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생각들.

고통, 공감, 글, 고독.

by 황기영

1.

고통에 대한 공감을 하지 않는 것이 멋있다고 생각하는 부류가 있다. 나름 '현실적'이고 '이성적'이라는 말을 빌미로 취하는 태도다. 하지만 행복에 대한 공감과는 다르게 고통에 대한 공감은 상대적으로 필수적이다. 고통은 생존과 관계있으니까. 거창한 '구원'이라는 단어는 사실 단숨에 정의될 수 없다. 작은 발화점의 행동과, 무량한 시간이 필요하다.


2.

비슷한 결로, 만약 현대에 가장 과대평가된 가치가 있다면 다름 아닌 '지능'이다. 숫자로 표현되는 능력들. 성적과 재산. 가시적인 가치들은 아주 간단하게 층을 만든다. '분류'는 당연하게도 너무 인위적인 행동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복잡하다. 그에 반해 가시적인 기준은 너무 편협하다. 지능은 절대로 지성을 앞설 수 없다. 지능은 무한히 불릴 수 있어도 지성은 그럴 수 없다. 무한한 공급이 가능한 것을 가치가 높다고 말하긴 어렵다.


3.

(위 이야기를 종합해서) 보통 공감이라는 것의 종류를 심리적, 실질적으로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이 역시 이성과 감성의 영역으로 양분하는 경향에서 시작된 듯하나, 실은 그 둘은 구분하기도 어렵고, 그 어려움의 정도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공감은 '지성'의 영역이다. 어떤 사실들은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들이다. 사실을 인식하는 것까지가 지능이라면, 지성은 그 ‘돌아갈 수 없음’을 인정하는 태도이다. 결국 사람은 몰라서, 그리고 알려고 하지 않으려는 게으름 때문에 단순하게 나쁘다. 타인에게 가혹할 수 있는 건, 타인을 몰라서일 뿐이다.


4.

인간을 곧잘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위대한 존재로 그리는 사람들이 있다. 재밌는 점은 그 '무엇이든'이 언제나 위대한 방향으로만 조명된다는 점이다. 인간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환상은, 역설적으로 육체의 필연적인 쇠퇴와 취약성을 간과하게 만든다. 이 오해에 대한 반박은 멀리 갈 것도 없이 '장애'는 후천적(사고/질환 등)으로 인해 가지게 되는 경우가 9할이라는 점이다. '온전함'은 노말이 아니다. 신체는 기본적으로 '소모되는 것'이 노말이다. 단순히 보조장치 등의 개발로 특수한 존재들의 능력을 '겨우 온전해 보이게 만드는 것'에 그친다면, 이건 궁여지책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5.

이기적인 결정을 '합리적'이라고 말하는 데는 이제 지쳤다. 결국엔 그렇게 될 것들에 대해 시기상조라고 말하는 것에도 역시. '그걸 내가 왜?'라고 말하는 걸 듣는 것에도 물론이다. 배려와 공감이 넉넉한 지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그걸 못하는 사람들의 빈 곳간을 긁는 바가지 소리를 참아주기 힘들다. 신이 '수치심'을 만든 이유는 어쩌면 이것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신비함의 영역에 있던 믿음이 필연적으로 인간의 과학으로 환승되면서 인간은 더 이상 부끄럽지 않아도 된다고 다그친다. 하지만, 정작 무엇을 밝혀냈는가? 우리는 우리 이웃의 고통 하나도 쉬이 공감치 못하는데. 우리는 여전히 무지를 부끄러워해야 한다.


6.

글을 쓰는 일은 어느 면에선 비겁한 구석이 있다. 말하기와는 달리 '퇴고'라는 과정을 거칠 수 있다는 점에서, 달변가가 지닌 최전선의 당당함과는 거리가 있다. 말은 어쩌면 가장 날것의 초고다. 그렇기에 실수하는 것에 두려움을 가진 이들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닐까. 잘 다듬어진 글은, 어쩌면 수치심으로 깎아낸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7.

반면에 어떤 점에선 글쓰기라는 '행동'에도 의문이 든다. '말뿐인 사람'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우리 사회에서, '글쓰기'는 발화이자 곧 행동이다. 말 그대로 '쓰는 행위'니까. 다만 말과 행동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함축한다는 건, 한편으론 어느 쪽이라 정의할 수 없는 모호함을 지닌다. 결국 글을 쓴다는 건 말하는 동시에 행동해야 하며, 부족한 실천을 채우기 위해 삶을 글과 일치시켜야 하는 고단한 일이다. 그런 점에선 꽤 담대한 일이라 할 수도 있겠다.


8.

외로움이 무엇인지, 그렇게 많이 겪고서도 여전히 잘 모른다. 그렇기에 이것이 왜 위험하고 무서운 것인지 몰라서 조금은 안다. '외로움'은 타인이 주된 원인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기 자신'에게 너무 많은 에너지가 향해 있는 상태라 느낀다. 그래서 외로운 사람은 그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너무도 강하고 많은 에너지가 내면에 고여 있기 때문이다. 그 일이 지극히 파멸적일지라도, 한번 시작된 행동은 되돌리기 어렵다.


9.

에너지의 방향이 자신을 향한다는 점에서, 결국 외로움에 필요한 건 '사랑받음'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을 나눠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깨달아야 할 사실은 '내 사랑'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타인의 가치가 나에게 절대적이지 않듯, 나에게 소중한 것이 타인에겐 별것 아닐 수도 있다. 특히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더욱 그렇다. 우호적 관계의 본질은, 상대방이 욕망하는 것을 성취하길 함께 욕망해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10.

'후회하지 않기를'

글이 수치심을 정으로 깎아내어 쓴 결과물이고, 그 속에 새겨진 정보가 독자에게 전달되길 바라는 것이라면, 그 진심은 타인이 후회하지 않길 바라는 사려 깊음일 것이다. 하지만 글이 주는 간접 경험은 실제 경험을 향해 무한히 수렴할 뿐이다.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처럼, 결코 가닿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글을 써도, 읽어도 필연적으로 후회한다. 다만 어떤 글을 읽고 나서 후회하기를 바란다. 알고 나서 하는 통한은 본질적으로 무지함과는 다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