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가가 되고 싶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욕망의 발화점은 우습게도 게으름 덕분이었다. 침대에 턱을 괴고 누워 넷플릭스를 보는 것으로 돈을 벌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은 직업이 어디있겠는가. 철없고도 안일하고도 어리석은 생각이지만 최초의 충동은 그것으로 시작되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꿈을 꾸었냐고 누군가 따져물을 지도 모를 일이지만, 사실 어떠한 거창한 이상향으로 이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라는 대답이야말로 진정 우습지 않겠는가.
물론 쉽게 든 충동이라 하여 노력의 요구 역시 그에 비례하진 않다. 글을 써보겠답시고 이것저것 찾아도 보고 수업도 들어보았다. 그 과정에서 막막함도 느끼고 좌절감도 느꼈다. 이래저래 머리를 싸메고 써낸 글은 엉성하기 그지 없었고 나 자신의 수준에 실망하기도 하였다. 어쩌겠는가. 그만큼 내가 신경을 덜 기울인 탓일테지.
여기 내가 쓴 첫 비평을 기록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당연스럽지만 잘 쓴 글도 아니요, 매끄러운 글도 아니다. 훗날, 이 글을 보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채 "이 놈아, 이런 걸 글이라고 썼느냐."라며 부끄러워 할 지도 모르겠다. 다만 사람에게 있어 '처음'이라는 것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기 마련인데, 그저 한 때 이런 글도 썼었지라는 방식으로 휘발시켜버리긴 싫었다.
그래서 여기에 기록으로써 여기에 글을 남기고자 한다. 비평의 주제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 드러나는 배타성과 불친절함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낸다"이다.
◆ 지극히 개인적인 재미에 의해 겉돌아버린 철학
노신사 슈왈즈가 주인공 릭 달튼을 찾아온다. 그들은 짧은 인사와 악수를 나눈다. 릭은 한 때 <바운티 로> 등의 프로그램에 출연한 왕년의 슈퍼스타이지만 이제는 파일럿 프로그램의 단역만을 맡으며 살아가는 배우이다. 슈왈즈는 릭의 과거 영화들을 인상깊게 보았단 말을 시작으로 그에게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에 출연하라는 새로운 도전을 제안한다. 그 이야기를 듣던 릭은 표정이 굳어간다. 슈왈즈가 하는 말들이 더이상 예전같지 않은 자신의 위상을 뼈아프게 지적하는 것으로 다가온다. 슈왈즈와의 대화가 끝나 후, 가게의 문을 나선 릭은 자신의 친구이자 전담 스턴트맨인 클리프에게 기대어 눈물을 보인다. 그러나 클리프는 의아해한다. 슈왈즈는 릭을 모욕하고자 한 것이 아닌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길 제안했다. 클리프에게 있어 릭은 그저 새로운 기로에 선 것으로만 보인다.
스파게티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스파게티 웨스턴이라는 장르는 이탈리아 연출가들이 만든 서부영화이다. 이 장르의 특징이라 하면, 단순하고 폭력적이며 선과 악이 구분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또한, 배우들의 모국어가 영어가 아닌 만큼, 각자 모국어로 연기를 한 뒤에 후시녹음을 통해 대사를 영화에 집어넣었는데, 이로 인해 입술과 문장이 일치하지 않는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당대의 평론가들은 이러한 서부 시대의 낭만과는 거리가 먼 악인들의 이전투구를 혹평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렇기에 저 장면 뒤에 짧게 나오는 릭의 “스파게티 웨스턴을 본 적은 있어? 그건 완전 코미디라고.”라는 짧은 투덜거림은 이러한 배경지식을 아는 이들에게는 당대 미국 영화계의 상황을 잘 짚은 대사로 보인다. 하지만 다수의 관객에게 이를 통해 설명을 끝마치려는 것은 명백한 감독의 나태함이다. “굳이 내가 이런 것까지 설명해줘야 하니?”라며 힐난하는 듯하게까지도 느껴진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한 인터뷰에서 ‘2020년대는 영화 역사상 최악의 시기이다. 이데올로기에 빠져 재미를 등한시하기 때문이다.’라며 볼멘소리를 하였다. 이 말의 바탕에는 ‘영화라면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철학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마땅히 그 철학을 따라야 할 당사자인 그가 만든 작품인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미국인들 외의 관객이 재미의 대상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다. 이것은 명백한 ‘배타성’ 혹은 ‘불친절함’이다.
◆ 지엽적인 국가적, 시대적 배경의 선정으로 인해 드러나는 배타성
첫째로, ‘국적에 대한 배타성’이라는 영역을 짚고자 한다. 타란티노가 국수주의적 성격이 강한 필모그래피를 가졌다면, 이러한 아쉬움은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그가 연출한 작품인 <킬 빌>의 경우, 일본 사무라이 문화와 홍콩 무협 영화의 오마주로 가득한 영화이다. 미국인들에게 있어 아시아의 국가들은 낯선 곳이며,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존재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양적 요소들이 미국을 떠나본 바가 없는 여느 미국인 관객들에게 있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저 이 낯섦을 새로운 자극으로 제공할 뿐, 영화는 어떠한 공부도 요구하지 않는다. 비단 특정 국가에 이해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닌 국가의 특수성을 고려의 요소에서 아예 배제한 예도 있다. 그의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이 대표적이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어떠한 특정한 요소에 대한 배경지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관객은 그저 인물들이 나누는 상스럽고 천박한 욕설이 섞인 수다에 귀를 기울이고 스토리에 흠뻑 젖어 들어간다. 어느 누구도, 어째서 저들은 서로를 색깔이 들어간, (예컨대, ‘미스터 화이트’ 혹은 ‘미스터 핑크’ 따위의) 이름으로 서로를 지칭하는지 이해할 필요가 없다. 심지어 이런 별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은 장면조차 인물들의 수다라는 장면을 할애해 코믹하게 관객들에게 알려주는 친절을 보인다. 즉, 앞의 두 영화는 전세계 다양한 국적의 관객들에게 특정 지식을 요구하지 않는 이른바 ‘글로벌 시네마’로서 갖추어야 할 조건을 완벽히 충족한다. 물론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역시 간간히 특정 장면의 삽입을 통해 관객에게 설명을 해주고자 하는 시도는 보인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과거 그의 노력에 비해선 상당히 빈약하다.
시대적 배타성에 대해서도 짚지 않을 수 없다. 앞선 부분에서 언급했듯, 스파게티 웨스턴이라는 장르가 과거에 어떻게 인식되었는지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장면에서 릭의 눈물을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 타란티노 감독을 좋아하는 주요층인 젊은 사람들에게 있어 이것은 얼핏 들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명품 스파게티 웨스턴의 주연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제 90세가 넘은 노인이다. 그를 스타로 만들어주었던 <황야의 무법자> 시리즈는 40세 이하의 젊은 관객들에게는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촬영된 영화들이다. 그들은 과거의 스파게티 웨스턴이 어떠한 위상을 가졌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 있어 그 장르는 한때 유행했던, 그러나 현대에는 시대의 유행에 뒤떨어져 더이상 촬영되지 않는 철 지난 낡은 장르이다. 이 영화를 본 할리우드의 원로들이 매우 흐뭇한 시선으로 이 영화를 관람했다고 전해들었다. 놀랍지 않다. 그들에게 있어 그것은 노스텔지어요, 과거의 기록이다. 그러나 영화를 좋아하는 어느 젊은이는 그것에서 어떠한 향수도 느낄 수 없다. 그는 마음이 아닌 머리로만 이해할 뿐이다. 비록 그의 의도가 선배들이 이룩한 영화산업에 대한 공헌을 예찬하고자 한 것일지라도, “우리 때는 이런 게 참 좋았는데 말이야.”라는 방식으로 낡은 이야기를 꺼내드는 것은 젊은이들에겐 다소 고압적으로 느껴진다. 더불어 ‘헤모글로빈의 시인’이라 불리는 살벌하고도 광인과 같은 별명에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낡고 고루한 태도이다.
◆ 무너져 버린 균형, 자신들만의 영광
그의 진심어린 애정은 잘 알겠다. 그러나 상호적이지 않은 애정은 강도가 심화되면 화자와 대상을 강하게 얽맨다. 그 얽매임은 족쇄가 되었다가 올가미가 되어 서로의 숨통을 조인다. 결국, 날숨은 나오지 못하고, 듣는 이는 그 질식하는 소리에 질려 귀를 닫아버린다. 그렇게 소통은 단절된다. 그는 두 가지 정체성을 가진 인물이다. 할리우드 영화를 너무나 사랑하는 영화광, 그리고 세계적인 명성의 거장. 두 개의 정체성 중 그는 하나의 정체성에 지나치게 무게추를 실어버렸다. 이른바 균형의 손상이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쿠엔틴 타란티노라는 전 세계에 수많은 팬을 거느린 감독이 갖춰야 할 배려가 다소 부족한 작품이었다. 1960년대 할리우드의 감성을 잘 표현해낸 것은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한국인들에게 있어 1960년의 할리우드는 낯선 곳이다. 그것은 산업화를 거쳐온 세대와 민주화를 거쳐온 세대, 그리고 현재 소위 MZ세대라 불리우는 전혀 다른 새로운 환경에서 자라온 세대 모두에게 마찬가지다. 이는 그들의 배경지식의 공백으로 생겨난 무지함이 아니다. 그저 그들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명확하기에 생기는 일이다. 지나치게 할리우드에 초점이 맞추어진 카메라는 할리우드 외곽의 영화에 익숙해진, 이른바 대한민국의 충무로 키즈들에게 있어선 소외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과거 감독이 보여주었던 내려놓고 즐길 수 있는 영화에 비해 너무나 많은 배경지식을 요구한 영화는 되려 배타성을 띄고 말았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이른바 ‘퇴보’이다. 언젠가 그의 마지막 연출작 <무비 크리틱>이 개봉한다고 한다. 부디 그 마지막 연출작에서는 이러한 불편함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며 비평을 줄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