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 특별하지는 않지만 너무 소중해

by 느긋

올해는 유독 시간이 더 빠르게 지나간 느낌이다. 그만큼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일까? 나이만큼의 속도로 인생이 흘러간다고 하니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난다. 내년에는 45km 속도로 흘러가겠군.


연말이라고 해서 특별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 아니다. 평소에 보는 친구들을 만나 밥을 먹고 차 마시며 수다를 떨고, 가족들과 배달 음식을 먹는 소탈하고 평범한 연말이 예상된다. 넷플릭스를 보며 뜨개질하는 장면도 일상이 되어버렸고 카페에서 들려오는 캐럴에도 감흥이 사라진 지 오래이다.


별반 다를 게 없는, 하나도 특별하지 않는 하루의 시작이었지만 고1 아들의 너무나 소중한 밝은 웃음이 나를 엄청 행복하게 만들어 버렸다. 화장실로 휴대폰을 들고 가서 도통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아들에게 '빨리 나오라'는 잔소리는 듣는 사람에게 타격감 제로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엄마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차린 밥을 한 그릇 뚝딱 먹고 느긋하게 준비하는 아들에게 '버스 놓치겠다'는 잔소리 또한 아무런 효과가 없다.


"엘리베이터 누를까?"

"네."

"8시 3분이다. 이러다 버스 놓치겠다."


8시 5분에 오는 버스에 나만 조급해진다.

"3분이면 집에 가서 밥도 먹고 나올 시간이야."


아들의 능청스러운 농담에 웃음이 팍 나온다.

"엄마는 이런 농담을 좋아하더라." 말하며 막 뛰어가는 녀석의 뒷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나도 모르게 함박웃음이 지어진다. 아들의 웃음 한 번에 사르르 녹아버리는 엄마의 마음이라니... 엄마를 녹이는 게 이렇게 쉽다는 걸 아들은 알까?


직장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조금 지나니 아들이 탄 버스가 내 옆을 지나간다. 이 모습을 보고 안심이 되었고, 항상 같은 버스자리에 앉는 아들의 실루엣(고개를 푹 숙이고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는)을 보며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오늘은 아들이 방학하는 날이다. 1년 동안 크고 작은 일들로 인해 속이 상한 적이 많았지만 그래도 무탈하게 고등학교 1학년 생활을 잘 마칠 수 있어 정말 감사했다. 몇 개월 전만 해도 공부는 안 하면서 본인은 '정시파이터'(어디서 들은 개뼈다귀 같은 소리인지)라고 자퇴하고 싶다는 소리까지 나왔었는데 오늘을 맞이한 것이다. 지금도 공부는 하지 않고 앞으로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입만 나불대고 있다. 시험 성적표도 보여주지 않아 담임선생님께 따로 부탁을 드린 적도 있다. 그나마 다니던 수학, 영어 학원도 끊은 상태라 중요한 겨울 방학 시간을 어떻게 보낼 건지 걱정이 앞서지만 오늘만큼은 건강하고 밝은 아들의 모습에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한참을 걸어가고 있는데 교차로에서 교통봉사를 해주시는 자원봉사자 분들이 계셨다. 늘 보는 장면이었다. 신호가 노란색에서 빨간색으로 바뀌었지만 봉사자들의 신호를 무시하고 쌩하고 지나가는 트럭이 보였다. 내가 건너려는 횡단보도에는 이미 초록불이 켜져 있었다. 그 트럭을 본 봉사자 분이 나에게 외쳤다.


"차 와요! "


조심하라는 뜻에서 나에게 주의를 준 것이다. 아들 덕분에 마음이 몽글몽글 해져있는 상태였는데 마음이 더 몽글몽글 해졌다. 깃발만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형식적으로 활동을 할 수도 있는데 진심을 다해 교통봉사를 해주시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분께 꾸벅하고 인사를 하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내 주변의 세상이 방금 전보다 더 따뜻해졌다. 그분의 말 한마디가 출근길 발걸음을 더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어제저녁 친구들과의 저녁 약속에서 친한 동생이 깜짝 크리스마스 선물을 해주었다. 바로 '실리콘손난로'였다. 뜨거운 물을 부으면 핫팩이 되는 손난로인데 한 손 크기로 휴대하기 참 좋았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아 너무나 고마워서 오늘 출근길에 바로 사용하였다. 주머니에 넣으니 손에서 전해지는 물리적인 따뜻함과 선물을 준비하면서 설레었을 동생의 마음에 봉사하시는 분의 따뜻함까지 더해져 어느 때보다도 출근길이 짧게 느껴졌다. 요즘 환경에 문제에 되는 일회용 핫팩은 신체에 안 좋은 물질이 흡수될 수 있어서 사용할 때마다 뭔지 모를 찝찝함이 느껴졌는데 이런 선물을 받아서 더 기분이 좋았다. 출근길을 걸어 다니는 나에게 안성맞춤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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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마음으로 학교에 도착했는데 학교 현관에 설치된 크리스마스 풍선 장식이 너무나 예뻤다. 학부모회에서 아이들을 위해 준비한 특별한 포토존이 아이들의 시선뿐 아니라 어른의 눈길을 끌기에도 충분하였다. 삼삼오오 모여 구경하는 모습도 오늘따라 더욱 예쁘게 보였다. 오늘 중간놀이 시간에 we클래스(학교상담실)에서 소원트리 행사도 진행한다던데 아이들이 신나는 하루는 보내는 걸 보는 것도 기쁨이 컸다. 소원트리에 소원을 적으면 뽑기를 할 수 있고 선물까지 받을 수 있는 행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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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내일이 크리스마스지.'


크리스마스는 나에게 종교적인 의미보다 평일 하루 쉴 수 있는 일상의 단맛 같은 휴일이라는 사실이 더 크다. 어쩔 수 없는 대한민국 직장인인 것이다. 감흥이 사라진 지 오래지만 오늘만큼은 기분이 좋았던 탓인지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에게도 영향을 미쳐 교실로 들어오는 아이들을 더 밝게 맞이해 주었다. 우리 반 5학년 아이들도 왠지 모르게 들뜬 기분인 것 같았다. 오늘 급식에 '산타클로스'케이크도 나온다고 아침부터 아이들이 좋아하던데 덕분에 나까지 신이 난다.


크리스마스 선물까지는 아니지만 어제 윤지(가명)와 했던 약속을 지키려고 가져온 것을 윤지에게 빨리 주고 싶었다. 윤지에게 종이가방을 건네니 바로 꺼내서 확인해 본다. 물건은 바로 옷이었다.


어제 급식 먹을 때 내 앞에 앉아있던 윤지에게 말을 걸었다.


"윤지야, 선생님 멘토스 옷 윤지 줄까?"


무표정한 윤지의 얼굴이 일순간 환해진다. 멘토스 옷은 회색 후드티로 말 그대로 멘토스가 옷에 그려져 있다. 이것을 입을 때마다 윤지가 "선생님~귀여워요.", "멘토스 옷 예뻐요." 했던 생각이 급식 먹으며 갑자기 떠올랐다.


"진짜요? 주시면 좋죠."

"그런데 옷이 오래돼서 일단 보고 입기 싫으면 안 입어도 돼."

"아니에요, 입을 거예요."

"윤지에게 클 수도 있어."

"그러면 제 언니라도 줄게요."

"그럼 선생님이 내일 옷 가져올게."


윤지가 바로 옷을 입어보니 아이들이 윤지 옆으로 모여든다.

"이거 선생님 옷이지?"

"우와~ 귀엽다."

바로 옷을 입으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는 윤지도 귀엽고, 옆에서 칭찬해 주는 아이들도 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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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라 동학년 선생님께 드릴 키링도 가지고 와서 연구실에 두었다. 학년말이라 생기부 작성 및 점검하느라 정신없는 동학년 선생님들이 한숨 내쉬고 연말을 맞이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별건 아니지만 준비했다. 양말목으로 만든 네 잎 클로버 키링도 선생님들이 좋아하시길 바라본다. 내년이면 각자 다른 학년으로 갈 예정이라 헤어질 생각을 하니 섭섭한 마음이 생겼다. 1년 동안 동학년을 하면서 많은 도움을 받아 감사한 마음이 큰데 과하면 부담스러울 수 있으니 이 정도로만 내 마음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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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시간에 평소 말이 없는 솔이(가명)가 내 옆으로 와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내밀었다. 정성스럽게 포장된 과자 선물이었다. 원래는 받으면 안 되지만 솔이가 나를 생각하며 포장했을 모습을 떠올리니 차마 거절할 수 없어 받았다. 덕분에 크리스마스를 더욱 즐기고 느낄 수 있었다. 솔이를 꼭 안아주니 솔이도 나를 꼭 안아서 내 몸과 마음이 더 따뜻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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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도 마음도 따뜻해지는 하루다. 엄청나게 특별하지 않지만 하나하나 너무나 소중한 장면들이다. 반복되는 일상에 지루함을 느끼는 이도 있겠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하루하루 무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일상이 감사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소소하지만 서로 주고받는 마음과 마음이 만나 마음의 온도가 올라가는 느낌이 너무나 좋다. 연말에 특별한 계획이 하나도 없지만 나에게 주어진 이러한 일상들이 나에게는 제일 특별한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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