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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Sep 22. 2022

할머니의 장례식 (2) 채워지지 않는 허기

할머니가 돌아가신, 장례식 첫날은 손님이 별로 없었다. 아빠는 편도 5시간이 넘는 거리를 단숨에 달려온 절친들과 밤새 술을 드셨다. 아빠의 친구들은 내 얼굴을 보고 아빠랑 똑 닮았다고 하며 어렸을 때 이런 일 저런 일이 기억나느냐고 물으셨다.

고모 가족들은 저마다 대화를 나누다 몇몇은 잠시 눈을 붙이러 자리를 떠났고, 빈소에는 고모들만 남았다. 나는 허기진 배를 채울 음식을 찾았다. 컵라면과 막걸리를 들이켜는 내 주변으로 고모들이 모여 앉았다. 고모들은 저마다 시부모님이 얼마나 유난이었는지, 평생 얼마나 당하고 살았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 속에 할머니는 때로는 억척스럽고 때로는 수줍음 많은 모습으로 가끔 등장했다. 그 날밤 나눈 이야기들은 못해도 십여 년 전의, 오래 묵은 이야기들이었다.


고모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조금 듣다 나도 모르게 빈소 한구석에서 잠이 들었다. 그러다 두어 시간 후 어수선한 분위기에 눈을 뜨니 어디선가 나타난 식구들이 가득했다. 고모들은 한숨도 자지 않았다고 한다.

장례식 둘째 날은 입관이라는 중요한 이벤트가 있다. 세수도 못한 상태에서 장례지도사 선생님이 나타나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일러주었다.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시간이니 옷을 잘 차려입고 몇 시까지 준비를 마치라고. 일사불란하게 준비를 마친 가족들이 영안실 앞에 모였다. 슬리퍼 신지 말고 제대로 된 신발을 신으라고 일러주었음에도 정신없는 몇몇은 슬리퍼를 신고 왔다. 얼른 갈아 신고 오라고 했지만 이미 입관 시각이 되어 얼레벌레 입장했다.


장례지도사 선생님은 할머니가 수의를 입고 예쁘게 화장까지 하셨으니 울지 말고 똑바로 얼굴을 보고 마지막 인사를 하라고 했다. 가족들 누구도 할머니와 마지막 인사를 할 준비가 완벽히 되어있지 않았지만 어느새 우리는 마지막 시간을 마주하게 되었다. 천 하나를 걷어내자 멀끔히 정돈된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선생님 말대로였다. 할머니의 모습은 아주 고왔다. 꼭 감은 두 눈은 평안해 보였고 살짝 화장한 얼굴은 생기가 돌았다. 조금 딱딱하고 차가운 것을 제외하면 평소 주무시던 모습과 다르지 않고 오히려 더 건강해 보일 정도였다. 할머니의 얼굴을 보자 눈물이 흘렀다. 울음소리를 낼 겨를도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할머니 주변을 천천히 돌며 각자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몸을 한 번씩 쓸어내렸다. 나는 할머니의 비보를 들은 뒤 차 안에서 할머니에게 마지막으로 전할 말들을 미리 생각해두었다. 할머니, 우리 꼭 다시 만나. 함께해서 행복했어. 고마워, 사랑해. 무수한 말들이 있었지만 정신없이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느라 '다시 만나자'는 말만 겨우 전했다. 나는 좀 더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장례지도사 선생님은 상주인 아빠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전하라고 했다. 그동안 울지 않던 아빠는 울먹이면서도 진심을 꾹꾹 담아내며 말했다. "엄마와 함께한 시간 동안 정말 행복했어. 불효자를 용서해줘. 천국 가서 편하게 지내."


장례지도사 두 분은 정성껏 할머니를 꽁꽁 싸맸다. 우리 모두는 말없이 그 모습을 한참 지켜보았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가족들이 다시 할머니 주변으로 모여 장례지도사 선생님의 구령에 맞춰 할머니를 관으로 모셨다. 그렇게 할머니는 다시 영안실로 모셔졌다. 입관을 끝내고 나와 아빠에게 수고했다고 말하다가 다시 눈물이 터졌다. 서로를 끌어안고 우리는 다시 훌쩍였다.


장례식의 모든 절차가 그렇듯 우리에겐 슬퍼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우리는 눈물을 닦고 다시 빈소로 돌아가 손님을 맞이했다. 한 번 운 뒤 진정하고 나면 한동안은 마음이 괜찮아지는 듯하다. 슬픈 와중에도 배는 고프다. 음식이 술술 들어가지는 않고 온종일 출출한 느낌이다. 밥 한 술 뜨려고 하면 할 일이 생각나고, 잠시 나갔다 돌아오면 밥상이 치워져 있다. 장례식장은 항상 사람이 북적이니 밥상도 빠르게 치워진다. 그럼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내 할 일을 찾아서 하게 된다. 그렇게 덜 채워진 상태로 빈소에 돌아와 손님맞이를 하면 더더욱 출출해진다. 그런 내게 가족들이 초콜릿이며 과자며 하나씩 쥐여주지만, 한 입 먹어볼까 하면 또 손님이 들어온다. 이런 상황에 툴툴대는 내게 사촌언니가 말했다.

"먹을 수 있을 때 재빨리 먹어둬. 너 몸 챙기는 게 우선이야.

근데 네가 배고픈 건 진짜 못 먹어서 그런 것만은 아닐 거야. 아무리 먹어도 텅 빈 마음은 채워지기 힘드니까."


밤이 되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물리적 배를 채우기 위해 언니와 라면을 하나씩 사 왔다. 남은 반찬들과 라면, 막걸리를 들이켰다. 언니가 남긴 라면까지 해치웠지만 역시 내 배는 채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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