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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폴리 아 되 비평

[조커:폴리 아 되 – 두터운 분장으로 숨겨둔 캐릭터와 영화의 민낯]

by 조성현

(2025 동아일보 신춘문예 출품작)


독방에 수감된 아서(호아킨 피닉스)에게 리(레이디 가가)가 찾아온다. 어떻게 찾아왔는지에 대한 설명이 썩 납득이 가진 않지만, 그건 그리 중요치 않아 보인다. 외부와 단절된 공간에서 둘만의 세계는 형성되고 이윽고 야릇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둘의 밀착이 이루어지는 순간 리는 아서를 만류한다. 분장 도구를 꺼내든 리는 아서의 얼굴에 색조를 칠하며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줘.” 리는 손가락에 화장품을 묻혀 아서의 얼굴에 천천히 바른다. 연인의 얼굴에 어설픈 분장을 한 이후, 아서와 리는 짧고도 싱거운 정사를 나눈다. 건조하고 조금은 어설픈 둘의 은밀한 밀회를 은막을 통해 바라보던 관객들의 머리에는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리가 정사를 나누고자 했던 대상은 얼굴에 분칠을 한 성난 군중의 대변자 미치광이 조커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과연 그녀가 살을 맞댄 이는 정녕 조커였는가.


영화의 내부에서 아서 플렉이라는 개인은 대중에게 있어 그들을 대변한다고 인식되지 않는다. 분노한 군중이 자신을 투영하는 존재는 아서가 분한 캐릭터인 ‘조커’이다. 법정에서 아서가 조커의 옷을 입고 분노를 토해내는 장면에서 법정의 관중들은 환호한다. 그와는 반대로 아서가 카메라를 응시하다가 더는 못 하겠다며 눈물을 짓는 장면에서 관중들은 실망을 토로한다. 자신이 억압받고 있다고 생각해오던 고담의 주민들은 조커를 자신의 대변인으로 생각했고, 그를 통해 자신들의 분노가 표출되기만을 바라왔다. 그 과정에 있어 아서라는 개인의 운명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그렇기에 대중은 맨 얼굴의 ‘아서 플렉’이 아닌 얼굴에 분칠을 한 ‘조커’라는 캐릭터에 환호한다. 두꺼운 분장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추는 조커의 모습으로서 아서는 당당히 어깨를 펴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과장된 몸짓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법정에서 좌중을 압도한다. 그러나 후반부 눈물을 지으며 아서라는 나약한 개인을 드러낸 후, 최종심에서 아서는 조커의 모습이 아닌 맨 얼굴의 아서 플렉으로서 판결을 받는다. 두껍다고는 하지만 고작 화장 솜 한 장으로 지워질 그 한 꺼풀의 분장이 아서라는 인물의 본연을 감추는 역할을 해버리는 것이다.


분장과 가면, 복면 등은 그 기능이 통하는 장치들이다. 착용한 이로 하여금 정체를 외부인에게 드러내지 않고 감추는 것이 가장 근원적인 기능이다. 대표적으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다크나이트>의 도입부를 떠올려보자. 오프닝이 시작되면 한 인물이 가면을 들고 차량에 탑승한다. 차량에 탑승해 있는 기존의 인물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있다. 이들은 모두 은행강도이다. 은행을 턴다는 범죄를 저지르는 일에서 강도들이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가면을 쓰는 것은 당위적인 행위이다. 그러나 강도들이 그 가면을 쓴 채 서로에 의해 차례차례 목숨을 잃는다는 그 순간까지도 관객은 가면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지 않는다. 가면의 진정한 의의가 나타나는 순간은 도입부의 마지막 부분, 조커(히스 레저)가 자신의 가면을 벗고 그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에 있다.


조커는 강도 현장의 한복판에 서서 가면을 벗으며 자신이 모든 계획의 방점을 찍는 존재임을 관객에게 각인시킨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냄과 동시에 자신의 정체를 숨긴다. 새하얗게 분칠한 그의 얼굴 아래, 그의 진정한 정체는 감쪽같이 감추어져 있다. 이중의 가림막이자 조커라는 등장인물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는 장면이다. <다크나이트>의 조커는 자신의 불분명한 정체를 영화 내내 유지하며 관객에게 끊임없이 정체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한다. 그 정의할 수 없는 불분명한 혼돈이 곧 그의 정체성이라고도 규정할 수 있다.


반면 <조커:폴리 아 되>에서는 조커라 불리는 존재가 아서임을 확실하게 드러낸다. 그의 망상을 표현하는 뮤지컬 파트 외에 영화 대다수의 부분에서 아서는 자신의 맨 얼굴을 드러낸다. 그는 명백히 ‘아서’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조커’로 명명되지 아니한다. 그런 포인트에서 다시 처음 묘사했던 장면으로 돌아간다면, 리의 대사는 대단히 모순적이다. 자신의 정체를 감추는 분장을 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내 달라는 리의 요구는 괴악하기 그지없다. 이는 리가 아서의 진정한 모습을 분노에 가득 찬 광대 ‘조커’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반부, 아서가 나약한 자신을 고백하며 눈물을 보이는 순간, 리는 아서를 명백히 오독했음이 드러난다. 한 꺼풀의 두터운 분장의 뒤, 아서라는 나약한 개인이 드러나는 순간이고 그녀가 선망했던 조커라는 존재의 환상이 깨지는 순간이다.


리가 선망했던 ‘조커’라는 존재는 <다크나이트>의 조커와 같은 존재이지 않을까 싶다. <다크나이트>의 조커는 아서와는 다르게 ‘그저 세상이 불타길 바라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도입부의 은행강도 장면에서부터 단순히 광기에 찬 인물이 아닌, 철저하게 지능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그리고 이 고도의 지능을 자신의 철학인 ‘혼돈’을 세상에 흩뿌리기 위한 수단으로써 이용한다. 그 스스로는 계획 따위는 세우지 않는다고 이야기하지만,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은행강도 장면에서부터 하비 덴트를 타락시키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행보는 철저히 계획적이다. 배트맨 시리즈에서 그에게 주어진 ‘범죄의 광태자’라는 별명에 걸맞은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행보의 바탕에는 세상을 혼돈에 빠뜨리고 싶다는 순수한 악의가 가득 차 있다.


반면 아서는 그렇지 않다. 그의 행보에는 순수하게 계획을 찾아볼 수 없다. 전작 <조커>에서도 그는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질렀으며, 세상을 불태우거나 누군가를 응징하겠다 따위의 사명감이나 대의는 없다. 그가 살인을 저지른 후 느꼈던 것은 해방감이었으나, 애초에 그는 해방감을 느끼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그의 첫 살인인 지하철에서의 사건은 세 남성의 조롱과 폭행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었다. 또한, 작품 말미의 살인 역시 본래 자살하겠다는 계획을 머레이의 도발로 인해 취소하고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그가 저지르는 모든 종류의 살인은 철두철미한 계획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이는 개인의 원한과 충동으로 인해 도출된 결과물이며, 부패한 부유층을 응징하겠다는 숭고한 사명감으로 인한 것조차 아니다. 리는 아서를 성난 민중의 대변가이자 세상을 불태울 혁명가이길 기대한 것 같으나, 애초에 철학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아서라는 인물은 그 역할을 해낼 적임자가 아니었다.


아서의 비극은 바로 그 포인트로부터 기인한다. 리가 그의 얼굴에 바른 분장 도구는 혁명 열사로의 임명이었으나, 철학이 존재하지 않은 얼떨결에 임명된 혁명가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연기뿐이다. 영화의 오프닝으로 상영되는 짧은 애니메이션으로부터 보여지듯, 아서는 대중이, 그리고 리의 바람이 투영된 그림자의 폭력에 시달리며 종국엔 그 그림자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바지가 벗겨지는 광대’로서의 결말을 맞이한다. 그가 저지른 몇 차례의 우발적인 살인에 의미를 부여한 것은 리를 포함한 대중이었고 그는 그저 이 작품 내내 사랑에 빠진 한 남성으로서의 모습만 보일 뿐이다. 그 모습은 분명 뜨거운 피의 혁명가와는 거리가 멀다.


사실 분장 뒤에 감추어진 나약한 개인이라는 아서의 정체성은 전작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커>의 아서 플렉은 발작적으로 웃음이 터져 나오는 병을 앓고 있는 환자였으며, 허름한 아파트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가는 가난한 인물이다. 제대로 된 연애조차 한 적이 없으며, 등은 굽었고 자세는 구부정하다. 사람들을 웃기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으나, 그의 농담은 도무지 재미가 없다. 인종이 백인이라는 점, 그리고 성별이 남자라는 점에서 수많은 호사가들에 있어 소위 말하는 ‘인셀’들을 대표하는 캐릭터가 아니냐며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그러한 점을 차치하더라도 아서라는 인물 개인을 평가한다면 그는 명백히 ‘사회적 약자’가 맞다. 이러한 그의 정체성은 법정에서 그를 변호하는 변호사의 입을 통해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작중, 아서에게 이 변호사의 변론은 매우 불편하고 모욕적으로 다가오나, 냉정히 말하자면 그것이 아서가 살아온 일생을 말해주는, 그를 아주 담백하게 설명해주는 말이기도 하다.


‘조커’ 아서 플렉은 <다크나이트>의 ‘조커’가 되지 못한다. 철학이 부재한 평범 그 이하의 인물이라는 점 이외에도 분장을 지운 맨 얼굴에서도, 분장을 칠한 미치광이 조커로서도 그의 본질은 그저 ‘나약한 인간’이다. 분장을 뒤집어쓴 채, 법정을 나와 감옥으로 돌아간 뒤 교도관들이 그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 아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서는 영화 내내 끝까지 괴롭힘을 당하며 개인으로서 지워져가고 다수의 인물들로부터 폭력에 시달린다. 심지어 그가 사랑하는 대상인 리조차도 있는 그대로의 그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분장으로 드러나는 조커라는 캐릭터를 사랑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오히려 다른 방식의 폭력을 가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리는 아서에게 자가변론을 종용한다. 그러나 관객의 눈에 아서의 자가변론은 판결에 좋은 영향을 주지 못 할 것이 확실해보인다. 아서가 리의 요구를 수용하여 보이는 법정에서의 쇼맨십은 마치 죽음으로 가는 춤으로마저 보인다.


감독의 메시지는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명백해진다. 아서라는 인물을 ‘사회적 약자’로 직시하고 세상으로부터 억압받는 개인으로 취급해야 한다는 생각은 1편과도 같이 명확해 보인다. 물론 <조커>가 논란이 매우 많은 작품이었다는 점은 명백하다. 수많은 논란의 장에서 평론가 중 일부는 ‘인셀의 탄생’이라며 <조커>가 혐오범죄에 정당성을 부여한다고 비판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분명 일부 계층들이 자신을 조커에 대입해 혐오범죄를 저지른 일은 실제로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방범죄가 영화의 가치 그 자체를 깎아내리는 이유가 된다면, 마틴 스코세이지의 <택시 드라이버>와 같은 작품 역시 그 화살을 피해가긴 어려울 것이다. 소위 ‘잘 만든’ 작품에는 현실과 영화를 구분치 못하고 사고를 치는 이들이 항상 등장하였고, 조커 역시 그런 반열에 있던 작품 중 하나였을 뿐이다.


감독이 영화를 관람하는 이들로 하여금 그 메시지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하는 것은 큰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전작 <조커>에서도 아서가 토마스 웨인을 찾아가 항의하는 장면 중 스쳐 지나가듯이 보이는 장면이 있다. 영화관 바깥, 성난 군중들이 광대 가면을 쓰고 기득권에 항거하는 모습과 대비되게 영화관의 부르주아들은 앉아서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즈>이다. <모던타임즈>가 당대 자본주의의 맹점을 짚고 비판하는 작품이라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이는 매우 황당한 광경임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영화 내의 상황은 분명 비극이지만 영화 바깥의 관객에게 있어 이는 헛웃음을 유발하는 훌륭한 블랙코미디이다. <조커>의 주제를 관통하는 대사이자 명언이 찰리 채플린의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요,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라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감독의 의도가 매우 선명하게 드러난 장면임을 파악할 수 있다.


<조커:폴리 아 되> 역시 이러한 전편에서 보였던 감독의 메시지 전달 능력은 여러 차례 발현된다. 예컨대, 아서가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감옥에 갇힌 채 리와 만나 입으로 담배 연기를 전하는 장면은 ‘폴리 아 되’, 즉 ‘공유 정신병’이라는 부제에 걸맞는 연출이다. 담배 연기라는 해로운 기체가 아서에게서 리에게로 전이되는 장면은 손상된 영혼의 전이 혹은 아서의 망상증이 리에게로 전이되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리는 아서를 만난 순간부터 거짓말을 섞어가면서까지 그와 동질한 존재임을 주장한다. 아서 역시 리에게 빠져든 채 망상 속에서 그녀와 손을 잡고 세레나데를 부른다. 외로웠던 약자 아서의 곁에 동료가 생겼고, 아서를 내내 괴롭혀왔던 망상증과 피해의식 그리고 울분은 그의 유일한 동지, 리에게로 전이된다.


또한 영화 중간중간 언급되는 ‘아서를 주제로 한 영화’는 감독의 전작 <조커>를 연상시키게 한다. 리가 아서에 대한 영화를 보고 범죄를 저질러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고 말하는 장면은 <조커>를 보고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울분에 찬 이들이 혐오범죄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연상시킨다. 법원에서 영화를 비난하는 이는 <조커>에 대해 손가락질을 하던 일부 평론가들과 관객들을 연상시키며, 리가 그 말을 듣고 신경 쓰지 말라며 속삭이는 것 역시 그러한 반응들과는 상반된, 울분에 찬 몇몇 이들의 <조커> 예찬론을 대변해주는 듯하다. 이런 식으로 군데군데 드러나는 감독의 메시지 전달 방식은 그 의도가 꽤 명확하며 세련되기까지 하다. 전작에서 드러난 감독의 재치있는 메시지 전달 능력은 그 빛이 바래지 않은 채 유지된 모습이다.


다만 감독의 능력과는 별개로 그가 세간의 평에 직접적으로 맞설 용기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이 메시지를 전달하기까지 영화가 수많은 분칠을 해버렸기에 전체적인 기조가 해명문에 가까워 보였다. 토드 필립스 감독이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본질적으로 전작의 그것과 크게 차이가 없어 보였으나, 문제는 그 과정에 있어서 비평가들과 일부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오해를 불식시켜야겠다는 의도가 다분히 읽혀졌다. 그 과정에서 감독은 영화를 다양한 색조로 분칠하였고, 이러한 분칠이 오히려 영화의 숨구멍을 모조리 막아버린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든다.


첫째로 영화의 얼굴에 분칠을 한 장면으로 여겨지는 것은 장르의 선택이라는 부분이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법정물이지만, 가장 큰 척추를 담당하는 장르적 정체성은 역시 뮤지컬이다. 이미 많은 이들은 어째서 토드 필립스 감독이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선택했는지 알고 있다. 애초에 전편 <조커>의 경우 마틴 스코세이지의 <택시 드라이버>와 <코미디의 왕> 등의 작품을 참고한 것이라 감독 그 자신이 인정하고 언급한 부분이다. 그런 궤에서 <조커:폴리 아 되>가 스코세이지 감독의 <뉴욕 뉴욕>으로 이어지는 필모그래피를 참조했다고 분석할 수 있다.


그러나 본작의 문제는 <뉴욕 뉴욕>은 스코세이지 그 자신조차 인정한 실패작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단순 흥행의 면뿐만 아니라, 당대 평론가들에게조차 좋은 평을 받지 못한 작품이 바로 <뉴욕 뉴욕>이다. 이 처절한 실패로 인해 스코세이지는 다시는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손을 대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몇 가지 의문이 든다. 스코세이지의 뮤지컬은 어째서 실패했는가. 그리고 토드 필립스가 그 스코세이지조차 실패했던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구태여 도전을 한 당위성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자신이 하면 다르다는 토드 필립스의 오만이었을 뿐일까.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등장인물들이 극 중에 부르는 노래는 어디까지나 현실과 구분된다. 노래를 듣는 이들은 관객이지 작품 내의 인물들이 아니다. 대다수의 뮤지컬 장르에서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장면들은 주인공이 자신의 포부나 감정을 노래로 표현하는 모습들이다. 뮤지컬의 등장인물들은 철저히 그들만의 세상에서 고립되어 있으며 작품 내의 다른 인물들과 원활히 소통하고자 하지 않는다. 대중적으로, 그리고 평론적으로 성공한 뮤지컬 영화들은 그렇기에 대다수가 판타지라는 장르적 장치를 이용한다. 등장인물이 노래를 부르는 순간, 주변의 배경에 배치된 사물들이 노래를 부르는 인물의 소품으로써 움직이고 활용된다. 이러한 연출은 노래를 부르는 인물이 철저히 자신의 세계를 이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관객에게 보여지는 것은 그 세계이고, 애초에 현실과는 괴리가 있는 판타지라는 장르의 작품을 보러 간 관객에게 있어서 이는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특질은 스코세이지의 작품 세계와는 다소 맞지 않는 옷으로 느껴진다. 마틴 스코세이지의 작품 대다수는 현실적이고 건조하다. 그의 대표작 <택시 드라이버>에서 주인공 트래비스 비클(로비트 드니로)이 베시(시빌 세퍼드)에게 실연당한 후 그녀에게 다시 만나달라고 애원하기 위해 전화를 거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트래비스가 전화기 앞에서 베시에게 사과를 하며 그녀의 마음을 돌리려고 노력하는 동안, 카메라는 트래비스를 지나 텅 빈 복도를 비춰준다. 텅 빈 복도에 트래비스의 말들이 공명하듯 울리고 관객은 이 순간 트래비스의 마음이 더는 베시에게 닿지 못하고 공허하게 떠도는 것이라 인식하게 된다.


이렇듯 <택시 드라이버>에서의 그가 사용한 연출방식은 한 남성의 고독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차갑고도 쓸쓸한 느낌이다. 건조하다 못해 사실적이기까지 하다. 마틴 스코세이지는 필모그래피에서 미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조명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는 그의 명언에서 드러나듯 살아온 역사에서부터 소재를 발탁해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내는 그의 특질과 능력을 의심하는 이는 적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반대로 이야기하면 현실과 완전히 분리되는 형태의 작품을 만드는 것은 다소 어색하게 느껴진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판타지라는 장르에서는 ‘개인적인 것’을 발굴해내어 작품에 배치하는 일은 쉽지 않다. 배경을 장식하는 많은 장치들이 전적으로 작가의 상상력에 의존하는 것이고 감독 혹은 작가가 영화 내부에 배치할 수 있는 요소는 자전적 이야기로부터 형성된 인물의 성격 정도가 고작일 것이다.


스코세이지의 작품 세계를 참조하였다는 토드 필립스 역시 그러한 한계에 똑같이 부딪힌다. 비록 가상의 이야기라고는 하나, <조커:폴리 아 되>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루고자 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다른 인물들과 소통하기 위해 아서는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감독은 전작에서 아서가 시달려왔던 망상증을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성립시키는 도구로써 이용한다. 분명하게 아서와 리가 보이는 퍼포먼스들은 아서의 머릿속이라는 공연장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명확하게 규정하고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작품에서 중간중간 아서가 노래를 부르는 순간, 관객은 이를 아서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로 인식한다. 영화는 화려한 춤과 노래가 끝맺는 순간에 건조한 현실을 관객들에게 비추어 줌으로써 현실과 망상을 구분시킨다. 전편 <조커>에서 현실과 망상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드는 방식과는 분명한 차이가 두드러진다. 그러나 이 선명한 경계는 오히려 작품에서의 불규칙한 리듬을 형성한다. 즉, 관객은 어느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춰야 할지 혼돈에 빠진다.


살갗과 분장의 경계선이 명확하게 보이듯, 아서의 망상과 현실은 명백한 경계선을 보인다. 현실과 구분된 망상은 맨살 위에 발린 분칠처럼 본질적인 것과는 거리가 매우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관객은 이러한 망상이 분명히 가짜라는 것을 인식한 채 스크린을 바라본다. 이 점에서 더욱 영화가 텁텁하게 느껴진다. 화려한 색채와 익살스러운 재기를 보이던 ‘조커’가 정작 현실에서는 끊임없이 핍박당하고 모욕당하며 짓밟히는 모습에서 관객은 극명한 대비를 느낀다. 비록 그 대비를 통해 감독의 의도는 드러나는 바이나, 관객으로서는 끊임없이 답답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사실 이는 크게 보면 전작 <조커>와 크게 차이가 드러나는 부분은 아닐 것이다. 분명 <조커> 역시 끊임없이 아서가 사회로부터 억압받고 괴롭힘당하는 모습이 지속해서 관객에게 보여졌으며, 이로 인해 관객이 먼지를 씹는 듯한 텁텁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 <조커>와 <조커:폴리 아 되>는 후반부에 들어서 다른 선택을 한다. 그리고 이 선택이 관객에게 있어 결정적으로 두 작품의 호오를 크게 갈리게 만드는 작용을 한다고 본다.


<조커>의 하이라이트라고 불릴만한 장면은 역시 얼굴에 분칠을 한 아서가 붉은 양복을 입고 계단을 내려오며 춤을 추는 장면이다. 이 장면이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까닭은 억압받던 아서 플렉이라는 캐릭터가 조커라는 존재로 각성하며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몸짓에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꼈기 때문이다. <조커>에 대한 호평의 가장 근원적인 부분은 아서라는 인물이 응축된 에너지를 터뜨리며 관객들에게 환희를 안겨주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조커:폴리 아 되>에서 토드 필립스는 이러한 조커를 호평하는 이들의 기대를 정면으로 배반하는 선택을 한다. 이 영화에서는 카타르시스가 없다. 마치 조커를 호평했던 이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바를 안겨주지 않겠다는 생각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에 찬사를 보냈던 이들은 단순히 그가 경계하고자 했던 ‘인셀’들 뿐만은 아니었다. 일반 관객들이 영화관으로 향하는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위함이고 응축된 에너지가 터지는 순간 느껴지는 흥미진진함을 즐기기 위해서이다. 이는 보편적인 관객의 바람이었으나 감독은 그 점을 간과했다.


분장을 위한 분칠은 그 얼굴을 치장하기 위해서도 쓰이는 방식이다. 영화 전체의 텁텁하고 씁쓸한 분위기를 치장하여 가리려고 하듯 영화는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분칠한다. 지속적으로 아서의 망상을 화려한 색채로 장식하는 감독의 연출을 보며 관객은 후반부에 망상과 현실이 맞닿게 되는 ‘조커’라는 빌런의 타이틀에 걸맞은 카타르시스를 선사해주길 기대한다. 그러나 오랜 기다림 끝에 관객들에게 감독이 선보인 메뉴는 그들이 원하는 것과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 관객은 ‘조커’ 아서 플렉이 애초에 빌런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염두에 둔 채 극장으로 향했다. 그들이 호기심과 기대를 가졌던 바는 그 빌런 ‘조커’를 탄생시키는 기원이 어떤 악으로부터 기원한 것인지, 그리고 각성한 조커가 얼마나 보는 이로 하여금 정서적 청량감을 느끼게 할지 이다. 그러나 영화는 청량감을 주지 않은 채 맥이 뚝 끊기듯 끝을 맺고 말았다.


감독은 자신이 아서 플렉이라는 캐릭터에게 각성의 순간을 안겨주지 않고 카타르시스라는 오락적 요소를 제거했다. 그는 이 방식으로 ‘인셀’들에게 환호를 안겨주지 않음으로서 대중에게 자신은 그들을 호의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견해를 밝힌다. 그러나 이는 지나친 분칠이었다. 일반적 대중이 어째서 극장으로 향하는지에 대한 고찰이 분명 부족했다. 이로 인해 영화는 상업영화와 소위 누벨바그라 불리는 작가주의 영화의 사이에서 그 정체성이 불분명해졌다. 감독이 택했던 영화의 낯에 분칠을 하는 방식은 영화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했고 이러한 선택이 관객을 아리송하게 만들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영화에 덧씌워진 또 다른 분장이라면 예고편과의 괴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조커:폴리 아 되>는 개봉을 앞두고 각종 미디어에서 광고를 내보냈다. 그 과정에서 보였던 씬 중 하나가 조커로 완전히 각성한 아서가 리와 함께 춤을 추며 법원의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이었다. 이 예고편을 본 관객들은 마치 <조커>에서와 같이 최종의 장에서 조커가 그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인 모습으로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해줄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정작 본 영화에서는 이러한 장면은 없으며, 정작 은막 위에서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눈물을 흘리며 조커의 존재를 부정하는 아서와 끝끝내 무기력하게 툭 쓰러져 목숨을 잃는 그의 육체이다. 예고편이라는 형식을 취한 분장은 관객에게 그 정체를 감추는 역할을 수행했고, 이는 더 강하게 표현하자면 일종의 기망이었다.


전작에서의 연장이라 할 수 있는 기저에 깔린 메시지를 감독은 다소 다른 방식으로 차별화를 하고팠던 것으로 보인다. 아서라는 인물은 <조커>에서 보여진 것처럼 여전히 나약하며,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주변인들로부터 개인으로서 보살핌을 받지 못한다. 그 과정에 있어서 고통받는 개인에 대한 시선을 조망한다는 본질 자체는 전혀 변할 것이 없지만, 이러한 명확한 경계선의 설정으로 인해 관객이 아서의 고통에 절감하는 순간은 확연히 줄어들어 버렸다. 고작 빌런 ‘조커’의 사랑 타령이나 듣기 위해 관객이 극장으로 향하진 않는다. 그것은 너무나 진부하며, 관객이 원하는 바와도 크게 동떨어진 것이다.


가면도 분장도 때에 따라 써야 할 때와 벗어야 할 때가 있다. 그 누구도 얼굴을 가린 체 평생을 살아갈 수는 없다. 가면과 분장은 가림으로써 그 역할을 하지만 반대로 그것을 벗어던졌을 때에서야 역할을 다하는 경우도 있다. 어째서 <다크나이트>의 조커는 범죄 현장에서 가면을 벗어던졌는가. 그의 숙적 배트맨은 왜 으슥한 밤거리에 가면을 쓰고 범죄자들을 상대하는가. 벗어던지는 가면으로부터 느껴지는 해방감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순간의 청량함을 느끼게 한다. 마치 가면 뒤에 땀으로 뒤덮인 얼굴이 가림막으로부터 해방되어 외부의 공기를 맞닥뜨리게 되는 순간처럼 말이다.


반면, <조커:폴리 아 되>는 분장을 뒤집어쓴 채 영화가 끝나버리고 말았다. 분장에 질식해 환기되지 못한 영화의 분위기는 답답한 공기만을 관객에게 마시게 했다. 메시지라는 이름의 영화의 민낯을 가리려 이것저것 분칠을 해버린 감독의 고심 속에 정작 플롯과 캐릭터는 질식해버리고 말았다. 불우한 삶을 지내온, 영화 내부에서 배척받는 것으로도 모자라 외부에서조차 ‘인셀의 대명사’라는 오명만을 뒤집어쓴 가엾은 아서 플렉은 그 창조주에게마저 보듬어지지 못한 채 그렇게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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