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

80세를 훌쩍 넘은 엄마의 뒷모습에서 엄마의 삶을 그려본다.

by 젤리선생님

엄마와 아빠는 한 번 얼굴을 보고 결혼을 하셨다. 아빠는 잘생기셨고, 엄마는 순진한 얼굴에 귀여운 미소를 가진 소녀였다. 아빠에게는 깊은 상처가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어린 시절, 아빠는 논길을 걷다 지뢰를 밟아 다리를 다쳤다. 동네 아이들은 “병신”이라며 아빠를 놀렸고, 아빠는 나뭇가지를 짚고 이를 악물며 걸었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며, “병신 소리 듣기 싫다”라고 이를 꽉 물고 한 걸음 한 걸음 떼신 거였다. 그런 아빠를 친할머니는 애지중지 키우셨고, 그래서 아빠는 생활력이 부족했다고들 했다.


결혼 후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아빠는 부모님이 주신 돈을 도박에 탕진하고, 직장에 적응하지 못해 가불 한 돈을 또 도박에 썼다. 빚을 갚으려 부모님이 땅을 팔아 주셔도 소용없었다. 집은 늘 어려웠고, 아빠가 집에 오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런 아빠를 대신해 엄마가 짊어진 삶의 무게는 무거웠다. 오빠들 많은 집에서 귀히 자란 엄마에게 결혼은 고된 일상이었다. 쌀 한 톨이 없어 몰래 쌀집에서 쌀을 가져올 수밖에 없던 날, 미음을 끓이며 부엌에서 엉엉 우셨다고 했다. 젖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지치신 젊은 날의 엄마. 여든이 되셔서 야 그 아픈 기억을 담담히 들려주시는 엄마의 목소리에 나는 한없이 슬펐다.


언니를 시골에 맡기고 일터에 나가며 겨우 전셋집을 마련했지만, 아빠는 그마저 도박으로 날리셨다. 공장일, 청소 일, 벽돌을 지게에 지고 계단을 오르며 일하시던 엄마. 오랜 노동 끝에 벽돌 지게 짊어지는 요령까지 터득할 정도였다. 아빠가 집에 오셔서 라면뿐인 상을 보고 화를 내셔도, 돈 한 푼 없이 아빠만 믿고 버틴 날들에도, 엄마는 한 번도 아빠를 원망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그렇게 자랐다. 버스비를 아껴 학교를 걸어 다니던 언니, 아빠가 엄마를 때릴 때 말리며 엄마 품에 안겼던 나, 크리스마스 날 월급을 받지 못해 우시던 엄마. 넷째 딸을 낳았을 때 딸이라고 쳐다보지도 않았던 친할머니. 그리고 한 달 내내 일하시다 허리가 망가져 걷지 못하게 되셨던 날에도, 하늘이 도우셨는지 수술 없이 다시 일어서신 엄마.


아빠가 초기암 수술을 받을 때는 병원에서 며칠을 지내며 아빠의 짜증을 다 받으면서도, 엄마는 묵묵히 아빠를 돌보셨다. “네 아빠가 있으니까 우리가 있는 거야.” 늘 웃으시며 말하시는 엄마. 작은 텃밭을 일구며 김장을 담가 집집마다 나눠주시고, 참깨를 볶아 고소한 참기름을 짜며 오직 가족을 위해 일해 오신 그런 엄마였다.


엄마 집에 들렀다 돌아오는 날, 바리바리 싸 주신 것들을 당신이 다 들고 지하철까지 함께 오신다. “택시 타면 아깝잖아. 운동 겸 좋지.” 하며 돌아가시는 소녀 같은 뒷모습. 심지어 지하철에선 학생들이 앉은자리엔 일부러 안 가신다. 혹여나 학생들이 일어설까 미안하시다며 문 앞에 서서 오신단다. 무거운 가방을 멘 채 공부하느라 고단할 학생들을 떠올리는 엄마의 마음은,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소녀 같다.


언니가 남편을 일찍 여의고 혼자 아들 둘을 키우며 고생할 때에도, 넷째 동생이 아플 때에도, 그리고 아직 결혼하지 않은 남동생에게 미안하다 하시며 오히려 안부를 챙기시는 엄마. 한평생 가족을 위해 살아온,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내 엄마.


나는 안다. 아빠가 있으니까 우리가 있는 거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안다. 사실은 그런 엄마가 있기에 우리가 이렇게, 단단히 서 있을 수 있다는 걸.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