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중고 막내입니다.
[선배님이라 쓰고 선배복(福)이라 읽는다(1)]
- 부제: 조금 특별한 막내와 조금 특별한 선배들
3년 차 막내의 삶 3_ 첫 번째 이야기
일하면서 생긴 인연이 많다. 정식 직장은 처음이다 보니 이곳에서 맺은 인연들은 내 인간관계의 큰 파이를 차지한다.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집에 머무는 시간보다 직장에서 일하는 시간이 길기 때문에, 동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가족보다 보는 시간이 많으니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게 더 이상할지도 모르겠다.
지난 글에서 말했듯이, 내 근무 환경은 장단점이 극명한 ‘협업이 중요한’ 곳이다. 개인적으로 이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관계’에 있다. 직원이 많지 않은 데다가, 한 책임자가 다른 사업팀의 팀원이기 때문에 동료들과의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좋든 싫든 밀접해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감사하게도 선배님들을 잘 만난 덕에 신입 때부터 지금까지 그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혹자는 이것이야말로 장단점이 극명한 것 아니냐고,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는 환경이라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내가 이 환경을 좋아하는 이유도 남들에겐 보기 드문,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자부심으로부터 비롯된다. 아무튼 충분히 단점으로 보일 수 있겠으나 전적으로 공감하진 않는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선배들과 일하면서 온몸으로 배운 속담이다. 선한 영향력을 가진 선배들과 오랜 시간 일한 덕분에 일하는 방법을 배우고, 함께함의 미덕을 배웠다. 긍정적인 영향력을 다시 흘려보내는 법도 익히고 있다. 생각해보면 스쳐 간 인연 중 성향이 맞지 않았던 사람에게서도 장점만 찾으면 언제나 배울 점은 있었다. ‘저렇게 꼬아서 받아들일 수도 있구나.’ 내지는 ‘절대 저러지는 말아야지.’ 하고 배운 것을 포함하면 더 많고.(그 인연이 아직도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걸 보면 함께하는 시간만큼이나 개인이 가진 기운도 중요한 것 같다.)
떠나간 이들을 포함해 내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두 사람이 있다. 짐작했겠지만 우리의 팀장님, 그리고 그와 불과 1년 텀을 두고 입사한 선배.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일로도 성장할 수 있었지만, 사회생활이라든지 인간관계에서도 한층 성숙해질 수 있었다. 종종 일에 서툴러서, 고민이 많아서, 선배들을 위해서 한 행동 등, 갖가지 이유로 그들을 힘들게 하기도 한다. 그래서 미안한 것도 많고. 어찌 되었건 그들과는 추억이라 부를만한 일들이 많은데 개중 특별한 기억 몇 가지만 꺼내 보려 한다.
어릴 때 본 만화영화에나 나올 법한 남자 주인공 또는 조력자. 주인공이 낙심할 때마다 짠 나타나 위로해주거나, 훌쩍이는 주인공에게 손수건을 내어주는 장면이 자연스레 그려지는…. 그렇다고 만화영화 ‘카드캡터 체리’에 나오는 주인공 오빠 친구, ‘청명’처럼 나긋나긋한 이미지는 아니다. 되려 털털하고 사람 좋은 느낌에 가깝지. 만약 팀장님이 이성이었다면 내가 짝사랑하지 않았을까? 우습지만 종종 생각한다. 그만큼 어린 막내 눈으로 볼 때 그는 일을 잘했고, 어려워 보이는 일도 멋지게 해냈다. 일에 있어서 만큼은 내가 아는 누구보다 정확하고 대처 능력도 훌륭했으며, 모두를 따듯하게 잘 챙기는 사람이었다. 직장 생활에 고난이 찾아올 때마다 매번 큰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일적으로도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유리 같은 멘탈이 깨지지 않게 잡아주는 고마운 선배다. 일터에서 이런 선임을 또 만나긴 아마 어려울 거다.
“팀장님. 자료 준비 다 했습니다. 한번 검토해주세요!”
“와, 저는 언제쯤 팀장님처럼 깔끔하게 될까요?”
“아니 진짜, 이게 되네?”
일과 관련해서 보면 팀장님한테 가장 많이 하는 말일 거다.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변함없는 사실은 어떤 자료든 그의 손을 거치면 한층 더 깔끔해진다는 거다. 나는 전반적인 자료 초안을 잡는 업무를 하는데, 팀장님 검토를 거칠 때마다 정갈해지는 자료를 보며 늘 감탄하곤 한다. 회의록, 회의 자료뿐 아니라 보고서나 문건 외 모든 면에서도 그렇다. 심지어 내가 할 땐 분명히 안됐던 것들도 팀장님이 만지면 해결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컴퓨터가 먹통이 되어서 이것저것 해보다가 결국 포기할 때, 그가 와서 몇 번 만지고 나면 갑자기 작동하기도 한다. 양치기 소녀가 된 것 같아서 억울하지만 진짜 그런 일이 많다. 아무튼 좀 해결사 같은 사람이다.
“모르겠으면 가만히 있지 말고 물어봐. 그게 날 위하는 일이다.”
“와, 나 방금 꼰대 같았어? 이젠 어쩔 수 없나 봐.”
“안돼! 혹시 방금 내 말 상처야?”
팀장님이 나한테 제일 많이 하는 말은 이 정도인 것 같다. 여기에 좀 더 곁들이면 ‘파이팅! 할 수 있다!’와 같은 에너지 넘치는 말, 엄지를 치켜세우는 제스처 정도. 그는 상황에 따라 쓴소리를 하게 되면 자신의 언행이 혹시 꼰대처럼 들렸는지 꼭 확인한다. 그럴 때는 “진짜 꼰대는 그런 말도 안 했을 거예요.”라고 답한다. 진짜 꼰대의 잔소리처럼 느껴졌다면 “방금은 진짜 좀 꼰대 같았어요.”라고 웃으며 말할 짬은 돼서 진심으로 괜찮은 거다. 나랑 팀장님이 많이 하는 말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는 선임이기 전에 인생 선배로서 내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얼마 전 꺼내 읽은 메모장에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는 한 사건에 대해 적혀 있었다. 내가 팀장님에게 동료애가 무엇인지 처음 배운 날일 거다.
나는 입사 후, 지금은 없는 한 선배 때문에 이따금 힘들어했다. 선배는 상대가 어떤 생각을 할지보다는 마음에 있는 말을 모두 꺼내는 게 더 중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인간관계를 얼마 겪어보지 못한 내겐 큰 도전 거리 같았다. 그날도 선배 특유의 정제하지 않은 말을 들은 나는 지칠 대로 지쳐 모니터만 쳐다보고 앉아 있었다. 필 생각도 안 하고 말려있는 어깨를 팀장님이 위로의 의미로 툭툭 치고 나갔다. 모두 퇴근한 사무실에 혼자 남아 일단 욕을 좀 읊조리고, 친구와 저녁 약속이라도 잡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핸드폰을 들었다. 그 순간 울려대는 진동. 전화를 받았다.
“넵, 팀장님.”
“퇴근했어?”
“아, 아직이요! 이제 나가려고요.”
“1층으로 나와. 집에 데려다줄게.”
“예? 팀장ㄴ….”
되묻기 전에 전화가 끊겼고 일단 급하게 내려갔다. ‘집에 데려다준다고?’ 당시 팀장님과 나는 서울을 기점으로 정 반대에 사는 경기도민이었다. 우리 집에서 차로도 1시간 반은 걸리는 곳에 살면서 어떻게 데려다준다는 걸까. 그리고 저녁 약속 있다고 나간 사람이?
“팀장님 약속은요?”
“취소됐어. 얼른 타.”
“아뇨! 대중교통으로 갈게요. 지금 퇴근 시간이라 엄청 막힐 거예요.”
“알았으니까 일단 타 봐! 빨리빨리!”
그 말에 얼떨결에 몸을 실었다. 버스정류장에 데려다주려나 싶었는데 정류장을 지나쳐 우리 집을 향하고 있었다. ‘팀장님 왜 그러세요…?’ 이해가 안 됐다. 집에 가기 위해서 꼭 지나야 하는 고속도로는 퇴근 시간만 되면 모든 차가 기어가듯 움직인다. 고속도로로 들어가기 전부터 차는 거의 서 있다시피 했다. 그때가 저녁 6시 반이 조금 넘은 시간, 무려 금요일 퇴근길이었다.
너무할 정도로 꽉 막힌 도로 위
팀장님 차 안은 토크의 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갇혀있다 보니) 오랫동안 그와 속 깊은 대화까지 나누었다. 선배와의 관계로 힘든 이야기, 인간관계를 신경 쓰지 않고 일하는 방법, 그가 가진 고민 등등. 서로의 이야기를 숨김없이 주고받았다. 잘잘못을 따지거나 훈수를 두는 일방적인 대화가 아닌, 그냥 편안한 대화였다. 또 먼 길을 돌아가야 할 팀장님에게 걱정 어린 말을 던졌는데, 지금은 내 걱정이나 하지, 누굴 걱정하냐며 호탕하게 웃었다. 당시 본인이 당면한 문제로도 충분히 힘든 게 많은 사람이었다. 차로 꽉 막힌 길을 운전하면서 한참 어린 후배와 대화하기도 쉽진 않았을 테다. ‘이 사람 뭐지?’ 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애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나 싶었다. 앞으로 그에게 힘든 티는 최대한 안 내야겠다며 다짐도 했고. 아무튼 그날 이후 팀장님은 든든함을 넘어 평안함을 주는 존재가 되어갔다.
회사에서 나온 지 장장 두 시간 반이 지나서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같이 늦은 저녁을 먹고 밤이 되자 그는 다시 먼 여정을 떠났다. 팀장님을 배웅하고 돌아오는데 날 힘들게 했던 선배와의 일은 작아지고 팀장님과 오면서 나눈 진솔한 이야기, 그리고 따뜻함이 마음에 남아있었다. 그 일이 있고 한참 지난 뒤 순수한 궁금증으로 물었다.
“팀장님, 그날 힘들지 않았어요?”
“네가 죽어가는 것처럼 보여서 그 상태로 그냥 집에 보내면 안 될 것 같았어. 나한테 운전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닌데, 동료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건 어렵더라고. 그렇게 안 했으면 내가 불편했을 거야.”
“…. (감동의 눈빛)”
“너 도망가면 어떡해. 날 위한 거니까 감동받지 마. 아우 근데 길이 너무 막히긴 했어.”
“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
그날에야 알았지만, 약속은 취소된 게 아니라 취소한 거였다. 풀이 죽은 막내에게 필요 이상의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는 좋은 사람. 그때가 일한 지 한 달 갓 지났을 무렵인데, 3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는 변함이 없다. 상황에 따라 조언해주기도 하고 힘을 주며 가끔은 따끔한 일침도 놓는다. 일회성으로 끝나는 관심이 아니라 변함없이 동료를 들여다볼 줄 아는 리더십이 있는 사람! 그 덕에 동료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아가고, 차곡차곡 만든 동료애가 얼마나 곳곳에서 빛을 발하는지 배울 수 있었다.
팀장님이 가진 최고의 능력은 동료를 대할 때 나타난다. 그의 언행은 가벼운 위로나 되지 않는 충고 따위가 아니라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 아마 동료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능력이 아닐까. 동료애가 생기면 선배들이 어쩌다 싫은 소리를 듣거나 신경 쓸 일이 생기는 것만 봐도 힘들어진다. 동료가 편안한 상태일 때 내가 일하기도 더 좋아지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들을 진심으로 응원하지 않을 수 없다.
팀장님을 보면 프로페셔널함과 자상함이 겸비되면 사람이 싫어하고 싶어도 싫어할 수가 없다는 걸 피부로 느끼게 된다. 자연스럽게 사람이 모이고 인정받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떠올려보면 주변에 생각보다 없다. 내가 7년 차쯤 되면…. 여러 선배에게 배운 만큼 더 멋진 선배의 형태를 하고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