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써본 용인ㆍ일본 골프투어 예상기
예술의 전당 인근의 분위기 좋은 중식당 '선궁(仙宮)'. 이름 그대로 우리는 신선놀음에 스며들었다.
친구 넷이서 원탁에 앉았다. ICT 기업 남 회장의 단골 일식집 '최수사'가 문을 닫아서 이번엔 'KH바텍' 옆 빌딩에 위치한 중식당의 코스요리다.
하지만 그날, 테이블 위에 올려진 술은 '마오타이'도 '공부가주'도 아닌 사케였다. 중국집에서 생뚱맞게도 일본 술이라니. 물론, 주인장의 양해는 구했다. 두 병의 술은 마치 무대 조명을 받은 주인공처럼 빛나고 있었다. 라벨엔 우아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구보타 준마이 다이긴죠
久保田 純米大吟醸”
술을 사 온 친구는 대학 시절 동아리 활동을 함께했던 45년 지기 윤 대표였다. 며칠 전 다녀온 일본 출장길에서 마음먹고 챙겨 왔단다.
“이거, 같이 마셔야 의미가 있지 않겠냐”며 꺼내놓은 술병 앞에서 우리는 심쿵하면서도 묘하게 숙연해졌다. 마치 오래된 서랍 속에서 꺼낸 옛 사진을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일본에서 일부러 공수해 온 ‘구보타 준마이’와 ‘구보타 준마이 다이긴죠’. 니가타현 아사히 주조에서 만든 사케인데, 그중에서도 ‘준마이 다이긴죠’는 탁월한 향과 품격으로 유명하다. 말 그대로 정미율 50% 이하의 최고 등급 사케. 쌀알 속 가장 순결한 중심만 남기고 도정한 그 집요함, 그리고 발효와 숙성의 정성. 한 잔에 응축된 일본 양조장의 고집과 전통이, 이상하게도 우리의 오래된 우정과 겹쳐 보였다. 함께한 세월이 쌀껍질처럼 켜켜이 벗겨지고, 서로를 알아가는 정수가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뚜껑을 열자 은은한 향기가 먼저 퍼졌다. 한 모금 입에 머금는 순간, 살짝 맴도는 향과 함께 은은하고도 섬세한 감촉이 혀끝을 감싸며 스르르 목으로 사라진다. 쌀에서 온 향, 하지만 쌀의 질감을 넘어선 과일 같은 여운. 첫 모금을 넘기는 순간, 누구랄 것도 없이 다들 눈을 감았다. 어느 술의 목 넘김이 이토록 부드러웠던가. 알코올 도수는 15도를 넘었지만, 그 수치는 현실감을 잃었다. 그저 시간이 녹아든 물 같았다. 마치 향기 자체가 시간을 잊게 하는 듯했다.
우리는 코스요리 사이사이에 그 술을 조금씩 나눠 마시며, 한 입 한 입마다 오래된 기억과 웃음을 끌어냈다.
“야, 이 술은 말이야, 한 병이 아니라 대화 한 편이야.”
누군가 농을 던지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어느새 두 병의 구보타는 거의 비워지고, 마음은 훨씬 더 가벼워졌다.
그렇게 대화는 술에서 골프로, 요리에서 여행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우리는 작은 도원결의를 했다.
“우리 이 술, 일본 가서 다시 마시자. 니가타 현지에서!”
효고현 치구사에 골프장 회원권이 있는 친구 김샘이 깃발을 올린다.
“그럼 내가 코스 예약할게!” 하고 나섰고, “그전에 우리 미리 몸 좀 풀어야지!”라는 말이 이어졌다. 회장 친구는 자신이 회원으로 있는 발리오스 CC 라운딩을 제안했다. 그리고 일사천리로 6월 국내 라운딩, 9월 일본 라운딩 약속이 잡혔다.
말이 씨가 되어 며칠 뒤, 우리는 용인의 발리오스 CC에서 골프 라운딩을 함께 했다.
무려 40년 전,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젊은 날의 동아리 찐친 들이 이제는 잔디 위를 느긋하게 걸었다. 따끈한 햇살 아래에서 티샷을 날리고, 페어웨이를 함께 걸으며 웃고 떠드는 시간. 삐끗한 샷에도, 벙커에 빠진 공에도 서로의 장난기 어린 위로가 더해지며 우리는 순식간에 스무 살 때의 얼굴로 돌아갔다.
발리오스 cc는 명성처럼 고급졌다. 코스는 우아하고 부드러웠다. 그린은 구보타보다 더 깊고, 구보타처럼 투명했다. 친구들과 함께 걷는 골프장은 스코어보다 리듬이 중요하고, 비거리보다 농담이 멀리 날아다녔다
“너 스윙할 때는 진지한데 왜 볼은 항상 벗어나냐?”
“내 인생도 벗어나 있는 거 알지?”
이런 말장난들이 공처럼 굴러다녔다.
퍼팅을 놓치면 "아까비!" 하면서 같이 탄식했고, 드라이버가 삐뚤어지면 낄낄대며 놀리기도 했다.
경쟁보단 동행, 실력보단 시간. 그저 “우리가 여전히 여기에 함께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그날의 라운딩은 몸을 푸는 시간이자, 곧 다가올 일본 여행의 프롤로그 같았다. 해가 저물 무렵, 우리는 클럽하우스에서 차를 마시며 다시 한번 도원결의를 재확인했다.
“그래, 이건 그냥 여행이 아니라 의식이야.”
“우리 우정에 대한 경의지.”
나는 그날의 저녁을 ‘여름밤의 꿀’이라 기억한다. 맛있는 요리와 향기로운 술, 그 위에 얹은 감미로운 추억담. 이 모든 것이 따뜻하게 섞이며 하루라는 시간을 달콤하게 감쌌다. 누구 하나 앞서려 하지 않고, 누구 하나 중심에 서려 하지 않는 균형 잡힌 마음들. 그게 아마 우리가 40년 넘도록 함께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지금도 나는 생각한다. 구보타의 향이 남긴 건 단지 술의 여운이 아니라, 한 시대를 함께 지나온 우정의 깊이였다고.
우리가 함께했던 동아리는 '흥사단 대학생 아카데미’였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정신을 기리며 됨됨이, 공동체, 진정성에 대해 고민하던 시절. 봉사활동과 토론, 집회와 수련회, 그 모든 게 순수한 열정과 인격 수양이라는 단어로 덧칠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맺어진 인연은 졸업 후에도 이어졌고, 결혼과 육아, 사업과 은퇴의 굴곡을 지나 이제는 ‘가끔 만나 한 잔 기울이는’ 평온한 이름으로 남아 있었다.
그 평온한 이름 위에, 구보타 준마이 다이긴죠의 향이 얹히자 술자리는 갑자기 특별해졌다. 샥스핀, 샤오롱바오, 유산슬, 오향장육, 불도장, 그리고 후식으로 나온 리치까지. 모든 맛이 술과 함께 기억 속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말했다.
“이야, 이렇게 마실 줄 알았으면... 예전에 서울도심 투어 갈 때도 한 병 가져갈 걸 그랬다.”
“그땐 생맥주만 마셔서 분위기 못 냈지.”
“그러니까 다음은 일본이야. 효고현에서 다시 한번!”
우리는 다시 청춘이 되었다. 다이긴죠 향기 속에 지난 세월이 녹아들었고 예전처럼 장난도 치고, 놀리기도 하며 한여름 밤의 짧은 여행을 다녀온 듯한 기분으로 헤어졌다.
45년 지기의 우정이 다이긴죠 한 잔에, 그렇게 다시 피어났다. 다음 목적지는 효고현. 하지만 진짜 목적지는, 아마 지금도 우리 마음속 어딘가, 함께 웃고 있는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치구사cc 라운딩 예상기
그날 중국집에서 도원결의처럼 말했던 일본 여행. 그냥 술김에 꺼낸 말이었지만, 우리 넷은 웬일로 그 약속을 진짜 지켰다.
"이번엔 진짜 가자!"
"숙소는? 골프장은? 술은 또 구보타지?"
"당연하지. 이번엔 본거지에서 마신다!"
우리를 초대한 건 효고현에 치구사 골프장 회원권을 가진 김샘이었다. 그녀는 벌써 한 달 전부터 골프장 예약, 숙소, 렌터카까지 싹 다 준비해 놨다.
"너희는 그냥 몸만 와."
그 말이 이 나이에 왜 그렇게 믿음직스럽던지.
드디어 일본, 효고현. 치구사 골프장은 상상보다 훨씬 더 푸르렀다. 능선을 따라 흐르는 바람, 연둣빛으로 흔들리는 잔디, 그리고 잔디보다 더 푸르른 하늘 아래, 네 명의 구보타 전사들이 클럽을 들었다.
푸른 잔디와 정제된 조경이 어우러진 프라이빗 골프장에서의 라운딩. 모든 것이 정확하고 조용했다. 페어웨이는 부드럽고, 벙커마저도 결이 살아 있었다.
“여긴 잔디도 일본어로 자라는 것 같아.”
누군가 농담처럼 던지면,
“나는 아직도 경상도 억양으로 스윙하는데.”
다른 친구가 웃으며 받아쳤다.
공 치는 건 뭐… 그냥저냥. 어깨가 아프니 스윙이 어정쩡했고, 퍼팅은 여전히 감각보다 운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좋았다.
'지금 우리가 이곳에서 같이 있다는 것'
그 자체로 싱글보다 값진 순간이었다. 모든 것이 익숙하면서도 새로웠고,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젊어졌다.
라운딩을 마친 오후, 우리가 테이블에 다시 올린 건 구보타 준마이 다이긴죠. 친구가 일본 현지에서 따로 구입해 둔 것. 병을 따는 순간, 익숙한 향기가 올라왔다. 멜론, 배, 그리고 뭔가 그리운 냄새. 기압이 바뀌는 듯한 정적. 이 술을 처음 마셨던 그날처럼 이번에도 향은 조용히 퍼졌다.
차가운 병 속에서 나오며 잔 위에 앉은 한 방울 한 방울이 마치 우리 우정의 시간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향은 여전히 고요했고, 맛은 여전히 맑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더 깊었다.
"딱 그때 그 중국집 향이다!"
"중국집에서 마셨던 그 술을, 이제 일본에서 다시 마시네."
"이제 남은 건 이 술 가지고 제주도에서 마셔보는 거지."
그러자 또 다른 친구가 말했다.
"그럼 한라산 등반까지 붙이는 건 어때?"
"야, 그건 도원결의가 아니라 고행결의야!"
그날 밤, 우리는 다시 한 병을 비웠다. 구보타 한 병, 이야기 수십 통. 젊은 시절에 같이 꿈꾸던 것들, 중년을 지나며 겪은 위기와 기쁨,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감사함까지. 모두 구보타 향에 녹아들었다.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여행이 아니라, '우정을 확인하러 온 순례’에 가까웠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45년. 한 사람이 태어나 성장하고, 삶을 세 번쯤 뒤집을 시간. 그 시간을 함께 건너온 친구들이 있다는 건 어쩌면 인생이 준 가장 아름다운 선물 아닐까. 그 선물은 종이 상자도, 금박 리본도 아니고 그저 구보타 한 병과, 그 술을 나눌 수 있는 네 개의 잔이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