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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더하기 Nov 03. 2022

그 정성 반 만 주면 좋겠네



술이 적당히 취해서 온 남편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베란다에 나가 화분에 심어진 식물들 하나하나에 물을 줬다. 여행을 가기 전 맨 마지막에 하는 것도, 집에 와서 맨 먼저 하는 것도 물 주기다.

"아 저 풀떼기들 볼만한 거 하나 없구먼. 다 내다 버려야지. 그 정성 나한테 반 만 주면 좋겠네."

나는 그 모습이 보기 싫을 때면 이렇게 말을 던졌었다.

"생명이 있는 건데 그렇게 하면 안 되지."

 멋쩍게 웃으며 남편은 말했다.


이 집에 이사 오면서 베란다에 아무것도 놓지 않고 깔끔하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은 이삿짐이 내려오자마자 화원에서 화분 받침대를 사 왔고, 겸사 사온 꽃화분은 먼저 있던 것에 더해졌다. 내가 봤을 때는 이렇다 할 멋진 식물이 있는 것도 아닌 자리만 차지하는 풀떼기들이었다. 정말 마음에 안 드는 장소가 된 것이다.


얼마 전 나는 잘 버티다가 코로나19에 확진이 되었다. 다행히 부부만 살고 있어 남편이 출근하면 거실에 나와 밥을 챙겨 먹고는 했다. 갈비뼈가 아플 정도로 기침을 해댔다. 그것보다 못 견디겠는 건 일주일 격리라는 답답함이었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보다 갈 곳을 못 찾은 눈길이 발코니에 있는 식물들에게 갔다. 마스크 안에서 기침을 해대며 가까이 식물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른 봄날 개발 선인장이 꽃을 보여주고, 목만 쭉 나와 볼품없던 제라늄이 탐스런 꽃송이를 만들어 내기도 했던 기억이다. 결혼선물이라며 남편 직원이 주었던 염좌 나무가 30년 가까이 함께 하며 굳건히 한자리를 차지한 게 보였다.


‘이거 우리 죽이지 말고 잘 키우자.’ 화분을 받아 오던 날 신혼집에서 가장 눈에 잘 보이는 곳을 정해 두었던 기억. 꽃은 없지만 온통 초록의 식물들이 답답한 기분을 다 날려줬다.


 ‘나한테 줄 정성도 식물에게 줘’라고 하고 싶어지는 날. 우리 집 가장 마음에 안 들던 장소가 이제는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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