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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주닝요 Sep 14. 2023

3. 확신의 P, 브라질에서 박살난 그의 완벽한 계획

브라질은 어나더레벨(Another Level)이었다.

지독하게 길고 길었던 이동이 끝나고 드디어 도착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드디어 악명 높은 치안을 자랑하는 그 브라질이구나 하는 생각에 신경을 곤두세운 채 입국장을 나섰다. 이른 아침에 도착한 터라 공항에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분주함이 느껴졌다.


보통 공항에서 시내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편이지만 한시라도 빨리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고 싶은 마음에 우버를 잡기로 하고 먼저 인터넷 유심을 찾아다녔다. 사실 우버를 위해서라기보다도 난생처음 도착한 브라질에서 인터넷 없이 이동을 하는 것은 상상하고 싶지 않은 시나리오였기에 연락 수단이 시급하게 느껴졌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어렵지 않게 공항에서 유심 판매하는 곳을 찾아볼 수 있기에 별 걱정 없이 돌아다녔지만 나의 생각과는 달리 판매처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 정보의 시대에 미리 찾아보고 왔을 법도 하건만 확신의 P에게 그런 것 따윈 없었다.


'무조건 직진! 무계획이 계획이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직원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 영어로 유심 판매처를 물어봤지만 대화가 되지 않았다. 브라질이 영어권 국가는 아니지만 최소한 공항에서는 영어가 통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나의 큰 오판이었다.


핸드폰의 유심 부분을 가리키며 손짓, 발짓을 다 동원하자 그들은 그제서야 내 말을 이해를 한 듯했으나 문제는 내가 그들의 설명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 또한 손짓과 발짓을 사용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으나 차마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을 지을 수 없었던 나는 다 이해했다는 듯 오브리가도(Obrigado, 고맙다는 뜻의 포르투갈어)를 연발하며 후다닥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후 한 시간가량을 정처 없이 돌며 영어로 물어봤으나 모두 실패하고 결국 유심을 판매하는 곳을 찾지 못했다.


확신의 P인 나는 보통 '무작정 부딪쳐보면 해결 못할 것이 없다.'라는 계획을 세우고 여행을 하는 편이나, 애초에 대화가 되지 않으니 부딪치는 것조차가 불가했다. 또 여행의 모든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며 즐기는 편이지만 브라질이라는 나라에서 연락 수단 하나 없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의미 부여하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껏 통하지 않은 적 없던 내 완벽한(?)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밀려오는 허탈감과 무기력감에 멘붕이 와버린 나는 얼른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고, 울며 겨자 먹기로 공항 와이파이를 통해 우버를 잡아 숙소로 향했다. 이동하는 중에 잠시 눈이라도 붙이고 싶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간 채 마치 인터넷이 되는 것 마냥 벽돌과 다름없는 핸드폰을 만지작 거렸다.


숙소에 도착해 드디어 대화가 되는 상대인 집주인 페르난도를 만났다는 반가움도 잠시, 피곤함에 지친 나는 페르난도의 설명을 듣는 듯 마는 듯 흘려버린 채 침대에 누웠다. 평소 여행을 할 때 근거 없이 자신감이 넘치는 터라 걱정이 없는 편이었지만 공항에서부터 망해버린 계획에 '이 나라에서 내가 정말 살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앞섰다. 이런 걱정 때문인지, 곤두선 신경에 각성 상태가 된 것인지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잠이 오지 않아 근무하게 될 곳에 미리 인사를 드리러 가기로 하고 숙소를 나섰다. 숙소에서 도보로 10분 남짓한 거리에 사무실이 위치해있기에 근처에서 점심을 간단하게 해결하기로 하고 식당에 들어섰다.

브라질 식당의 흔한 메뉴판

맙소사! 또 난관에 봉착했다. 깨알 같은 글씨로 수많은 메뉴가 적혀있는 메뉴판에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혹은 유추할 수 있는 메뉴가 보이지 않았다. 관광지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일반 거주지에 위치한 식당 인터라 관광객을 위한 친절이나 배려 따위는 기대할 수 없는 메뉴판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언제 메뉴를 시킬지 곁눈질로 쳐다보는 종업원의 친절한 시선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 짧은 찰나가 한 세월처럼 느껴지던 순간, 한 줄기의 빛처럼 메뉴판에 낯익은 한 가지 메뉴가 보였다. 그것은 바로 햄버거였다. 역시나 만국 공통 햄버거는 어디든 있구나하며 아주 자신 있고 당당하게 외쳤다.


“햄붜걸 플리즈!!“


종업원은 당당함이 묻어 나오는 내 주문에 오히려 당황한 듯, "우 께?(O que? 뭐라고요?)"라고 대답하는데 누가 봐도 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을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순간 또 머릿속이 하얘지며 식당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쏠리는 기분이 들었다.


“햄붜걸! 햄붜거! 햄!버!거!”


나의 발음이 문제였을까? 결국 구수한 한국어 발음까지 동원해 또박또박 몇 번이고 말해봤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다른 테이블에 있는 햄버거를 발견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치자 그제서야 그는 이해를 한 듯 "함불겔? 오케이"라고 하며 자리를 떴다.

겨우 주문에 성공했던 햄버거와 시킨 적 없는 브라질 맥주

함불겔이라니...햄버거가 다른 방식으로 발음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발음이 다르고 조금 이상하더라도 햄버거라는 단어 정도는 남녀노소, 국적 불문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의구심을 제기해 보지 않았던 것에 대해 물음표를 받아본 경험이 있는가? 단순히 생각해 보면 'Hamburger'이라는 단어는 본 발음기호로만 읽는다면 '함불겔'이 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유추해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단어를 직접 들었을 때는 너무 생소해서 내가 아는 그 '햄버거'가 맞는지에 대해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상당수 많은 국가에서 이와 비슷하게 발음하고 있었다.)


얼마지않아 음식이 나온 후에야 내가 제대로 주문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캔 음료가 함께 나왔다. 물론 나는 이게 무엇인지를 물어보거나 환불할 엄두가 전혀 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마시기로 했다. 아무래도 내가 가리킨 테이블에 이 음료도 같이 있었던 모양이다. 마셔보니 그 음료는 다름 아닌 맥주였다. 근무지에 인사하러 가는 마당에 맥주를 마신다는 것은 한국이라면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그림이었겠으나 한 입 마셔보니 도저히 그 시원함을 참을 수 없어 금세 '브라질이니까 괜찮지 않나?'라는 합리화를 시전하며 마셔버렸다.


맥주 한 캔을 다 들이켜고 나서야 한숨 돌리고 다시 한번 완벽했던(?) 내 계획을 되짚어 봤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던 걸까? 항상 무계획에서 오는 우연이나 행운을 기대하는 편이기에 아주 최소한의 준비만을 하고 여행을 하는 편이고 지금껏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는데 뭔가 꼬여도 단단히 꼬여버린 느낌이었다.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아 당황스러웠다기보다는 브라질에 대한 악명을 많이 듣고 왔기에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처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대낮이지만 뭔가 어수선한 느낌이 물씬 나는 것 같은 거리를 그 어떤 연락수단 없이 행운은커녕 불운만 따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걷는다는 사실 자체가 위화감이 들었다. 그 어떤 계획도 세우고 오지 않은 내게 브라질은 소위 말해 '어나더 레벨(Another level)'로 느껴졌다.


확신의 P, 앞으로 나의 브라질 여행기가 아니 생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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