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인터넷에서 사용하지 않는 메일을 정리하면 북극곰의 집이 유지된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메일 삭제 시 서버의 온도가 내려가고, 그로 인해 에어컨이 조금 덜 작동되면서 지구의 평균 온도 상승을 막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래된 메일함을 지울 계획을 세웠다.
오랜만에 열어본 수신 메일함 속에는 만 개도 넘는 읽지 않은 메일이 있었다.
그 속엔,
제목부터 광고라고 적혀 있는 메일들,
수많은 기업들로부터 날아온 메일들,
나를 아는 사람인 것처럼 보낸 ‘오랜만’이라는 제목의 스팸 메일들,
그리고 각종 성인 광고들이 뒤섞여 얼룩져 있었다.
통계를 찾아본 건 아니지만, 현대에 들어선 개인적인 내용과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전자메일을 사용하는 비율이 손 편지를 사용하는 비율보다도 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자메일은 손편지의 수고로움과 정성을 이길 도리가 없고 간편히 메시지, 목소리, 영상, 첨부파일에 심지어 실시간으로 얼굴까지 보낼 수 있는 각종 SNS와는 비교하기조차 미안할 정도로 불편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하다가 "아, 맞다."
굿즈 당첨을 위한 구매된 재생된 적 없을 아이돌 CD들에서,
기꺼이 지하철에 올라선 용기 있는 영업사원의 손에 들려진 MP3플레이어에게서 느낀 기시감이었다.
‘빈티지’라고 하기엔 애매하고,
‘아직 쓴다’고 하기엔 보편적이지 않은,
그 지점에 전자메일이 위치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무용한 생각을 멈추고 만여 개가 넘는 스팸 메일들을 지우기 시작한다.
혹시나, 정말 혹여나 있을지도 모를 나를 향한 개인 연락이 같은 봉지에 묶여 폐기될까 조심스럽게 지우기 시작했지만, 어느새 힘들고 귀찮아져선
“... 아마도 없지 않을까? 읽히지 않은 메일들을 한 번에 다 지워버릴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가 그래도 다시금 수행하는 마음으로 보낸 이를 확인하며 메일을 지우기 시작한다.
제목부터 광고라고 적힌 메일들,
단 한 번도 읽지 않은 보험 약관들,
‘뜨거운 밤’을 약속하는 성인 광고들,
나를 성공시켜주겠다는 강연 홍보들,
나에게 꼭 맞는 취업처가 있다는 채용사이트 홍보들,
그리고 줄곧 내 시선을 멈칫하게 만드는 ‘잘 지내냐’는 스팸 메일들.
2025년 6월부터 시작해,
끝없을 것 같던 읽지 않은 메일들 중 혹시라도 당신의 마음이 잘못 사라질까 싶어 조심스레 지우고 또 지웠다.
결론적으로 만여 개가 넘는 읽지 않은 메일들 중,
내게 온 개인적인 메일은 단 하나도 없었다.
오롯이 나에게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온 메일은
처음 메일을 만든 시기인 2000년 11월부터 2003년 12월까지, 약 3년 사이의 내용들이 전부였다.
그렇게 다 지우고 나니 총 15페이지가 남았다.
1페이지에 15개의 메일. 총 10페이지니까, 150개 남짓의 메일들.
나는 가장 오래된 페이지로 이동하여 그 귀하고 아까운 메일들을 하나씩 꺼내어 최대한 조금씩 아껴먹는 초콜릿처럼 읽어본다.
피시방에 왔는데 심심해서 내게 메일을 보낸다는 내용,
당시엔 영원할 것 같았지만 이내 사양되어 버린 유치한 유행어,
디아블로와 포트리스를 하고 싶다면서 접속하라는 내용,
언제 확인할지도 모르는 메일로 컴퓨터가 이상하니 빨리 확인하고 답장해 달라는 내용,
당시 유명했던 원태연의 시와 함께 방학 잘 보내라는 내용,
그리고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메일이 있었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들.
그리운 나의 동무들.
그 당시 나는 너희로 인해 채워지고, 증명되고, 존재할 수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누군가도 내가 그들에게 쓴 메일을 우연히 보게 되어 나를 떠올리진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도 당신의 그 시절을 채우는 한 조각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잠시 가져본다.
아마도 이제 두 번 다시 메일은 오지 않겠지.
어리고 순수했던,
유치하고 찬란했던,
방황하며 우울했던,
그래도 행복했던 나의 유년시절이 모니터 너머로 꽉 닫힌 결말을 가진 영화처럼 영사된다.
그럼에도 나는 영원히 나오지 않을 후속작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