사건의 그림자로부터 서래의 손에 의해 구원받았던 해준은 다시금 고통에 빠진다. 동시에 그는 한 가정의 일원으로서 뿐 아니라 형사로서도 타락해버린다. 그 사실이 해준에게는 멍에가 되어 새로운 불면증을 유발한다. 공교롭게도 이렇듯 타락한 해준을 구원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이는 서래이다. 서래의 핸드폰을 건네주며 증거를 인멸하기를 종용했던 해준에게 서래는 그 핸드폰을 내밀어 미결 사건을 종결짓기를 권한다.


이 과정에서 서래가 해준에게 증거물을 건네주는 행위는 해준이 자신이 붕괴되었다며 고백하는 장면과 오버랩된다. 두 사람의 마음이 엇갈림을 드러냄과 동시에 구원과 몰락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해준은 서래에게 구원의 순간을 선물하기 위해 증거물인 핸드폰을 건넨다. 그와 동시에 그는 정의로워야 할 형사로서 타락하고 몰락한다. 그러나 오히려 구원을 위해 선물한 증거물은 동시에 해준의 ‘헤어질 결심’이 담겨있었고 그 마음을 받은 서래는 붕괴라는 몰락을 맞이한다. 그 마음을 돌리기 위해 서래는 그 고이 간직한 마음을 입맞춤과 함께 해준에게 돌려준다. 그러나 이 되돌리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그는 서래가 꼿꼿한 자세를 가져서 좋아한다는 말로 눈 내리는 배경에서의 입맞춤의 여운을 애써 해쳐보려 한다. 서래에게 받은 증거물로 그는 새로운 구원으로 향할 수 있는 수단을 얻었으나, 살인 용의자와 입을 맞춘 그에게서 구원이 과연 다가올지는 미지수이다.


결말에 이르러 서래가 모래사장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한 후, 서래는 본인이 원한대로 해준에게 있어 미결의 사건으로 남는다. 해준은 뒤늦게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애처로이 서래의 이름을 부르며 파도 소리만이 들려오는 해변을 헤맨다. 해준은 자신을 괴롭히던 불면증에서 과연 벗어날 수 있었을까. 관객은 그러지 못하리라 어렴풋이 짐작한다. 해결하지 못한 사건으로 인해 잠 못 이루던 해준에게 있어서 서래의 실종은 구원의 상실이 되어버렸다. 서로에 의해 타락한 한 쌍은 서로에게 구원이 될 것을 알았으나, 그 깨달음이 둘 모두에게 너무나 늦었고 결국 해준과 서래는 모두 구원에 닿지 못한 채 이야기가 끝나고 만다.

-5-

결핍이 있기에 갈망이 생긴다. 그 갈망은 인간을 구원으로도, 몰락으로도 인도할 수 있다. 구원과 몰락은 어쩌면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인지 모른다. 어린아이가 양손에 쥔 사탕 중 어느 것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입안에 몽땅 털어 넣고 그 맛을 음미하는 방식의 해결방안은 어른의 관점에선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그러나, 언급한 박찬욱의 세 작품에는 그러한 해석이 옳을 것이라는 생각 이외에는 아무런 답이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본질적으로 동면의 양면은 ‘동전’이라는 하나의 사물에 존재하는 것이기에 한 몸일지도 모른다.


결핍으로 인해 형성된 구멍은 작품 내의 인물들을 모두 불완전한 존재로 만든다. 그리고 이 불완전함으로 인해서 작품의 인물들은 상대방을 갈구한다. 마치 자신에게서 빠진 조각을 찾으려는 듯 그들은 서로에게 이끌린다. 하나의 사례를 들자면, <박쥐>에서는 신부 상현의 성직자로서의 윤리관과 뱀파이어로서의 충동이 충돌하는 순간의 고뇌가 그 구멍일 것이요, 태주에게 있어서는 원치 않는 결혼과 뒤틀린 가부장적 가정의 분위기로 조성된 답답함이 그 구멍일 것이다. 이는 마음 한켠의 조각이 빠져나간 이들이 서로 만나 자신들의 상실된 공간을 채워나가려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박쥐>를 예로 들며 이야기했으나, 나머지 두 작품에서도 각 인물은 각자의 결핍을 소유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 결핍을 충족해주는 상대가 나타난다는 것이 사건의 빌미로서 작용한다. <아가씨>의 히데코와 숙희, <헤어질 결심>의 해준과 서래 역시 각자의 구멍을 가슴 속에 지니고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각자가 그 구멍을 메워줄 구원자로서의 정체성을 띠고 있으나 동시에 각자 그들에게 있어 가장 부적절한 모습으로서 현신해온다. <박쥐>와 <헤어질 결심>에서는 불륜의 대상으로서, 그리고 <아가씨>에서는 사기꾼이라는 모습으로서.


금지된 사랑은 아름다운 것일까, 추한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 박찬욱은 작품으로써 양면성을 가진다고 대답한다. 어찌 보면 뻔하고도 특별할 것 없는 대답이다. 그러나 박찬욱은 그 특유의 미장센과 연출로 그 뻔한 메시지를 특별하게 만든다. 작품들은 몰락과 구원을 서로 얽어 하나로 보이게끔 만든다. 그러나 종국엔 인물의 선택에 따라 인물들은 구원으로 나아갈 수도, 몰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박쥐>에서는 구원과 몰락을 동시에 담아냈던 박찬욱은 <아가씨>에서는 구원으로 끝을 맺었고, <헤어질 결심>에서는 끝끝내 구원에 닿지 못하는 결말을 내었다. 구원과 몰락이라는 키워드로 엮어낼 수 있는 세 가지 결말의 방향성을 제시한 듯하다.

어쩌면 그것은 단순히 무의미한 결말의 나열일수도, 혹은 감독 개인의 무의식적 결핍으로 인해 생긴 필모그래피의 향배일 수도 있겠다. 혹은 셰익스피어의 비극이 항상 희극보다 먼저 사람들에게 연상된다는 아주 단순한 생각에서부터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명확한 사실은 어떠한 방향으로 그 메시지가 향하든 간에, 그의 메시지 전달방식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는 점이다. 박찬욱의 세계는 결핍으로 인해 형성되었다. 그 결핍은 인간 사회가 일반적으로 요구하는 도덕성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도덕적 시선을 잠시 내려놓고 인간 개인의 구원을 향한 갈망에 초점을 맞추는 순간 박찬욱의 작품 세계에 대한 해석이 가능하다. 공교롭게도 이러한 인물의 결핍이 만들어낸 공허함이 박찬욱 작품의 공고한 세계를 구축했다는 것이야말로 또 하나의 새로운 역설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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