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는 사과하지 않는다.
‘나 다운 삶’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누구나 원하지만 또 그리 쉽지만은 않은 그것. 하지만 요즘 저는, 이 말이 지독하게 과장되어 있다고 느낍니다. 으레 모든 ‘낭만적인 것’들이 그렇듯 말입니다.
서른 살을 전후로 하는 율리에의 이야기는, 솔직히 저에겐 무척이나 버거운 텍스트였습니다. ‘자아 찾기’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본인의 혐오와 타인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한다고 할까요. 영화의 국내 개봉명은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라며 ’누구나’라는 단어를 끼워 넣어 이를 범속한 청춘의 방황으로 표현하지만, 원제는 <The Worst Person in the World> 임을 상기해 봅니다.
세계 최악의 인간. 율리에가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일까요? 그럴지도요. 적어도 율리에가 휩쓸고 지나간 세계 안에서는 말입니다. 어떤 것이 그렇게 나쁘냐고요. 단적으로 말하자면, 해방과 자아실현의 ’과잉‘은 어떻게 개인의 ’나르시시즘‘을 정당화시키는가. 영화를 보는 동안 떠오른 생각이였어요.
영화는 얄팍한 ‘포스트 페미니즘’이나 지적 허영을 자극하는 화두들을 영리하게, 혹은 몹시 불쾌하게 배치하며 이 과잉된 자아실현의 실상을 보입니다. 기후 위기에 과몰입해 스스로의 일상마저 옥죄는 수니바의 과시적인 환경주의, 그리고 라디오 방송에서 악셀을 공격하며 오직 ‘단어’에만 집착하는 페미니스트 패널의 모습은 세상을 향한 감독의 모호하고 조소 섞인 스탠스를 드러나죠.
무엇보다 율리에 본인이 충동적으로 '오럴 섹스와 페미니즘'에 관한 에세이를 쓰고 주체성을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영화 내내 다른 여성과 의미 있는 연대를 나누거나 대화하는 장면이 전무하다는 점은 몹시 기만적으로 느껴집니다. 오히려 그녀는 초반부 악셀의 친구들을 만난 대목에서 ‘엄마’라는 정체성을 가진 여성들을 노골적으로 불쾌해하죠. 율리에는 말만 페미니스트일 뿐, 그 기저에 깔린 행동 양식은 혐오의 그림자가 만연하고, 그럴듯한 이데올로기를 주장하지만 이는 자신의 공허함을 치장하는 사용하는 블랙 코미디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모순은 그녀가 좇는 ‘진짜 나’를 찾는 과정, 즉 관계의 양상에서 더욱 적나라한 착취로 드러납니다. 흔히 '자유로운 성해방'으로 포장되는 서사들 역시 의심스럽습니다. 언제부터 주체적인 성해방의 연출 형태가 '바람'이나 '무분별한 충동'이 된 것일까요? 에이빈드와의 첫 만남에서 타인의 체취를 맡고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나들며 “이건 바람이 아니야”라고 합리화하는 장면은 꽤나 매혹적으로 연출되지만, 실상 그것은 자신의 충동을 자유로 포장하는 이기심의 발로일 뿐입니다. 이런 식의 연출은 오히려 여성의 섹스가 모종의 낭만적 환상으로 가득 차 있다는 얄팍한 인상만 남깁니다. ‘사랑과 존중이 없는’ 섹스는 그저 섹스일 뿐입니다. 섹스를 통해 자아를 찾는다는 명분은, 결국 그 과정에 동원된 대상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하는 자기 위안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아 찾기를 위해 끊임없이 '관계'를 맺지만, 율리에는 사실 스스로 말고는 아무도 사랑한 적이 없다고 느낍니다. 그녀에게 모든 타인은 자신의 특정 시기를 채워주거나, 낡은 자아를 버리고 새 출발을 하기 위한 환승역이자 부속품처럼 소비된다는 걸 보고 있는 건 힘든 일이었습니다. 극 중 은밀하게 심어놓은 '대디 이슈(부재한 아버지)'로 그녀의 결핍에 알량한 면죄부를 주려 하지만, 환각 버섯을 먹고 인사불성에 빠지는 씬에선 아연이 실색할 정도였어요. 생리와 생리혈에 대한 맹목적인 환상이 만들어낸 이 장면은, 철저히 '남성 감독'이어야만 상상 가능한 여성성의 불쾌한 전유일 뿐이다라고 느낀 건 조금 오버한 리액션이었을까요.
이 나르시시즘이 가장 잔인해지는 순간은, 임신이라는 통제 불가능한 변수 앞에서 죽어가는 옛 연인 악셀을 찾아가는 대목입니다. 타인의 죽음과 쇠락마저도, 자신을 비난하지 않을 안전한 도피처이자 감정적 면죄부로 사용하려는 서늘한 계산이 느껴졌거든요. 그리고 샤워실에서 유산을 직감한 뒤 지어 보이던 그 희미하고도 홀가분한 미소는 타인과 얽혀야만 하는 책임이라는 무거운 닻이 떨어져 나갔을 때, 그녀가 느낀 것은 상실이 아니라 일종의 해방감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영화의 초반부, 전공을 선택하는 과정에서부터 보이는 ‘무한한 선택지가 주어졌다’는 감각과 ‘무엇이든 가능하다’라는 태도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를 어떤 것에도 깊게 뿌리내리지 못하고 끝없이 도망치게 만듭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게르트루드>를 떠올렸어요. 타협 없는 이상주의로 남성들의 세계를 거부하고 기꺼이 고독을 택했던 게르트루드의 모습이 율리에와 겹쳐 보였기 때문에요. 하지만 이 둘은 결정적인 부분에서 상이 어긋나게 됩니다. 게르트루드의 고독이 스스로 감내해야 할 묵직한 형벌이자 꼿꼿한 자존심이었다면, 율리에의 고독은 너무나도 가볍게, 상처 하나 없이 부유하며, 게걸스럽게 환경을 먹어치웁니다.
이 모든 착취의 끝에서 율리에가 스틸 사진작가가 되는 결말은 어쩌면 너무나 논리적이고 당연한 수순입니다. 본디 촬영이란 '착취'의 대명사 인걸요. 영단어 'Shoot'이 총을 쏘고 사냥하는 행위를 뜻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의심의 여지가 없죠. 타인의 세계를 렌즈 너머로 포획하고 일방적으로 소비하는 일. 그녀는 마침내 길을 찾은 주체적인 여성이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장 잘하는 짓을 직업으로 삼으며 타인과 얽히고 책임져야 하는 삶의 프레임 밖으로 철저히 도피한 건 아닐까 싶습니다. 더 이상 타인을 정당하게 털어먹으면서, 자신이 온전히 짊어질 책임도 없는 완벽하고 안전한 포식자의 자리.
타인의 세계를 착취한 끝에 얻어낸 이 안전한 고독을 과연 성장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결론적으로 이 영화를 지켜보는 내내 저는 불쾌했습니다. 단지 주인공이 여성이고 이것이 '여성 서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삶에 난입해 놓고 결코 삶의 무게는 나누어 짊어지지 않으려 하는 이 나르시시스트를 어여쁘게 옹호할 수 있을까. 저는 아직 성인이 아니라서 어려울 듯합니다.
끝없는 나르시시즘의 전시, 그리고 감독이 남성의 시선으로 여성성을 입맛대로 전유하는 방식을 지켜보며 감정은 한없이 복잡해졌습니다. 제목을 <세계 최악의 인간>으로 지은 것 마저, 결점을 인정함으로써 상대방의 비판을 미리 가로채는 태도 같아, 영리하다고 할지 영악하다고 해야 할지 모호한 기분입니다.
저에게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여러모로 최악의 영화였습니다. 제목에 한 단어만 들어갔어도 이 평가는 재밌게도 이 영화가 얼마나 완벽한지에 대한 설명이 됐을 텐데 싶기도 하고요. 어떤 단어냐고요? 아마 <‘자신만을’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아닐까 싶네요.
Ps. <델마>와 <센티멘탈 밸류>를 꽤 좋게 봤었는데, 이 영화에서 느낀 ’남성감독의 여성성의 전유‘라는 의심이 들고나선 두 영화에 대한 평가도 조금 흔들립니다. 세 영화 모두 누군가의 완성을 위해 ’누군가가 희생‘되는 서사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이요.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번 봐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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