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과 붓: 고전 속에서 찾은 생명력
장병언
초등 2학년 화창한 봄날의 주말, 여느 때처럼 동네 아이들과 장난질과 쌈박질의 경계를 넘나들며 뛰어놀고 있었다. 친구를 피해 계단을 급하게 오르던 중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는 것과 동시에 가슴의 통증을 느끼며 의식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집안 소파에 누워 있었고 걱정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부모님이 눈에 들어왔다.
그 일이 있고, 하루가 멀다 하고 원인을 찾기 위해 병원에 검사를 받으러 다녔다. 손바닥은 사무용 A4 용지 같은 색깔처럼 핏기가 점점 사라졌고, 조금만 걸어도 숨이 콱 막혔다. 시간이 지날수록 증상이 잦아졌다. 3~4주 정도가 흘렀을까? 1989년 초여름으로 접어들 무렵, 대구 영대병원 복도의 통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지나, 나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의사 선생님 방으로 향했다. 정확한 병명은 기억이 안 나지만 심장에 혹이 발견돼서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눈물을 머금고 있는 어머니에게 내가 했던 첫마디가 ”수술할 때 안 아파?”였다.
아버지의 인맥으로 수술 집도 할 병원을 신촌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기고, 수술 준비에 들어갔다. 나중에 듣게 된 이야기인데 1989년 당시에는 지금처럼 의료 기술이 좋지 않아서인지, 내 몸 상황이 안 좋아서인지 배를 갈라봐야 수술 가능 여부를 정확히 알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은 최악의 상황은 경우 그냥 죽는다는 말일 거다. 일주일 정도? 이름 모를 검사들을 진행했고 하루 금식 후 수술실로 들어갔다. 그다지 편하지 않은 침대에 누운 상태에서 투명한 마스크가 입에 씌워지며 잠이 들었다.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 없지만 의식이 돌아왔다. 중환자실이었는데, 아팠다. 그냥 아팠다. 수술 시간이 10시간을 넘었다고 했으니 아플 만했다. 산소마스크 같은 걸 끼고 있었는데 가래가 목을 막고 있었고, 쇄골 중간에서 명치까지 30cm 정도 되는 꿰맨 자국이 어렴풋이 보였다. 배꼽 위에는 투명한 고무호스 두 개가 몸속에 꽂혀 썩은 피 같은 걸 뿜어내고 있었다.
결국 마음이든 몸이든 시간이 약이었다. 의사 선생님께서 어린 나이라 꾀나 회복이 빠르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던 걸로 기억한다. 회복 과정에서는 별문제 없이 예상한 날짜에 퇴원을 했다. 이때가 1989년 9살 초등 2학년 여름방학 2달 동안 있었던 일이었다.
해가 바뀌고 아버지는 내 건강이 우려되었던 것일까? 그 많은 운동 중에 왜 하필 산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나를 산에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10살 어린 나이의 아이가 산에 오르는 걸 싫어할 법도 한데,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평소 조금만 걸어도 숨이 막혔던 호흡은 새벽안개 걷히듯 사라졌고,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를 때 들리는 말짱해진 심장 소리도 신기했다. 아마 초등 5학년 때까지는 매주 산에 다녔다.
태어나서 도시에서만 살아왔던 내게,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자연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아름답다기보다는 섬뜩하고 기괴했다. 멀쩡해 보이는 나뭇가지는 땅으로 곤두박질쳐져 있고,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알 수 없는 능구렁이 같은 나무뿌리, 소형 자동차만 한 나무뿌리가 뽑힌 것도 모자라 하늘을 보고 드러누워 있었다. 짧게 내린 소낙비에 계곡물은 종잡을 수 없이 불어서 온 천지 폭포수가 되었고, 우의를 입고 비를 맞으며 구름 속을 걷는다는 것이 결코 몽환적이거나 서정적이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됐다. 해가 서쪽 봉우리로 숨을 때쯤에는 산짐승이 아닌 요괴들이 출몰할 법도 했다.
우물쭈물 학창 시절을 보내고 미술대학에 입학했다. 먹을 다루는 전공이다 보니 자연스레 수묵화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어느 날 우연히 도서관에서 도록을 살피던 중 고전 회화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중국 북송대 산수화였는데 괴기스러운 기운을 가진 나무가 유독 눈에 거슬렸다. 아마 내가 봤던 그림이 ‘이성李成의 한강조정도寒江釣艇图’ 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날 이후로 꾀나 자주 도서관을 들락거렸는데, 뭔가 마력 같은 매력에 북송대 그림이 끌렸다. 어릴 적 아버지와 산에 따라다니면서 보았던 기괴했던 장면이 오버랩된 듯했다. 정말이지 북송대 회화는 어릴 적 산에 오르며 보았던 장면과 너무나 닮아있었다. 특히 나무가 그랬다. 한편으로, 북송대 명화인 ‘조춘도’와 같은 명화를 모사해 보지 않고서는 나 스스로에게 화가의 자격을 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언젠가는 꼭 넘어가야 할 거대한 산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 후로 북송대 회화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어떤 장르의 예술이든 앞으로 성장하기 위해 습득해야만 하는 기술적 문제가 수반된다고 생각했는데, 고전 수묵화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서예를 배워야 했다. 붓을 운영하는 능력이 없으면 좋은 필력을 기대할 수 없다 믿었고, 경력이 깊어지면 자연스럽게 필력이 좋아질 거라는 주변 사람의 말은 믿지 않았다. 이런 생각이 들자마자, 바로 대구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석용진 선생님의 서실로 가서 서예를 시작했다. 학과 수업은 뒤로하고, 휴학 포함해서 꼬박 3년을 고대 명필가들의 서법을 익히는데 모든 시간을 투자했다. 목표가 뚜렷했으니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대학 2학년(2001년) 때 대구 아문 아트센터라는 곳에서 소산 박대성 선생님의 전시를 아주 감명 깊게 본 적이 있었다. 그 전시를 보고 ‘아…. 나중에 졸업을 하고 나면, 내 그림을 들고 꼭 찾아뵙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근데 이제 막 졸업도 했으니 수소문 끝에 연락처를 알아내고, 대학교 때 했던 그림과 글씨를 가지고 박대성 선생님을 직접 찾아뵈었다. 소산 선생님 화실에서 대학교 때 작업했던 그림과 글씨를 보여 드렸는데, 첫 말씀이 ‘그림은 개판인데, 글씨는 잘 배웠네’였다. 그때 보여 드렸던 서예 작품이 안진경의 ‘쟁좌위첩’을 임서한 것인데, 내가 좀 미덥지 않으셨던지 눈앞에서 직접 글씨를 써 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그렇게 박대성 선생님의 호감을 얻고, 개자원화보(명말청초 시기 발행한 그림교본)를 통해 산수화에 대한 기본기를 다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 순간 불현듯 북송대 대가들의 운필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디서 붓이 시작해서 어떻게 맺음을 했는지 느껴지기 시작했다. 때마침 경기도 파주에 작업실을 달세로 10만 원에 빌려준다는 지인이 있어, 거처를 대구에서 아무 연고가 없는 파주로 옮겼다. 4점 정도의 북송 회화를 스스로 선정하고, 본격적으로 작업에 임했다. 필획이 지나간 궤적들을 분석하고, 옛 그림이 만들어지는 조형의 작동 원리를 ‘해석’해 내는 것에 집중했다. 마치 고대언어를 분해하여 직역하듯이, 옛 화가의 필법을 하나하나 모방하고 체득해 나가는 과정을 반복하였다. 창작의 고통은 모르겠으나, 모방의 고통은 생각보다 심했다.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배움을 얻을 처지도 아니었다. 오롯이 혼자 해결해 내야 했다. 또한, 북쪽 파주의 겨울 날씨 또한 남쪽 지역과는 다른 종류의 추위였다. 1인용 전기장판 외에는 어떤 난방장치 없이 생활하였는데, 정말이지 활활 타오르는 연탄불을 통째로 얼려버릴 듯했다. 그래도 시간은 천천히 흘러 흘러, 목련꽃이 만개할 무렵, 대학 시절 그토록 도달하고 싶었던 북송대의 첫 번째 그림이 완성되어 있었다. 그 그림이 ‘방범관倣范寬 설경한림도雪景寒林圖’다. 그 후 임모작업은 계속되었다. 북송대 회화뿐 아니라, 중국 남송(倣李唐 萬壑松風圖방이당 만학송풍도), 원, 명, 청 그리고 조선시대 회화와 도자기, 전통 문양, 중국화상전畵像磚 등 동양고전 회화를 총망라하여 살피는 작업을 진행했다.
어릴 적 경험인가? 아님 나도 언젠가는 거장이 되고자 하는 욕망인가? 나 스스로 정해 놓은 목표에 대한 압박감인가? 무엇이 나를 이토록 간절하게 만들었는지는 명확히 정의 내릴 수 없다는 것이 참으로 답답했다. 답을 찾을 수 없으니 내 몸이 반응하는 대로 맡길 수밖에 없었다.
30대 중반, 또래 작가들이 화단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을 때, 흥미로운 일거리 하나가 들어왔다. SBS ‘사임당 빛의 일기’라는 드라마인데, 당시 대한민국 탑급 배우인 송승헌 씨와 이영애 씨가 주연을 맡은, 화가와 관련된 그림 드라마였다. 화면에 소품으로 등장할 그림들, 손 대역, 중간중간에 필요한 인서트씬 등, 얼떨결에 방송일을 시작했다. 일을 수락하고 나서 어리둥절했다. 대구에서 그다지 활동도 하지 않는 무명작가가 대한민국 탑급의 배우가 출연하는 드라마, 그것도 미술품 관련 드라마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한, 중, 일 동시 방영한다고 기대를 모으는 기사들이 마구 쏟아졌고, 부담감은 커져 갔다.
드라마 연출팀 입장에서도 내가 검증되지 않은 사람이라 직접 작업한 그림을 보여 달라는 요구를 해왔고, 2010년에 제작한 방몽유도원도倣安堅 夢遊桃源圖 그림을 직접 차에 싣고 강남 사무실로 찾아갔다. 제작진은 몽유도원도를 방倣한 그림을 보고, 그제야 나를 믿어주는 눈치였다. 연출팀이 처음으로 요구했던 그림이 현동자 안견(15세기 화가)이 그렸다고 가정한 ‘금강산도’였다.
안견의 ‘금강산도’는 실존하지도, 그가 그렸다는 기록도 없다. 없는 작품을 실존하는 것처럼 창조해 내는 것이 눈앞에 닥친 과제였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금강산’을 ‘안견풍’으로 그려야 되는 상황이니 처음에는 여간 난감한 게 아니었다. 유일한 진작은 몽유도원도뿐이고, 전칭작(전해지는 작품)이 몇 점 존재했다. 드라마 대본 중에는 ‘곽희’라는 화가가 언급되는데, 이는 실제로 몽유도원도에 영향을 준 직접적인 북송 화가였다. 종합해 얘기하자면 ‘몽유도원도’와 안견의 ‘전칭작’, 안견 그림에 영향을 준 북송 시대 ‘곽희의 그림’, 인터넷상에서 떠도는 ‘금강산’ 이미지를 수집하여 교집합을 찾아내기 위한 작업을 진행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대인이 15세기의 언어로 시를 짓는 작업이랄까? 덕분에 ‘창작의 고통’이라고는 말 못 하지만 ‘편집의 고통’은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또 하나, 드라마를 하면서 기억에 남는 그림이 하나 있다. 드라마의 대미를 장식할 그림을 요구했는데, 남녀(이영애, 송승헌) 주인공이 옆에 나란히 앉아 각자 그림을 그리고 CG를 통해 합쳐지는 씬이었다. 대미를 장식한다는 조감독님의 말에 심적 부담감은 증폭되었다.
우선 그 시대에 있을 법한 그림 이어야 했고, 금강산에서 사생을 하는 설정이니 드로잉 같은 현장감 있는 필선의 느낌이 필요해 보였다. 사임당이 살았던 시기가 1500년 정도니까 그즈음 해서 참고할 만한 화가들의 자료를 살폈다. 한국 그림들은 관념산수가 대부분이라, 중국 그림을 참고했다. 전체의 분위기는 명대明代의 느낌으로 가져가고, 필선의 느낌은 겸재, 바위와 수목樹木 형태들은 내가 선호하고 좋아하는 고대 화가의 그림에서 가져와 편집하였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금강산을 1500년대 풍의 형식으로 그려내는 것, 그림의 반반이 각기 다르면서도 합쳐졌을 때 아름다운 조형을 만들어 내야 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촬영이 끝난 후 그림의 제목은 흉중산수胸中山水로 이름 붙였다.
드라마 일을 하면서 말 못 할 다양한 에피소드가 있었고,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1년 6개월가량의 프로젝트를 무탈하게 마무리 지었다. 유명 배우가 출연하는 드라마 제작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작가로서 주목받고, 이제 좀 유명해질 거라고 말해 주는 분들도 있었다. 허나 드라마 소품으로 등장한 그림으로 인해 작가로서 주목을 받고 유명해진다는 말은 우스운 얘기라 생각했다. 미디어에서 자신의 미술작품이 노출된다고 해서 개인의 작업적 성과가 높아지는 것은 아닐 거다. 단지 이전에는 상상해 보지 못했던 심적 부담과 압박을 잘 버텨냈고 ‘작가’로서가 아닌 드라마 제작의 ‘팀원’으로써의 역할을 잘해 내었다는 것에 만족했다. 덕분에 이후로도 다양한 드라마와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하게 되었다. 물론 작가로서 필요한 자유로운 조형의 세계, 그리고 무한한 상상력을 위해 고전을 탐독하는 작업도 꾸준히 이어나갔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20대 초반 서예를 선택한 것은 너무 잘한 일이라 생각된다. 졸업 후 다사다난한 20대 후반, 그토록 원했던 북송 산수를 나 스스로 만족할 만큼의 결과로 그려 내었다. 물론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기법적인 면과 제작 과정이 아쉽긴 하나, 모로 가던 서울만 가면 되지 않겠는가?” 옛날 그림이나 베껴내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 “라는 비아냥도 심심찮게 들었다. 하지만 어제의 것을 모방하는 것이나, 천 년 전의 것을 모방하는 것이나 본질은 같다고 생각했다. 동시대 미술 또는 현대미술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지 내가 쫓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믿었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새로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동력을 끊임없이 스스로 생산할 수 있느냐가 중요했고, 그러자면 조금이라도 젊을 때, 경험의 스펙트럼을 넓혀 놓아야 할 것만 같았다. 그 경험적 측면을 고전 속에서 구했다. 20대 초반 운명같이 고전 수묵화에 대해 뭔가 알 수 없는 매력을 느꼈고, 나 스스로 무엇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했을 뿐이다. 천년, 아니 그 이상의 생명력을 지녀온 선배들의 예술작품을 눈으로만 보고 지나가기엔 너무 아쉬웠다.
종종 ‘왜 고전 산수화를 모사하기 시작했나?’고 물어온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참 난감하다. 보통은 유년 시절의 경험이 크게 작용한 듯하다고 답을 하지만, 유년시절의 경험이 없었다 한들 뭐 크게 달라졌을까? 모를 일이다.
40대 중반,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명확히 정의 내릴 순 없으나, 꾀나 오랫동안 고전을 탐독해 왔다. 2002년 서예를 시작했고, 2020년 곽희郭熙의 한림도寒林圖를 끝으로, 스스로 설정해 놓은 ‘고전의 탐독’은 끝을 냈다. 한림도에 전각을 찍으면서 “이만하면 됐다”라는 생각과 함께 18년 동안의 챕터하나가 순식간에 넘어가 버렸다. 그냥 자연스럽게 시기가 도래한 것일까? 내 양심이 허락해 준 걸까? 이제 자신의 길을 가보라고...
명말 청초의 화가 석도(石濤, 1642년 ~ 1707년)의 “석도화론“ 변화장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만약 내 그림이 그놈의 대가들의 그림을 꼭 닮았다고 하자! 그래봤자 그것은 그놈의 대가들이 먹고 난 찌꺼기 국물을 들이키는 꼴이니, 도대체 이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나도 알고 있다. 그것이 찌꺼기라는 것을. 하지만 의미는 내가 부여하기 나름이다. 내게 고전은 인식의 도구이자 참고의 기준이었다. 나는 항상 생각한다. ‘모방, 변형, 창조’의 과정에서 지금 어디쯤 걸어가고 있을까? 참으로 그것이 궁금하다.
2024.04 장병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