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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Aug 15. 2021

혼잣말하는 소녀

재창작 동화,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

"그 장면을 목격하지만 않았어도.
 아니, 제가 그걸 엄마에게 말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은아 양은 10년 전 이야기를 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 내게 말했다. 다듬어지지 않은 눈썹이 제멋대로 돋아나 있고, 조금만 손질하면 어여쁠 곱슬머리 카락도 손길을 받지 못하고 마음대로 드리워져 있는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도 어여쁜 열다섯 살 소녀는 다섯 살에 했던 선택을 후회하고 있었다. 다섯 살에 무슨 선택을 할 수 있겠느냐 하겠지만, 분명 그때 은아 양은 선택을 했었다. 이상함을 감지한 후 엄마에게 자신이 목격한 것을 있는 그대로 전달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은아 양을 그 시간에 가두어 놓았다. 몸은 성장했어도 마음은 다섯 살, 그때 그 시간에서 더 이상 성장하지 못했다. 15세의 모습을 하고 5세의 기억에 갇혀 살아간다는 건 어떤 걸까. 감히 내 멋대로 추측하고 싶지 않아서 은아 양의 말에 더 귀 기울였다.


"그날, 방에서 자다가 깼어요. 낮이었는데, 아마 엄마가 낮잠을 재우셨던 것 같아요. 자다가 일어났는데 엄마가 안보이니까 엄마를 찾으러 거실로 나왔어요. 집을 돌아다니면서 엄마를 찾는데, 안방에 인기척이 있어서 보니 아빠가 누군가와 부둥켜안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건 엄마가 아니었어요. 그때는 그게 뭘 의미하는지도 몰랐어요. 하지만 무언가 이상한 건 알아서 엄마에게 말씀을 드렸는데, 그렇게.. 엄마와 아빠가 이혼을 하게 되셨어요. 제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아는데, 자꾸만 죄책감이 들어요. 만약 제가 그날 낮잠에서 깨서 돌아다니지 않았으면 어땠을까요. 그 장면을 봤어도,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우리 가족은 무너지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 그 생각이 계속 들어요."


그 장면은 그녀의 뇌리에 쇠 문처럼 짙고 깊게 박혀 그녀를 가둬놓은 듯 보였다. 앞이 보이지 않는 쇠 문 앞에 주저앉아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그날의 장면을 곱씹고, 후회하고, 자신을 미워하는 일뿐인 것처럼 보였다. 모두가 이제는 시간이 지났으니 문을 열고 나오라고, 괜찮다고 했지만 언젠가부터 그녀는 자신을 괴롭히는 행동에서 안정을 느꼈다. 뾰족한 열쇠로 자신의 살갗을 긁고 나면 이제야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누군가 친근하게 다가오면 일부러 아픈 말들을 해서 스스로를 고립시켜야 비로소 맞는 구멍에 단추를 끼운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매일 밤 꾸는 잔혹한 악몽들이 괴롭지만, 악몽이 멈추면 악몽을 꾸게 해 줄 영상이나 글에 스스로를 노출시켰다. 쇠 문 안이 괴롭고 아파도, 마치 안에서의 삶이 자신에게 맞는 옷처럼 느껴졌다. 쇠 문 너머 세상은 오히려 너무 새로워서 두렵고 불편했다. 너무 새하얀 공간에 가면, 들어설 때부터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지는 것과 같은 그런 것이었을까.


 




"선생님, 이번 주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세요? 글쎄 저희 가족이 제 생일이라고 서프라이즈 파티를 준비해준 것 있죠? 그런데 저는 파티보다 그 편지가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엄마가 편지를 써주셨는데, 눈물을 참느라고 혼났어요. 언니도 선물로 제가 예전부터 가지고 싶었던 립 틴트를 선물해주고!"


드디어 은아 양에게도 이 굳게 닫힌 쇠문이 열릴만한 일들이 생기는 걸까? 가족의 해체로 받은 상처를 아물게 할 만한 일들이 드디어 일어나는 것일까? 이제 그 기나긴 죄책감에서 벗어나도 되는 순간이 온 것일까? 너무나 기다려온 순간이었다. 최대한 평정심을 가지고 들으려 노력했다. 들뜬 마음을 보이면 혹여나 그녀의 감정이 오염될까 싶어서 그랬다.


"생파 끝나고 다 같이 집에 가서..."

"응? 집에 가서? 엄마, 아빠 따로 지내시지 않아?"

"아아~ 그 엄마 아빠 말고요. 인토피아에 있는 엄마 아빠요!"


은아 양은 인토피아라고 불렀다. 그녀의 머릿속 세계를. 은아 양이 처음 나에게로 온 것은 혼잣말을 시작하고 난 뒤부터였는데, 불쑥불쑥,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은아 양의 어머님을 놀라게 했다. 어머님께서는 어느 날인가 지하철에서 산발을 한 여자가 반나체 상태로 허공을 향해 이야기를 하며 박장대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고 하시며, 당신의 딸이 그렇게 되면 어떡하냐고 초조한 얼굴로 찾아오셨다.


“아니오, 어떤 실체가 보이거나 목소리가 들리는 건 아니에요. 그냥 제 머릿속에 그 사람이 할 법한 말이 떠오르고, 제가 대답하는 거죠.” 은아 양은 이런 질문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덤덤하게 말했다. 혼잣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대화를 하고 있는 거라고.


“엄마에게는 비밀이에요. 엄마가 서운해하실 거예요. 제 머릿속에 다른 부모님이 계시거든요. 제 머릿속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어요."


그녀의 머릿속에는 다정다감한 부모님이 계시고, 친구들과 연인이 산다. 홀로 있을 때 그녀는 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곤 하는데, 이제는 그 대화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외롭고 울적할 때 머릿속 자신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안정감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벌어진 가족과의 생일파티에는 따뜻한 엄마의 편지, 가족들의 관심 그리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있었다. 은아 양이 그리워하는 가족의 모습은 이런 모습이구나.




가족 이야기를 하는 날이 있는가 하면 어떤 날은 친구들과 나눈 대화를 들려주기도 했다. 현실에서는 친구들이 다가오면 늘 모진 말로 밀어내는 그녀이기에, 나는 귀한 이 순간을 잘 들어두었다가 그녀의 마음이 한없이 무너지는 어느 날에 보물 같은 이 날의 기억을 상기시켜주리라 싶어 열심히 듣곤 했다.


그날은 학년을 마치게 되어 반에서 롤링페이퍼를 쓰게 되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친구들이 자신에 대해 좋은 코멘트를 남겨주었다고 했다. '너와 친해지고 싶었는데 막상 그러지 못해 아쉬워', '너 글씨체 너무 예뻐서 부러워',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자'. 그런데 그렇게 등장한 친구들의 이름은 여김 없이 가상 속 친구들이었다.


현실에서 그녀는 친구들과의 대화에 잘 어울리지 않는다. 친구들은 삼삼오오 모여 아이돌이나 화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 어떤 것도 자신의 관심사와는 멀다고 했다. 좋아하지 않는 것을 좋아하는 척하며 무리에 끼어 있기가 힘들다고도 했다. 혼자가 편했고, 혼자 있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스스로가 스스로를 무리로부터 고립시켰지만, 그렇다고 소외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고립시켰으니 외로운 건 당연한 거라고. 외롭고 싶지 않으면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좋아하는 척하며 무리에 다가가려는 노력을 하기도 해야 한다고. 그게 사회생활이라고. 모두가 그렇게 산다고.


하지만 그 누군가의 선택과 다르게 그녀가 택한 방법은 가상 친구들을 만드는 것이었다. 혼자 있으면서,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방법으로는 그 방법이 유일했다.




"남자 친구와 요즘 사이가 좋지 않아요. 대화도 잘 안 되고, 뭐가 잘 못된 건지 잘해보려 해도 되지 않아요. 그런데 그 와중에 제 남자 사람 친구 하나가 갑자기 제게 고백했어요. 너무 놀라서 일단 기다려보라고 했는데, 제 남자 친구는 이 사실을 몰라요. 남자 친구와 그 남사친도 서로 친구거든요. 저 어떻게 해야 돼요?"


있을 법한 이 연애 고민도 그녀의 머릿속 에피소드다. 그녀는 연애도 가상 속에서 했다. 현실에서 호감 가는 대상이 있어도 이내 머릿속에 비슷한 인물을 만들어 막상 연애는 머릿속으로 했다. 그녀에게는 현실 연애가 가져다줄 수많은 변화와 변수들을 감당할 용기가 없었다. 모든 상황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가상 연애면 충분하다고 했다. 그렇게 그녀는 혼자 하는 연애를 했다.


그녀의 가상세계 속 관계들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가정이 깨어지고 엄청난 우울감과 무기력감을 겪은 그녀가 현실로부터 도피할 수 있던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만든 안정된 관계와 상황 속에 사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매주, 가상 속 소중한 이들과의 대화 그리고 있었던 사건들을 상담실로 가지고 왔다. 가상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상담시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때도 있었다. 현실에서의 이야기는 늘 비교적 짧게 끝났다.




우리는 현실을 감당할 수 없다고 느낄 때 나에게 안정을 줄 가상 세계를 만들어 낸다. 그 안에 포근하게 있다가 문득문득 현실을 보게 될 때면 다시 큰 아픔을 느끼게 되고, 그렇게 또다시 가상세계를 끄집어 내게 된다. 이 반복되는 아픔과 스스로 만들어내는 위안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결정을 내리게 만든다. 어떤 이는 아프디 아픈 현실을 끝내려 결국 죽음을 택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현실의 아픈 부분만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현실 속 그나마 괜찮은 혹은 행복한 부분을 바라봄으로써 가상세계에 대한 의존도를 지워나간다.


그녀도 궁극에는 선택을 하게 될까? 과연 그녀는 어떤 세상을 지우게 될까. 둘 중 하나는 꼭 지워야 하는 것일까? 그녀가 자살시도를 했던 어느 주의 상담시간이 기억난다. 혼잣말할 때면 사람들이 눈빛으로 말한다고 했다. “가상에서 살 거면 현실에서 나가.”라고. 그날 그녀는 현실에서 사라지려 했지만 사라지지 못했고, 가상 세상에서 나오려 했지만 나오지 못했다.


그렇게 그녀는 오늘도 혼잣말을 하고, 나는 그 혼잣말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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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성냥팔이 소녀> 모습이 꼭 이렇지 않을까. 아동청소년상담사의 시각으로 다시 읽은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는 우울증으로 현실의 아픔을 똑바로 볼 수 없어, 자신에게 위안을 주는 가상세계의 사람들과 대화하는 '혼잣말하는 소녀'로 재탄생되었다. 추운 겨울 성냥을 팔러 거리에 내몰린 어린아이의 상황이, 부모의 이혼으로 선택의 여지없이 '가족의 해체'를 경험해야 하는 오늘날 아이들의 모습으로 연상되었고, 혹독한 추위는 이혼가정의 은아 양이 홀로 견뎌내야 했던 우울증처럼 느껴졌다. 하나씩 성냥을 킬 때마다 나타난 환영과 온기는 은아 양이 혼잣말을 통해 열어내던 가상세계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 하나씩 성냥을 켜다가 홀로 얼어 죽어 간 성냥팔이 소녀와 달리, 작가는 은아 양이 혼자 우울증의 추위를 견뎌내는 것이 아닌 누군가와 함께 힘든 여정을 함께 하고 있기에, 자살이 아닌 희망적인 결말로 이어질 수 있다는 열린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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