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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Sep 22. 2022

할머니의 장례식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픈 마음과는 별개로 장례식에서는 꼭 해야 할 일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부의금 정리. 정리가 늦어지거나 대충 하게 되면 여러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당일에 1차로 정리하는 게 필수라고 한다. 장례식 경험이 많은 친척 어른을 중심으로 부의금 정리 군단이 형성됐다. 단순노동을 좋아하는 나는 가장 앞서 부의금 정리를 시작했다.


부의금 정리에는 최소 3명이 필요하다. 봉투에 있는 금액을 확인하고 봉투에 금액을 적는 사람, 현금을 세고 정리하는 사람, 현금을 꺼낸 봉투에 돈이 남아있지 않은지 다시 체크하는 사람. 우리는 어디서 팀이라도 꾸려서 전문적으로 해 본 사람들처럼 척척 돈 정리를 해나갔다. 현금 다루기에 서툰 사촌동생의 실수로 잠시 혼돈이 있긴 했지만 우린 큰 오차 없이 부의금 정리를 마쳤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큰돈이 모였지만, 각자의 계좌에는 더 큰돈이 있을 거라며 그 부분까지 잘 정리해야 한다는 조언도 들었다. 당연히 상주인 우리 아빠에게 들어온 부의금이 가장 많겠지만 보통은 장례식에서 수고한 가족들에게 수고비 명분으로 일정 부분 돈을 나누기도 한단다. 이 과정에서 다툼이 일어나는 가족들도 많다고 한다.



어제오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지만, 왠지 장례식 마지막 날은 잠들고 싶지 않았다. 다들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전날엔 저마다 쪽잠이라도 자기 위해 자리를 떴던 식구들이 대부분 빈소에 남아있었다. 각자 수다를 떨던 가족들이 어느새 한 곳에 모였다. 입관을 하고 손님맞이를 하며 장례식의 하이라이트를 경험한 가족들과 어제오늘 느낀 마음들을 털어놓았다.


특히 엄마와 막내 고모는 장례 방식에 대한 중요한 의견을 냈고, 그 결과 모두가 만족할 만한 장례식을 치를 수 있게 되었다. 엄마는 며느리 입장인지라 장례 방식에 왈가왈부하기 어려운 입장이었음에도, 할머니의 평안한 장례를 위해 용기를 냈다고 말했다. 막내 고모도 엄마의 그런 용기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장례식을 잘 치를 수 있었다고 감사를 전했다.


부의금 정리를 마친 뒤 어른들끼리 모여 이것저것 회의를 하면서도 큰 잡음이 없었다고 한다. 우리 가족은 돈문제로 얼굴 붉히는 일이 없었고,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서로 억하심정 가질 만큼 사이가 나쁜 관계도 아니었다. 우리에겐 당연한 일이라 몰랐지만 우리는 꽤나 화목한 집안이었다. 장례식 과정을 거치면서 더더욱 느낄 수 있었다. 누구도 상대의 의견에 비난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특별히 원하는 것이 있거나 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발인 과정에서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내가 들고 싶다고 했을 때도, 누구도 반대하거나 한마디 얹지 않았다. 오히려 용기 내서 말한 내가, 할머니가 주신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있는 힘껏 표현했던 내가 기특하다며 고맙다고 말하는 가족들이었다.


대화를 나누다 한 두 명씩 잠이 들었다. 나는 친정집에 오면 항상 할머니 옆에서 잠들었기에 오늘도 할머니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고 싶었다. 할머니의 영정사진과 가까운 곳에서 꾸벅꾸벅 잠이 들었다. 중간중간 일어나 향이 다 꺼지지 않았는지 확인하기도 했다.



할머니의 발인 시간은 오전 7시 반. 장례식 마지막 날의 일정은 전날보다 빠르게 시작되었고 전날보다 더욱 정신이 없었다. 빗줄기와 바람이 제법 강해졌다. 나는 상복을 입고 흰 장갑을 꼈다.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들고 화장장으로 향했다. 나는 운구행렬 가장 앞에 서서 천천히 걸었다. 거센 바람에 혹여나 사진을 떨구지 않게 손가락에 잔뜩 힘을 주었다. 할머니 사진 위로 떨어진 빗방울을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영정사진을 든 채, 할머니의 관이 마지막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가족들과 바라보았다.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화장이 마무리되었다. 보통 여성들의 뼈가 더 약하기 때문에 화장 시간이 더 짧다는 설명을 들었다. 관이 있던 자리에는 큰 조각 몇 개와 가루들이 쌓여있었다. 할머니의 고관절을 지탱하던 쇳조각들도 한편에 있었다. 할머니는 식구들 중에서도 키가 큰 편이었고 힘도 좋은 편이었는데. 결국 인간은 종국에 한 줌 가루가 된다는 사실이 새삼 허망하다. 짧은 시간이 지나고 그것들은 모두 흰 가루가 되었고, 종이에 포장되어 상주인 아빠에게 전해졌다. 아빠는 할머니의 유골을 품에 안더니, 아주 따뜻하다고 말했다. 그 따뜻함은 화장 과정에서 발생한 열인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것이 할머니의 마지막 온기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할머니의 장례식 모든 절차가 끝이 났다. 장례식이 끝난 뒤 가족들은 우리 집에 모여 마지막으로 수고했다는 인사를 나누고, 아기들의 재롱을 감상하다, 식사를 마치고 저마다 집으로 돌아갔다. 일주일 동안 머물기로 한 나와 아기를 제외한 모든 가족들이 떠났다. 북적이던 집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각자 잠이 들었다. 아직 한낮이지만 구름이 가득 끼어 흐릿한 하늘을 배경으로 우리는 두세 시간 까무룩 잠들었다.




그중 내가 가장 먼저 눈을 떴다. 분명 방에 엄마, 아빠, 우리 아기가 자고 있지만 갑자기 형언할 수 없는 외로운 감정이 들었다. 할머니는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나의 주양육자였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질문에 항상 "할머니가 가장 좋다"라고 말하던 나는, 나의 모든 것이 할머니로부터 왔다고 생각했다. 학창 시절 내내 내 별명은 '할미'였다. 하는 행동이나 말투가 할머니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우리 할머니를 직접 본 친구들, 지나가다 만난 동네 어른들은 모두 내가 할머니와 똑 닮았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나를 만들었고 나의 전부였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거야"라고 말하던 나는, 할머니의 죽음 후에도 웃고 있었다. 할머니가 떠난 후에도 나는 대체로 웃으며 지내다 이따금씩 슬픔에 빠질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여전히 곁에 있지만 갑자기 외로워지는 지금처럼, 나는 이렇게 할머니를 잃은 슬픔을 파도처럼 느끼게 될 것이다. 언제 울었냐는 듯 파안대소하다가도, 모든 것을 잃은 사람처럼 멍한 눈으로 할머니를 떠올릴 것이다. 나를 사랑하고, 지지하고, 응원하는 가족들이 내 곁에 여전히 남아있음에도 나는 할머니를 그릴 것이다. 장례식의 모든 절차가 순조로웠고 가족들의 소중함을 온전히 느낀 시간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씩 텅 빈 마음에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느낄 것이다.


할머니는 내게 대체 불가능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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