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결혼, 아이-
대학생 인턴을 만나거나 젋은 부부를 만나면 때때로 듣는 말이 비혼과 딩크다.
결혼하지 않겠다와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말.
개인적으로 결혼도 하고 싶고 아이도 낳고 싶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거나 비난할 생각은 없다. 모두 개인의 선택이니까.
다만 ‘비혼주의자’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선언할 필요까지 있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
단지 지금은 결혼 생각이 없다거나, 지금은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다고 말하며 미래는 열어두는 편이 더 맞지 않을까.
아직 대학생에 불과한 친구가 자신을 비혼주의자라 부를 때면, 왜 저렇게까지 단정적으로 말해야 할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최근에 아이 생각이 없다는 친구 부부의 집에 갔다. 술을 살짝씩 마시면서 새벽까지 이어진 대화에서, 그는 이유에 관해서 설명했다. 합리적이고 이해할 수 있는 이유였다. 그가 말하길, 그런 이유로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그 결정은 논리적으로 완벽해서 반박할 수 없다고 했다.
현재 삶이 행복하고, 하고 싶은 게 많아서 아이를 낳아 기르게 되면 잃게 될 기회비용이 눈에 많이 들어오는 것과 아이를 낳아 기르기 힘든 현실적인 이유까지 겹친 그 설명은 일견 타당하다. 그에 비해, 아이를 낳아서 얻을 행복은 추상적이고 불확실한 것이며, 심지어는 아이가 가져올지도 모를 골칫거리는 리스크로서 여겨질 수도 있으니. 그러니까. 단순히 이를 논리적으로 설득하기 어렵다.
물론 난 설득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 개인적 선택이니까. 다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생각을 말할 뿐이었고 단지, 지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뿐. 미래에 생각이 바뀔 가능성에 대해 열어두는 게 어떠냐는 정도. 생각은 언제든지 변하는 거니까.
일련의 이런 대화 속에서, 입 안에 가벼운 쓴맛이 도는 느낌이었는데.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서 말하지 않은 게 있다.
‘커먼즈는 무엇인가’라는 책은 말하길, 자본주의 경제 체제는 인류의 사고방식 자체를 변모시켰다고 했다. 공유지의 비극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식이 되었지만, 그 이전 시대의 인류는 공유지를 조화롭게 유지하며 살아왔다.
어느 순간 인류는 공유지를 잃어버린 건데, 그게 자본주의 체제와 그로 인한 사고방식의 변화 때문이다. 이성적으로 계산하고, 개인의 이익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방식이 삶 전반에 스며들었다. 그런 생각의 변화는 끝나지 않아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런 변화의 큰 부분은 이성적 사고라고, 생각한다. 이성적으로, 계산적으로 그리고 개인주의로서 상황을 해석하고 이해하고 결정한다.
이로서 감성의 영역에 있던 것들마저 이성의 영역으로 끌려 들어왔다.
자연이 무상으로 공급하던 과일, 동물, 물 같은 자연물이 어느 순간 돈을 주고 사야 하는 게 된 것처럼.
향약, 두레 같은 큰 단위의 공동체가 같이 공유물을 이용하던 시대에서, 그런 공동체는 사라지고 도움을 받기 위해선, 돈을 주고 고용해야만 하는 시대다.
세상이 변함에 따라서 이루어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결과지만, ‘정’이라고 하는 비계산적인 따스함을 잃어버린 건 맞는 듯하다.
다시 친구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그의 주장은 논리적 완벽성을 띠고 있었다. 다만 입안에 쓴맛이 남은 이유는, 이것이 과연 논리적 완벽성으로 따져야 할 영역인가 하는 의문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결혼과 출산. 가정을 이루는 행위. 이런 이야기는 감정과 감성의 영역으로 남겨 두고 싶은 건, 세상의 변화를 거스르는 비현실적인 욕심인 걸까.
만약 결혼을 계산적으로 논한다면, 이 결혼이 내게 이득이라서 한다고 하면, 오히려 상대방은 이득이 아니라서 안 하려 하게 되고 결국은 합의가 이루어질 수 없어서 결혼이란 제도는 사라지는 게 아닐까. 그게 작금의 세태로 나타난 건 아닐까.
결혼은 감수성 넘치고, 감정적인 상태로 결정하고 행해야 하는 행위 아닐까. 단지, 지금은 하고 싶지 않더라도, 언젠가 갑자기 ‘이 사람이라면 괜찮아’하며 생각이 들 때, 특별한 이유가 생각나지 않더라도 마음이 끌리기 때문에 하겠다고 결정하는 그런 감성적, 감정적 영역에 두는 게 맞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아이를 낳는다는 결정도. 득과 실을 논하고, 잃을 것과 얻을 것을 나열하고 수치화해서 생각하는 문제가 아니라, 감정적으로 생각해서 판단하는 감성의 영역으로 두는 게 맞지 않을까.
아니, 옳고 그름을 떠나서, 감성의 영역에 그저 두었으면 한다.
한강 작가는 자전 소설에서,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던 생각이 바뀐 계기를 적었다. 남편이 잠시 생각하더니, 세상에 맛있는 게 많다. 여름엔 수박도 달고, 봄에는 참외도 있고, 목마를 땐 물도 달다. 그 말이 너무 단순하고 너무 진실이어서, 작가는 웃음을 터뜨렸고 아이를 낳았다.
이 이야기는, 감수성이 풍부한 소설가의 매우 감성적인 일화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바로 그 포인트다. 딩크족, 아이를 만드는 결정은 순전히 감수성의 영역에 두었으면 하는, 정확히 바로 그 영역이다.
세상의 많은 것이 이성적으로 계산되고 있다.
감성의 영역에 있던 것들이 자꾸 이성의 영역으로 끌려 들어온다.
그리고 나는 친구의 말 속에서 그런 사회 변화의 한 단면을 보았고, 그렇기에 입안에 쓴맛이 남았다.
이성과 감성이 각자의 자리에 머물렀으면 좋겠다.
사랑과 결혼, 그리고 아이를 맞이하는 일만큼은 끝까지 감성의 영역에 남아 있었으면 한다.
아무리 시대의 흐름에 반하는 바람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