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C연구회를 다시 만나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사람들이 돌아왔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내게 온 게 아니라 내가 그들을 찾아낸 거다. 부산에서 대학에 있을 때, 한 달에 한 번씩 어김없이 만나던 사람들이다. ‘IMC연구회’라는 이름의 모임이었고, 주로 마케팅과 광고, 홍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공부한다는 명분의 스터디 그룹이었다. 하지만 실은, 공부보다 함께 놀고 수다 떠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았던 모임이다.
주제 발표와 토론을 하긴 했지만, 때로는 발표자보다 더 열정적인 질문자가 있었고, 관심사도 분야를 넘나들었다. 밤샘 1박 2일 모임도 잦았다. 캠핑장, 바닷가, 리조트, 개인 별장... 장소 불문이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부산 해운대 근처 송정 바닷가, 일철 교수의 집이다. 2층 서재에서 진행된 발표 주제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열기는 선명하게 남아 있다.
발표가 끝나면 송정 바닷가 모래사장에 둘러앉아 이야기하고 노래하고 게임을 하며, 회에 술을 곁들이기도 했다. 처음 본 사람들과도 금세 오래된 친구처럼 친해졌고, 마음을 열고 속 깊은 얘기를 나누곤 했다.
지금은 배우로 활동 중인 걸침 선배의 기행과 열정도 잊을 수 없다. 대금을 불고, 국악 한 자락을 뽑고, 즉흥으로 서예 퍼포먼스를 하던 그 모습은 여전히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그 예술적 기예들은 십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 모임이 20년 넘게 지속될 수 있었던 건, 창립자이자 좌장인 청야(聽野)교수의 헌신 덕분이고, 동시에 총무 역할을 맡았던 원심(原心) 의 묵묵한 뒷받침 덕분이다. '단무원심'이라는 별칭처럼, 단순하고 무심한 듯 보여도 그의 헌신은 깊고도 꾸준했다.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한 번도 빠짐없이 모임을 기획하고, 진행하고,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조용한 성격이지만 특유의 사교성으로 멤버들을 늘리고 분위기를 살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 PR산업을 이끄는 KPR 대표 신회장님도 이 모임의 든든한 중심이었다. 장소 제공은 물론, 식사와 뒷풀이 비용까지 감당하며 모임의 물심양면 후원자였다. 당시 KPR 사옥이 동국대 근처 장충동에 있어, 뒷풀이는 늘 장충동 족발집이었다. 지금은 충무로 남산스퀘어 빌딩의 첨단 오피스에서 세미나를 한다. 식당 문 닫을 때까지 이어지는 술자리, 택시 귀가는 일상이었다.
그러나 이런 세월, 이런 사람들을 나는 거의 십여 년간 잊고 지냈다. 대학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하고, 부산 생활도 마무리하면서 나도 자연스럽게 그 모임과 멀어졌다.
거의 끊다시피 했던 SNS를 다시 열면서 새로운 세상이 눈에 들어왔다. 제법 열심히 하다가 어느 순간 소셜미디어 자체가 피로해져 접어버렸던 페이스북. 그런데 다시 들어가 보니, 세상은 여전히 거기 있었고, 그 안에 그들도 있었다.
부산에서 대학에 재직 중이던 시절, 한 달에 한 번씩 어김없이 만나던 사람들. 그 이름도 근사한 ‘IMC연구회’. 마케팅, 광고, 홍보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스터디 그룹이었지만, 실상은 잘 노는 사람들이 더 많았던 모임이었다.
회식은 언제나 열띤 세미나보다 강렬했고, 발표는 언제나 누군가의 노래나 기타 연주로 끝났다. 해운대, 광안리, 미포, 청사포, 장충동 족발집 같은 장소들이 우리 모임의 고정 레퍼토리였고, 그중 가장 인상 깊은 곳은 일철 교수의 송정 바닷가 별장 같은 집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토론을 하고, 때로는 밤을 새우며 인생을 이야기했다. 1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때의 풍경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억나는 건 사람들이다.
말 그대로 ‘모임의 영혼’ 같았던 청야 교수, 특유의 위트와 마당발 기질로 언제나 분위기를 띄우던 원심 총무, PR과 브랜드, 마케팅의 경계에서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꺼내던 신회장님, 무한예능 열정으로 뒷풀이 장소를 무대로 바꾸던 소락(素樂)샘, 광고인에서 교수, 작가와 서예가에서 배우로, 다중 캐릭터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인생의 온갖 장르를 걸치고 있는 걸침 선사. 각자 바쁜 생을 살아가느라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지만, 알고 보니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 다시 페이스북을 시작하면서, 그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신기했다. 내가 잊고 있었던 시간 동안에도 그들은 여전히 매달 모임을 이어가고 있었던 거다. 발표하고, 토론하고, 뒤풀이까지. 십 년도 꾸준히 못 하는 내 변덕스러운 습성으로는 상상도 못할 인연과 끈질긴 우정이었다.
나는 최근 ‘백수작가의 習作記’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했다. 원심의 주선으로 다시 만난 자리에서, 올해 첫 발표는 내가 맡았다. 브런치스토리에 올린 글들을 소개하고, 은퇴한 교수로서 작가로 살아가는 삶을 조심스레 보고했다.
오랜만의 발표는 긴장과 설렘이 뒤섞인 시간이 되었다. 발표를 마치고 나니, 예전처럼 질문과 농담, 생각의 꼬리를 잡는 대화들이 이어졌다. 예나 지금이나 그 분위기는 참 좋았다. 뒷풀이는, 이생진 시인의 시 <그리운 성산포>가 벽에 걸려 있는 주점에서. 오랜만에 새벽까지 이어진 통음이었다.
소락의 자유분방한 삶도 여전했다. '글자따라 생각따라' 170회, '산따라 쓰(레기)따라' 140회, '노래따라 느낌따라' 160회까지. 유튜브 영상도 부지런히 올리고 있다. ‘딴따라’ 인생이란 타이틀이 그의 삶을 가장 잘 표현해 준다. ‘素樂’이라는 호를 쓰는, 종합예능인에 가까운 기인의 삶을 살고 있다. 얼마 전엔 ‘박교수의 21년’이라는 제목으로 발제를 하기도 했다. 부제는 '人空痴能'. 기획창의학, 한자사고학, 인문생태학을 아우르는 시간의 총정리였다.
청야 선생은 요즘 AI 전도사를 자처하며, 학문과 인성, 영성에 인공지능을 어떻게 접목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걸침 선배는 수필문학 신인상을 받았다. 그 소식은 나에게 큰 자극이 되었고, 브런치북이라는 플랫폼을 알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이후 틈틈이 쓴 글들이 어느덧 두 권의 책 분량이 되었다. 하나는 출간된 칼럼북 『광고에 말 걸기』, 또 하나는 출판 준비 중인 창작산문집 『참견과 오지랖』이다.
AI를 주제로 발표한 사람들도 있었다. AI의 창조력, 사업 기회, 글쓰기와의 접목 같은 흥미로운 주제들이었다.
광고회사, PR회사, 언론사, 공공기관, 기업의 홍보팀, 프리랜서 작가, 예술가, 배우… 모인 사람들의 이력도, 성격도 다 달랐다. 하지만 매달 누군가의 발표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토론의 열기는 언제나 뜨겁다. 발제자는 늘 긴장했고, 듣는 이들은 질문에 질문을 얹었다. 누구도 단순한 청중이 아니었다.
다양한 배경에서 온 사람들이었지만, 우리 사이엔 어떤 ‘기본값’ 같은 게 있다. 서로를 존중하고, 잘난 척을 경계하고, 타인의 말을 끝까지 듣는 자세. 그게 이 모임의 공기일지 모른다.
5월 세미나는 남양주 수동의 별장에서 열렸다. 연극 공연, 창, 춤, 시 낭송까지. 취중 토크, 요리, 기타 연주와 싱얼롱. 김영신 명창의 진도아리랑과 남원산성 완창까지 직접 보는 호사도 누렸다. '목마와 숙녀' '생명의 서'를 읊조리며 보낸 초여름 하루는 그야말로 통조림처럼 꽉 찬 시간이었다.
聽野 거사의 정원에서 <마지막 연습> 이라는 연극을 공연하기도 했다. 걸침 선사가 AI의 도움을 받아 쓴 대본을 그가 연출하고 5명의 완전 아마추어 배우들이 연기했다. 두 시간 정도 대본 리딩. 연습, 리허설을 거쳐 합을 맞춰본 내 생애 첫 연극무대였다. 슈가 샘의 매소드 연기는 뜻밖의 발견이었다. 진지한 감정이입과 강렬한 눈빛, 나긋나긋한 음성연기가 일품이었다. 예정에 없이 강원도에서 나타나 배역을 받지 못했던 캔디 샘은 탁월한 내레이터이고 스토리텔러였다. 지금도 릴스 영상을 뚫고 나오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는 압도적 카리스마다.
"난 평생 조명만 올렸어. 무대는 늘 남이었지. 내가 이제 무대에 서고 싶더라고. 죽기 전에 말이야."
자기 한탄 조의 처량한 독백에 내 나름 혼신을 대해 읊조렸다. 연기는 고스란히 동영상에 담겨서 페이스북에도 올라와서 돌아다닌다. 낯 뜨겁고 오글거리지만 뭐 어때?
그래 나도 배우가 되고 싶다. 이제부터라도 내 진짜 인생을 연기하는...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무대에 서고 싶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연습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작가라는 이름을 걸고 내가 쓰고 있는 한 줄 한 줄은 마지막 연습이고 習作일 것이다.
연극 <마지막 연습> 릴스 영상
극 <마지막
걸침 선사는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다.
"내 연극을 본 친구들이 자기도 해보고 싶다 했다. 다음 모임에서 해보자고 했다. 문제는 희곡대본. AI에게 부탁했다. 몇 차례 달래며 30분짜리 대본을 받았다. 하루 전에 대본을 보내주고, 연습하고, 비닐하우스를 무대로 막이 올랐다. 초보치곤 제법이었다. 신선한 콜라보였다."
또 이런 글도 있었다.
"AI로 시를 써봤다. 제목은 '카카오톡'. 모임에서 낭독했는데 다들 괜찮다고 했다. 나중에 AI가 썼다고 밝히니 깜짝 놀라더라. 글에도 승률이 표시되는 세상이 오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이런 글.
"아무 생각 없이 시골 가서 밭일을 했다. 땀 흘린 뒤 마시는 한 잔의 달콤함. AI도 잊고, 다시 시골 아이가 되어 얻는 맛."
"오디션을 봤다. 두 페이지 대사를 외우고 중국어 연기까지 했다. 경쟁의 세계. 배가 고파, 시골서 따온 두릅으로 허기를 달랬다. AI 달래듯이."
"오랜만에 연극무대에 섰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인기 끌었던 작품이 이해랑 극장으로. 특별출연, 단역. 6년 전, 주연으로 1시간 반 동안 330마디 대사를 외웠던 그 무대에서."
걸침선사가 출연한 조선협객에 대한 이야기다. 그가 출연한 영화 중엔 히트한 작품도 꽤 있다. 내가 직접 본 작품으로 <빌런의 나라>, <선산>, <하얼빈>에도 걸침의 연기장면이 나온다. 팔순의 노인으로, 이장으로, 일본제국 대신으로 말이다.
배우 화가 서예가 수필가 소리꾼 여행가 등 15개의 세계를 매일 다르게 저글링 한다. 통섭과 융합, 네트워크의 시대를 걸치며 살아가는 팔방미인, 만년신인이다.
시간이 흘렀다. 누군가는 서울로, 누군가는 남해로, 누군가는 업종을 바꾸고 또 누군가는 긴 침묵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의 IMC연구회는 예전과 다르면서도 비슷하다. 회비도, 규칙도, 리더도 없다. 그냥 매달 한 사람이 발표를 맡고, 발표 이후엔 함께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발표 주제는 광고나 마케팅일 수도 있고, SNS와 삶의 거리일 수도 있고, AI를 활용한 글쓰기나 예술콘텐츠 창작일 수도 있다.
구성원들도 다양해졌다. 여전히 현역에서 활동 중인 이들도 있고, 이제는 백수가 된 이들도 있다. 어떤 이는 작가로 전업했고, 어떤 이는 아예 예술 활동에 뛰어들었다. 다르지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이다.
모임은 여전히 공부 중이다. 그리고 나도 그렇다.
배울 게 많다는 건, 여전히 젊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걸 함께 할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건, 어쩌면 가장 귀한 축복이다.
<창작 노트>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잊고 지냈던 사람들과의 인연을 다시 만난 기쁨과 감동으로 풀어낸 회고록이다. 정년 후에 되살아난 옛 추억과 그 안에서 다시 쓰기 시작한 삶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기를 바랐다. 그들의 여전한 열정과 변화 속에서도 꿋꿋이 이어지는 삶의 결이 느껴졌으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이 모든 이야기들 사이로 흐르는 건, 결국 ‘끈질긴 인연’과 ‘지속되는 삶의 태도’다. 예전과는 다른 자리, 다른 역할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함께 배우고, 실험하고, 나누고 있다. 지금 이 순간도 그 오래된 인연들의 힘을 빌려, 나는 여전히 무언가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