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도 무사히
"선생님! 지금은 좀 질겨서 먹을 수는 없데요. 그리고 반으로 잘라서 친구들에게 보여주면 좋겠어요"
'OO 어머님, 죽순 엄청 신기하네요! 통으로 된 생죽순을 저도 처음 봐요! 우리 반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자료가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OO이도 재밌어해서 친구들도 보면 좋을 것 같아 보냈는데 반가워하시니 감사합니다.'
기분 좋은 마음으로 대화를 하고 보니 창 아래에 있는 문구가 오늘따라 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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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고 문구가 언제부터 생겼던가? 담임을 오랜만에 하는 나는 처음에 이런 문구가 낯설었다. 오래전 이기는 하지만 담임을 했을 때 나의 휴대폰 번호를 공개하는 것은 당연한 거였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교실 전화번호와 하이클래스의 소통 창구만 열어두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예정이다. 게다가 하이클래스의 하이콜로 학부모와 통화 시 자동녹음이 되는 기능까지 설정해 놓았다. 요즘은 교육청의 교사안심번호를 지원해 주는 서비스도 있다. 주변에서 보고 들은 안 좋은 이야기들이 하도 많아 혹시라도 나에게 예상치 못한 불상사가 생겼을 때를 대비하기 위한 아주 기본적인 것이다.
순간 이런 현실이 너무 안타까웠다. 항상 교사와 학부모는 우리 아이들을 위한 좋은 교육 파트너라 생각하는 한 사람으로서 교권 추락의 현실을 요즘은 직간접적으로 상당히 많이 경험하고 있다. 일일이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오늘날 대한민국 교육의 씁쓸한 현실을 현장에서 자주 보고 느끼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무사히'라는 신조를 가지고 교문을 매번 들어선다. 아직까지 별다른 일 없이 교직생활을 나름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건 나의 능력이 아니라 순전히 운이었다고 생각한다. 마치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교통사고의 운처럼, 나의 잘못이 아니어도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사고 말이다.
글쓰기 연수의 마지막 시간 후 이윤영 작가님이 '교사인 우리들의 일은 정말 고귀한 일'이라고 하셨는데 내가 내 일에 대해 고귀하다고 느낀 적이 있었던가? 누군가의 앞날을 '축복'해주는 직업이라 자부심을 가지고 나의 일을 소중히 여겨주라 말씀하셨는데 내가 진정으로 우리 아이들의 앞날을 축복해 준 적이 있던가? 아마 초임 때는 나름 교직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요즘에는 그런 긍지와 사명감이 많이 희미해졌다. 그저 하루하루 아무 민원과 사고 없이 무사히 보내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는 요즘인데 내 일이 다른 사람의 앞날을 축복하는 거였다고? 확실히 나는 내 직업을 사랑하고 즐겨하지만 하루에도 수없이 교실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로 인해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생각을 하곤 한다. 신규발령 때는 무조건 정년퇴직이 당연했었는데 요즘은 명예퇴직에 대해 가끔씩 생각도 하고 있다. 나는 분명 내 일을 사랑하고 적성에도 맞는데 초등교사의 의원면직에 대한 유튜브 영상도 찾아보며 능력 있는 젊은 선생님들의 과감한 선택에 대한 감탄도 감추지 않는다.
교사, 학생, 학부모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교실을 만들기 위한 방법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지금은 모두 여유롭지 않은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생죽순을 통으로 보내주신 우리 반 학부모님처럼 아이들의 좋은 경험만 생각하고 그런 학부모에 감사를 드리는 오늘 우리 반 교실의 한 장면이 쉽지 않은 일이 되어버린 오늘날이다. '적자생존 - 적는 사람이 살아남는다'라는 우스개 소리도 더 이상 우습지 않은 대한민국의 교육 모습니다. 문제상황이 발생하면 행동발달 누가기록을 하고 무조건 증거를 남겨놓는 나의 부지런한 습관의 이면이 달콤하지만은 않다.
오늘 하루만큼은 교실을 들어설 때 '오늘 하루도 무사히'라는 나의 신조를 잠시 접어두고, 우리 반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미래를 진심으로 축복하는 마음으로 교실 문을 열고 싶다. 이는 나 자신을 위한 일도 될 것이다.
오늘 하루만큼은 너희들의 미래를 진심으로 축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