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권-공공재로의 일면
최근 이사 왔습니다. 분당에 살다가, 인천 계양구로 이사 왔습니다. 집 값이 열 배정도는 차이가 납니다. 미금역 근처 대단지 아파트에 살다가, 역세권도 아니고 세대수 260이라 간신히 아파트가 된, 오래된 조그만 아파트로 이사 왔습니다. 낯선 동네 구경을 위해서, 저녁을 먹고 산책 나가곤 합니다. 지금도 계속 산책을 나갑니다.
분당에서는 하지 않던 산책을, 이곳 인천으로 와서 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방향성 없이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은 채로, 그저 거닐 듯. 산책을 합니다. 이곳은 어둡습니다. 가로등이 없는 건 아닌데, 주변에 있는 아파트와 빌라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적어서 그런 듯합니다. 또한, 오래되고 관리되지 않는 거리, 계획 없이 만들어져 삐뚤삐뚤한 거리. 그럼에도 전 왜 이곳에서는 산책을 하는 걸까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리라 함은 재산입니다. 저작권도 재산권의 일종입니다. 권리의 이용을 위해, 돈을 주고받아야 하죠. 사유재산을 형성하고 화폐로서 가치를 매깁니다. 주변에 보이는 모든 걸 화폐로 환산하고 가치를 매기는 게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의 형태, 화폐의 등장으로 인한 사유재산화는 사람들의 인식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한, 불가피합니다. 구체적으로 가치를 따지게 되면서, 사람들은 다소 계산적이게 되어갑니다. 흔히, 삭막하고 정이 없어져 갑니다. 한디디 작가의 '커먼즈란 무엇인가'란 책에서도 비슷하게 이야기합니다.
언젠가, 출판사 편집자들이 모여서 책 추천하는 동영상을 본 적 있습니다. 그분들이 말하기를, 출판사들이 저작권을 명확히 표기하고 주장하면서, 창작자의 창작 활동이 저해받는다는 말을 했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다만, 권리의 주장이 명확해졌다는 겁니다.
언젠가, 지식은 전 세계에서 공유되는 거라 들은 바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가 하면,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대학에서는 국제 논문을 각종 저널로부터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학을 벗어나면 읽을 수 없습니다. 학교가 각 저널의 구독비를 내주기 때문입니다. 결국엔 논문도 돈의 가치로 환산됩니다. 지식도 공공재는 아니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언제나 돈이 들어가고, 돈의 유입은 공공재를 없애는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니 거와 내 거가 명확하고 소유의 경계가 확실해집니다. 이런 사회 변혁의 흐름은 자연스럽고 강력해서 거스를 수 있는 건 아닐 겁니다.
저작권은 발생주의를 따릅니다. 발생주의란, 저작물을 저작자가 만들면 그 순간 저작권이 인정된다는 겁니다. 특허권, 상표권 등 지식재산권이 등록주의를 따르는 것과는 다른 독특한 특징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등록주의가 합리적입니다. 권리 분쟁이 잦기에, 권리의 우선을 명확히 하는 게 분쟁의 해소에 있어서 편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저작권만이 독특하게 발생주의를 따릅니다. 발생주의라는 요소는 저작권의 보호범위와 보호정도에 있어서도 영향을 줍니다. 저작권은 지식재산권보다 약한 처벌규정을 가지며, 보호도 약하고 작습니다. 판례 또한, 그 보호범위를 창작적 가치가 있는 부분에 한정하였습니다.
저작권법은 저작권 제한을 둔 조항이 꽤 많습니다. 23조에서 38조까지 이어지는 내용으로, 도서관에의 이용, 장애인의 이용, 교육목적의 이용, 사적이용 등을 규정하고 있고, 28조와 35조의 5는 일반 조항이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규정 덕분에, 일반 개인들은 사실 저작권을 거의 신경 쓰지 않고도 저작물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교사가 수업에 문학작품을 이용하거나, 개인이 집에서 노래를 듣고 부르거나, 동아리 밴드가 공연에 노래를 커버하는 행위도 다 문제 되지 않습니다. 미술 작품을 사진 찍거나 인터넷에 복사해서 인쇄하는 행위도 다 괜찮습니다. 이들을 이용해서 상업화하거나, 저작자의 명예를 해치지 않는다면 개인은 자유롭게 저작물을 향유할 수 있습니다.
저작권이 가진 특징은 어쩌면, 사회 흐름을 거스르는 걸 지도 모르겠습니다. 발생 주의라는 비합리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고, 보호범위는 창작적 가치라 하여, 추상적이고 불분명합니다. 또한 제한도 상당히 많아서, 개인은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오! 공공재입니다. 저작권은 공공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동체의 사람들이 사회적 약속으로 정해져야만 공공재가 설정됩니다. 공공재를 개인이 재산으로서 탐닉하고 사유재산 화하면, 공동체는 그 개인을 사람으로서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과거, 마을 우물을 누군가 담을 쌓고 소유하려 들었다면, 그 마을 사람들이 그를 가만 두지 않았을 겁니다.
이런 면에서, 저작권이 가진 공공재성은 사회적 합의에 따라 우리 사회가 인정한 겁니다. 사회는 점차 삭막해지고, 소유의 경계는 명확해지고 있지만, 저작권만은 그런 소유 경계가 추상적이고, 자유사용을 권하는 일면을 남겨둠으로써 우리가 공동체의 일원임을 인식시키는 듯 느껴집니다.
세상의 변화를 거스르는 것이 힘들긴 할지라도, 이런 일면을 두고 있다는 것이 다소 따스하게 느껴졌습니다.
다만, 한디디 작가가 ‘커먼즈란 무엇인가’에서 말했듯,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동체는 점차 약화되고 있습니다. 가장 기본 단위라 할 수 있는 가족 공동체도, 과거에 비해 지금은 더욱 좁고 나약합니다. 가족이 없는 존재가 많이 보입니다. 혼자 사는 1인 가구, 수많은 원룸촌, 고독한 사람들. 그들의 죽음.
한디디 작가는 공동체는 한 개인을 지탱하며, 뒤처지는 사람을 지지해 주는 힘이 있다고 합니다. 두레와 향약 같은 공동체는 시기에 따라, 공동체의 힘을 특정인에게 모아주며 재산을 공유하기도 하기도 합니다. 내가 농사가 안되어 먹을 게 없을 땐, 이웃들이 십시일반 해서 음식을 나눠주기도 했었습니다. 공동체가 개인을 지지해 주는 방식입니다.
이런 공동체는 지금에 와서는 마주하기 어렵습니다. 공동체의 약화입니다. 이를 다시 되돌려서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기란 참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 역시도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내는 자연스럽고 강한, 거스를 수 없는 사회 변혁의 방향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남아있는 공동체 의식의 일면을 마주할 때, 따스함이 느껴집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 입구에는 저녁때가 되면, 트럭이 한대 서곤 합니다. 언젠가 산책을 나서는 데, 호떡 파는 트럭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성인 여성, 소위 아주머니 두 분과 중학생쯤 돼 보이는 여학생 두 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주머니 두 분은 호떡을 사서, 여학생들에게 준 듯이 보였습니다. 제가 나오고 있을 때는, 이미 여학생들은 먹고 있었고 아주머니는 흐뭇하게 웃으면서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여학생들은 큰 소리로 감사하다고 인사하고는 발랄하게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그들이 서로를 어떻게 아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들이 가족관계는 아님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호떡을 사주고, 얻어먹고, 감사를 표하고, 흐뭇해하는 그 광경은, 우리가 아직은 잃지 않은 공동체의 일면으로 느껴졌습니다. 따스해졌습니다.
이곳에서 산책을 하다 보면,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공원 한편에 보여있는 모습을 종종 봤습니다. 그들은 기타를 연주하기도 하고, 공 놀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경비원실에 젊은 커플이 들어가 인사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소한 모습들이 조금은 낯설고 정감이 갔다면, 그래서 더 어둡고 오래된 동네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가닿는 따스함 때문에 산책에 나서게 된 거라면, 이는 과한 설명일까요.
이런 일면들이, 저작권이 가졌던 공공재 같은 일면들이 최대한 오래 유지되었으면 합니다. 호떡 하나를 지나가는 이웃 아이에게 베풀 수 있는 여유, 정 같은 걸, 그래도 간직했으면 합니다. 소유의 경계를 흐릿하게 두고 싶습니다. 모든 걸 명확히 구분하는 합리성의 세상에서 불합리함을 유지하고 흐린 눈으로 사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