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넷>

정확한 위로.

by 황기영

사랑은 저주라는 생각을 곧잘 하곤 합니다. 모든 것이 그저 운에 의해 존재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이 부조리한 세상에 어떤 운명이나 질서가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기 때문에 말이에요. 그래서 <햄넷>의 아이들이 부르던 노랫말인 ‘아름다운 것이 곧 추한 것’이라는 말에는 뼈가 있죠. 세상을 구원할 듯한 사랑이 세상을 불태울 저주로 돌변하는 것은, 부조리한 사건 하나를 사이에 둔 동전의 앞면과 뒷면 같으니까요.


영화 <햄넷>은 셰익스피어와 아녜스 사이에서 태어난 ‘햄넷’의 죽음과 그로 인한 ‘햄릿’의 완성을 다루는 팩션입니다. 죽음을 키워드로 하듯, 이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상실에 관한 이야기예요. 돌아보는 자와 뒤처지는 자가 존재하는 비극적인 오르페우스의 서사를 언급하는 이유는 이 이야기 역시 돌아보는 자와 구원해야 하는 자가 필요한 서사임을 직감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익숙한 궤도를 따라가면서도 적절한 변주를 통해 신선함을 부여합니다.


마치 저승의 구덩이 같은 칠흑 같은 구멍 옆에 한 여자가 누워있습니다. 작중 신비함을 지닌 아녜스는 죽음과 자연을 가장 깊게 이해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자신의 기원이 숲에 있다는 것을 알고, 어머니의 죽음을 겪었으며, 매의 죽음 앞에서도 자연의 섭리를 수용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점에서 그렇죠. 신비한 힘이 우리를 감싸고, 죽음은 언제나 우리의 곁에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녀가 보는 미래는 언제나 정확했습니다. 두 아이가 자신의 임종을 지킬 것이라는 것도, 남편의 미래가 위대할 것도, 또 한편으론 ‘보이지 않게’ (마치 유령처럼) 될 것이라는 것도요. 그렇기에 그녀에게 제시된 아이의 죽음이라는 진실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도 피하지 못합니다. 본인이 예지한 미래를 통해 슬픔의 존재를 알고 있었음에도, 그 결과가 자신의 예상 궤도를 처참히 벗어나버린 햄넷의 죽음은 그녀에게 너무나 거대한 무력감을 부여합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 오르페우스의 역할을 자처하는 것은 그가 되고자 바란 아녜스가 아닌 바로 윌리엄입니다. 자기 자신이 유령이 되어 ‘어디 있는지 모르겠는’ 햄넷을 찾아 무대 위로 불러냅니다. 햄넷은 그토록 바랐던 영광과 의협의 검무를 추고, 충분할 만큼의 마지막 인사를 건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 속에서 돌아보는 역할은 오르페우스가 아닙니다. 되레 먼저 떠난 에우리디케, 즉 햄넷이 이 역할을 가져갑니다.


돌아본다는 행위는 사실 먼저 나아가고 있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떠올립니다. 죽음이 생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는 진리를 아녜스는 쉬이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생의 과정에서 필연적이고, 햄넷은 그저 먼저 그 길을 나아갔다고 생각하면,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햄넷만이 가능한 일이라는 걸 깨닫습니다. 오르페우스 신화의 ‘뒤돌아보지 말라’는 가르침은 여기서 다시 쓰입니다. 상실을 겪은 이는 사실 돌아볼 수 없고, 그저 살아있는 자들의 위로를 죽은 이가 돌아볼 때 그를 놓아줄 수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아녜스가 바라본 윌리엄의 ‘위대한 것’은 물론 그가 ’햄릿‘이라는 위대한 희곡을 써냄에도 의미가 가닿아 있습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영화는 ’햄릿‘의 위대함을 아녜스에게 가닿은 ’정확한 위로‘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 듯 보입니다. 죽음을 거스르는 불가능해 보였던 재회, 그리고 그로 인한 슬픔의 위안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그저 ‘좋은 이야기’에 머무르는 것은 아쉽습니다. 서두에서 말했듯 상실이란 폭력적인 우연이자 모순투성이인데, 영화는 그 복잡함을 ‘완벽하게 짜맞춰진’ 인과율과 ‘이해하기 쉬운 연기’로 포장해 버립니다.


아녜스의 모든 예언은 이루어지고, 죽음 직후 뒤돌아본 햄넷은 곧장 무대로 이동하며, 가족을 지키라는 윌리엄의 말은 햄넷의 희생을 부릅니다. 모든 상호작용이 톱니바퀴처럼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갑니다. 아이들이 쉬이 죽는 배경을 깔고 사망의 원인이 된 역병을 미리 보여줍니다. 친절하게도 아녜스는 햄릿을 보고 ‘아버지와 아들의 위치를 바꿨다’며 설명을 해줍니다. 결코 예술이나 논리로 갈무리될 수 없는 아녜스의 거대하고 원초적인 슬픔은 이토록 정돈된 서사 속에서 조금은 납작해집니다.


관객은 햄릿을 통해 제4의 벽을 넘어 아녜스와 관객이 배우를 향해 손을 뻗는 마법 같은 순간을 목격하지만, 정작 <햄넷>이라는 영화 자체가 우리에게 건네는 것은 생의 날것 그대로의 부조리가 아닌, 잘 다듬어지고 이해하기 쉬운 감동뿐이라는 점이 짙은 아이러니를 남깁니다. 햄릿을 본 관객처럼 햄넷의 관객은 작품에 개입할 공간이 영화 속엔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너무 매끄럽게 다듬어진 이야기는 관객들에게 어떤 흔적을 남기지 못합니다.


결론적으로 이런 아쉬움을 뒤로한다면 여전히 이 이야기는 너무도 아름답고 좋은 이야기입니다. 제시 버클리와 폴 메스칼의 상실의 연기는 그 이야기에 훌륭한 개연성을 부여합니다. 영화가 존재치 않더라도 둘의 연기는 그 자체로도 빛날 열연입니다.


클로이 자오는 <노매드랜드>로 일약 거장 감독 반열에 올랐으나 ‘고평가되었다‘는 오해를 줄곧 달고 있었다고 느끼는데, 아마 이 영화를 통해 조금은 그것을 해소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