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도 여행이 되지 않는 날

by 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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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나른한 오후였다. 한 소년이 양옆에 가로수가 늘어선 길을 걷고 있었다. 소년은 지팡이로 의미 없이 땅을 짚으며 걸었다.


그러다 갑자기 멈춰 서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더 이상 앞으로 갈 수가 없을 것 같아. 아직 갈 길은 멀지만, 지금은 그냥 이러고 있어야겠어. 계속 걸어야 마음이 좀 편할 것 같기는 한데, 가끔은 어쩔 수 없는 때도 있는 것 같네. 지금은 더는 가고 싶지 않아.”


소년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평평한 돌을 찾아 앉았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소년의 머리카락을 지나온 길 쪽으로 흩날렸지만, 소년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잠시 후, 소년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하고 싶은 건 그냥 걷는 게 아니라 여행을 하는 건데, 지금은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지금은 그저 걷기만 하고 있잖아. 나에게는 분명 가야 할 곳이 있는데, 이렇게 걷고만 있는 건 좀 한심하게 느껴져.


몇 달 후면 그곳에 도착하긴 하겠지. 그런데 도착하고 나서도 내가 원하는 걸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지금 그 바람을 분명하게 붙잡아 두지 않으면, 기회가 와도 나는 그저 바라기만 할 뿐 이루지는 못할 것 같아.


아직 나에게는 그걸 이루고자 하는 열정이 부족한 게 분명해. 그런데 어떻게 해야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게 가장 큰 문제겠지. 어쨌든 나는 지금 앞으로 걸어나갈 수가 없어.”


태양은 정면에 서 있는 거대한 산맥 너머로 넘어가며 붉은 빛을 남기기 시작했고, 구름은 그 빛을 머금은 채 온 세상에 퍼뜨리고 있었다. 소년의 얼굴도 붉게 물들고, 소년이 걷던 길도 붉게 물들었다. 길은 마치 무엇인가를 말해주려는 듯 붉은 빛으로 잔잔히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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