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코끼리와 늙은 고양이

by 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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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여행

아주 고요한 산골이었다. 바람은 길을 잃고, 물은 말수가 적었다. 구름이 둥둥 떠다니는 작은 호수 곁에서 노란 코끼리 한 마리가 울고 있었다. 눈물은 천천히, 그러나 끝을 모르고 흘렀다. 마치 그 눈물이 코끼리의 몸을 조금씩 비워내는 것처럼.


눈물이 떨어지는 자리마다 물빛이 달라졌다. 그때 코끼리의 눈가에서 자그마한 벌레 한 마리가 기어 나왔다. 벌레는 눈물로 젖은 세계를 처음 보는 것처럼, 촉수를 떨며 잠깐 멈칫했다.


그것을 먹기 위해 늙은 고양이가 덤벼들었다.

늙은 고양이는 머리의 털이 거의 다 빠져 있었다. 남은 털은 성긴 그늘처럼 귓바퀴에만 매달려 있었다. 그런데도 고양이는 크고 무서웠다. 아니, 무서운 것처럼 보였다. 고양이는 코끼리보다 두 배나 컸고, 그 큰 몸집을 자랑이라도 하듯 조용히, 아주 조용히 다가왔다.


코끼리는 코를 휘둘렀다. 늙은 고양이를 밀어내려는 몸짓이었지만 허공만 헛돌았다. 코는 힘이 없었고, 코끼리의 다리는 자꾸만 떨렸다. 병든 몸은 힘없는 위협만 남기고, 결국 무릎을 꿇었다.

코끼리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고양이님, 한 번만 이 벌레를 살려주시면, 제가 당신의 발톱 사이로 들어가겠습니다.”


고양이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생각만 해도 흐뭇한 제안이었다. 발톱 사이로 누군가가 들어간다는 건, 오래전부터 고양이가 꿈꾸던 사치였다. 하지만 고양이는 곧 표정을 숨겼다. 너무 빨리 기뻐하면 약해 보인다는 걸 고양이는 알고 있었다.


“네 생각은 기특하다만,” 고양이가 말했다. “나는 발톱이 다 빠져 너가 머물 곳이 없어.”


코끼리는 고양이의 발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발바닥, 둥글게 닳은 발가락. 그 사이 어디에도 발톱의 그림자는 없었다. 고양이는 강했지만,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니 늘 놓치는 것이 많았을 것이다.

코끼리는 흘리던 눈물을 멈췄다. 마치 그 순간만큼은 울지 않아도 된다는 듯.


그리고 코끼리는 자신의 상아를 고양이 발가락 사이에 끼워 맞추었다.

딱딱한 상아가 부러질 듯한 소리가 났다. 상아 끝이 발가락 사이로 파고들며, 마치 잃어버린 것을 대신하는 의족처럼 자리를 잡았다. 코끼리는 아프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고양이는 순간적으로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발을 내려다보았다.


그 행동이 너무 허신적이어서, 고양이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고양이가 감동한다는 건 드문 일이었고, 그 드문 일이 생기면 세상의 규칙이 아주 조금 바뀌기도 했다.

고양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오늘은 네 소원을 들어주마.”


벌레는 살아남았다. 벌레는 아직도 코끼리의 눈물 냄새를 몸에 묻힌 채로, 세상이 얼마나 큰지 헤아리려는 듯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이렇게 노란 코끼리와 머리가 벗겨진 늙은 고양이, 그리고 벌레의 여행은 시작되었다.


호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구름은 여전히 둥둥 떠다녔다. 다만, 세 존재의 발걸음이 물가의 돌들을 한 번씩 흔들어놓았다. 그 흔들림은 아주 작았지만, 어떤 여행은 원래 그런 방식으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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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빨간 독수리

뜨거운 햇빛이 뇌 속까지 찔러오는 정오였다. 바람은 사라졌고, 공기는 가만히 서서 숨을 쉬었다. 늙은 고양이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노란 코끼리에게 투정을 부렸다.


“네 녀석이 나보다 작았으면, 내가 네 밑으로 들어가 햇빛을 피했을 텐데 말이야.”


코끼리는 잠깐 고개를 들었다. 고양이의 말은 늘 비꼬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외로움이 묻어 있었다. 코끼리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고양이님은 그래도 아름다운 코털이 있지 않습니까.”


늙은 고양이는 코털이라는 말을 싫어해야 맞았지만,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코털이 아름답다는 말은, 누가 해주기 어려운 말이었다. 고양이는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렸다. 그리고 그 큰 몸을 살짝 기울여 코끼리를 자신의 그늘 속에 숨겨주었다.


그때였다.


하늘에서 붉은 단풍잎 같은 것이, 고양이를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뜨거운 공기를 가르며 날아오는 붉은 선. 고양이는 놀랐지만 동시에 신기했다. 저렇게 열정적인 생물이 있다는 것 자체가, 오랫동안 무덤덤했던 고양이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고양이는 오른발을 하늘로 한 번 휘둘렀다.


그것은 공격이라기보다 반사적인 몸짓이었다. 그런데도 붉은 생물체는 마치 그 움직임에 반응이라도 하듯, 고양이 앞에서 공회전을 한 번 하고는 낙엽이 땅에 떨어지듯 가볍게 착지했다.

붉은 날개가 한 번 접혔다가 다시 펼쳐졌다. 큰 부채 같은 날개. 그것은 코끼리의 코 위로 훌쩍 날아올랐고, 그 자리에서 작은 기침을 한 뒤 말했다.


“아이고, 이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눈이 나빠 고양이님이신 줄 모르고 실례를 범했네요.”


붉은 독수리였다.


안타깝게도, 세상에서 가장 눈이 좋았던 독수리는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눈이 좋은 것만이 자랑이었던 생물이, 이제는 눈을 잃는 대신 다른 것들을 더 많이 느끼게 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늙은 고양이가 물었다.


“나는 너를 처음 보는데, 너는 어찌 나를 알고 있느냐?”


붉은 독수리는 기다렸다는 듯 우쭐해졌다. 우쭐함은 아직 시력을 잃지 않았다.


“네. 알고 있습죠. 3년 전, 제게 안경을 선물한 파란 두더지가 고양이님 이야기를 많이 했었습니다.”


늙은 고양이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파란 두더지. 어딘가에서 손톱만 한 동전을 숨기듯 웃던 얼굴. 고양이는 기억해냈다는 듯 발에 박힌 상아로 땅을 한 번 가볍게 쳤다. 딱. 소리가 나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였지만, 독수리는 그 소리에 움찔했다.


“암. 기억하고 있지.” 고양이가 말했다. “그 두더지는 아주 구두쇠였는데, 용케 안경을 받아냈구나?”


붉은 독수리가 날개를 좌우로 휘저었다. 날개 끝이 햇빛을 긁어내며 짧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물론 공짜로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 두더지가 제 시력을 가져가는 대신 안경을 받았습죠. 그런데 얼마 전, 그 안경을 한 호수에 떨어뜨리는 바람에 잃어버렸지 뭡니까.”


시력을 대가로 얻은 안경.

안경을 잃어버린 시력.


늙은 고양이는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잃어버리는 것에는 순서가 있는 법인데, 이 독수리는 순서를 거꾸로 밟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잃어버린 뒤에 얻고, 얻은 뒤에 더 크게 잃는 사람처럼.

그때 조용히 듣기만 하던 노란 코끼리가 다급히 말했다.


“그 안경을 제가 호수 밑 바닥에서 봤었지요. 그런데 그 안경에 알이 빠져 있어 누군가 그냥 버렸나보다 생각하고 말았었죠.”


붉은 독수리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빛은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얼굴에서 나는 것처럼.


“아니 정말인가요? 제게 어느 부근에서 봤는지 말해 주시겠어요? 그 안경이 비록 알은 없어도, 보기에 참 좋아 보인답니다. 제겐 아주 소중한 물건이죠.”


코끼리는 납득이 간다는 표정으로 그 장소를 알려주었다. 호수의 어느 편, 물풀이 조금 더 검은 곳. 돌이 둥글게 모여 있는 곳. 물속으로 들어가면 손끝이 먼저 차가워지는 곳.

붉은 독수리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급히 인사했다.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독수리는 날아올랐다. 하지만 날개는 예전처럼 정확히 하늘을 갈라가지 못했다. 붉은 궤적이 조금 비틀렸고, 잠깐 흔들렸다. 그 흔들림은 시력을 잃어가는 생물만이 가진 작은 진실이었다.


독수리가 멀어지자, 늙은 고양이는 코끼리의 상아를 힐끔 바라보았다. 상아는 여전히 고양이 발가락 사이에 박혀 있었다. 그건 발톱 같기도 하고, 약속 같기도 했다. 누군가에게는 붙잡을 힘이고, 누군가에게는 내어준 뼈였다.


벌레는 코끼리의 눈가에서 내려와 고양이 발등을 천천히 걸었다. 벌레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여행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 하나가 있어서 가능한 것인지도 몰랐다.


늙은 고양이가 중얼거렸다.


“호수 밑에는 별게 다 있구나.”


노란 코끼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조용히, 한 번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아마도 이 여행은 잃어버린 것들을 찾는 여행이 될 것이다.


잃어버린 발톱, 잃어버린 안경, 잃어버린 시력.

그리고 어쩌면, 잃어버린 이유 같은 것까지.

구름은 여전히 둥둥 떠다녔다. 호수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세 존재가 떠난 자리에는 아주 작은 흔들림이 남아 있었다. 마치 물이 자신도 모르게 “좋아”라고 말해버린 것처럼.

여행은 그렇게 계속될 것이다.

누군가의 결핍이 누군가의 길이 되는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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