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달 말에 나 결혼해.”
친구는 조그만 가방에서 청첩장을 꺼내며 말했다. 밀랍으로 봉한 편지지 모양이었다. 어쩐지, 줄 게 있다더니. 그게 결혼 소식이었다. 친구가 건네준 청첩장에만 눈을 고정한 채, 축하의 말을 건넸다.
“축하해. 뭐야. 이제 금방이네? 집은 구했어?”
우리는 초등학교 동창이자, 대학교 동기다.
난 어릴 때부터 소심하고 숫기가 없었다. 친구를 사귀는 데 어려움이 있는 아이였다. 유치원에 갔지만 적응하지 못했고, 결국 그만두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엄마와 집에서만 지냈다. 그런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처음 만난 짝꿍. 그게 이 친구였다. 그 후로 우연히도 초등학교 내내 같은 반이었고, 또 우연히도 내내 짝꿍을 했다. 그렇게 내게 유일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중학교를 다른 곳으로 가게 되면서, 친구와의 연락이 끊겼다가 6년이 지나 대학교에 입학하며, 우린 다시 동기가 되었다. 스무살.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 내던져지는 그 두려움의 순간 앞에서, 신입생 명단에 들어있는 친구의 이름을 발견했을 때 느꼈던 반가움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이렇게 말하면, 20년의 세월을 같이 보낸 불알 친구 같아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본래 친구를 사귀는 데 서툴렀던 난, 20년이 흐른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자주적이고 당당하며 다재다능했던 그 친구는 여전했다. 성격이 달랐고, 성별이 달랐던 우린 사는 세상이 조금 차이가 있었다.
대학 졸업 후엔 친구는 서울로, 나는 인천으로 왔다. 지금 우린 일 년에 3번 정도만 연락하고, 만나서 그동안의 일을 나누며 잔잔하게 회포를 푼다. 나는 이 친구가 좋았다. 약속을 잡으면 괜히 조금 설레곤 했다. 당일이 올 때까지 은근한 두근거림이 있었다. 전날이 되면 어떤 이야기를 할지, 어떤 옷을 입을지를 고민했다. 하고 싶은 말을 마구 쌓아두다가, 생각나는 대로 말하곤 했다.
평소 다른 이들에게는 하지 않는 말들만 골라서, 대화 주제로 삼곤 했다. 이 아이에게만 그런 이야기들을 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죽음, 삶은 무엇인가 같은 철학적인 이야기에서부터, 우울증으로 힘들었던 순간을 털어놓거나, 자해하는 연인을 만났던 이야기 혹은 먼 미래에 예술가로 살고 싶다 같은 허황된 꿈까지. 충격적이거나, 진중하거나, 허황된 이야기들. 가족에게도 꺼내지 않는 주제들이다.
물론, 별것 아닌 이야기도 자주 한다. 혼자 떠났던 여행, 좋았던 책과 영화 아니면 마림바 소리가 좋더라는,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들까지. 그럼에도 이 친구는 언제나 성심성의껏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 순간들이 나는 참 좋았다. 그래서 이 친구가 좋았고, 만남이 설레었다.
내가 이 친구에게만 독특한 주제들을 대화의 소재로 삼을 수 있던 건. 우리의 사이가 멀지도, 가깝지도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가까운 친구, 베스트 프렌드라고 하기엔 교류가 적었고, 먼 친구라고 하기엔 편했다. 20년의 세월이 만들어준 편안함이 있었다. 서로 다른 세상에 사는 듯한 적당한 거리감을 지녔기에, 어디서 털어놓지 못할 고민을, 두려움을 이 친구에게는 자연히 털어놓곤 했었다.
우리는 가깝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우아했고, 서로에게 예의를 지켰다. 그렇지만 멀지도 않았기에,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었다.
이런 우리가 전혀 대화의 소재로 삼지 않던 한 가지가 연애, 사랑이었다. 그녀도, 나도 수 차례의 연애를 각자 했지만, 묻지도 않았고 나도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다. 사랑이란 감정에 대해선 절대 논하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올라온 뒤로는, 전해져 들려오는 소식도 없었기에 그녀가 결혼한다는 건, 결코 예상치 못했다.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지만, 아무렇지 않게 축하를 건넸다. 이어지는 질문들. 예비 신랑과 신혼집, 그리고 여행지까지. 축하와 기쁨이 앞서야 했을 자리에 오묘하고 애매한 기분만이 맴돌았다. 만남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무것도 듣지 않은 채, 어두워진 하늘을 보면서 천천히 걸으면서 곱씹으며 생각했다. 아슬아슬하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유지되던 우리의 관계가, 결혼으로 인해 멀어지지 않을까. 아주 미세한 거리의 변화가, 돌이킬 수 없는 멀어짐이 되는 건 아닐까. 그렇게 내게 너무나도 소중한 이 만남을 더 이상 못하는 건 아닐까. 본능적인 직감. 청첩장을 손에 쥐었을 때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던 감각이 다시 떠올랐다.
어떤 관계는 적당히 멀고, 어중간하게 가까워서 좋다. 딱 이 친구가 그렇다. 이런 관계는 어쩌면, 아예 가까운 친구만큼이나 희귀해서, 소중하다. 20년의 세월 동안, 그래도 유지되어 왔기에 안일하게 생각했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다는 건, 그만큼 애매한 거리에서 선을 타고 있는 것이라서 특정 계기로 돌이킬 수 없이 멀어질 수도 있는 것임을 알아버렸다.
그렇게 난, 일주일이 지나서 그녀에게 전화했다. 난 그녀에게 문자만 보냈을 뿐, 전화를 건 것은 처음이었다. 우리의 사이가 멀어진다면, 그만큼 다가가면 되는 일이었다. 그때 하지 못했던 진심 어린 축하를 전했다. 내가 느낀 감정과 생각을 말했다.
나보다 카리스마 있고 호쾌한 그녀가 털털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시간 많아. 앞으로 계속 볼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