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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Sep 22. 2022

할머니의 장례식 (1) 할머니는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한 달 전쯤이다. 친정집에 머무는 동안 할머니의 건강은 눈에 띄게 악화되었고, 내가 떠날 무렵엔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힘들어하셨다. 왠지, 지금이 마지막일 것 같아서 할머니의 주름진 손을 잡고 할머니의 흰머리를 쓰다듬으며 "할머니, 한 달 후에 또 올게, 잘 있어"라고 인사했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따뜻한 손으로 내 손을 덮었다가 떼었다.



다시 할머니를 보러 가기로 했던 한 달이 되기 전, 할머니의 장례를 치렀다. 급격히 건강이 나빠진 할머니는 요양병원에 입원하셨고, 입원한 지 20일이 되던 날 떠나셨다.

주말 아침, 우리 부모님은 요양병원으로부터 할머니의 건강이 나빠졌으니 바로 가족들을 부르라는 연락을 받았다. 친정집에 일주일 정도 머무르며 할머니의 상태를 계속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급하게 짐을 싸는데, 혹시 몰라 어두운 색의 옷도 몇 벌 챙겼다. 남편 차를 타고 친정으로 가는 길은 4시간가량. 도착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았을 때 병원에서 연락이 한 번 더 연락이 왔단다. 남편은 조용히 통화를 듣곤 최대한 빨리 가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10분 후, 엄마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할머니가 떠나셨다고 전했다.



우리 아이는 엉엉 우는 엄마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봤다. 왜 우냐고 묻거나 따라 우는 것 없이,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남편도 아무 말이 없었다. 한 시간이면 되는데, 나 좀 기다려주지. 마지막으로 할머니 얼굴 한 번 더 보고, 하고 싶은 말도 있었는데. 분명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사랑하는 이, 소중한 이를 떠나보내는 마음은 예습이 되지 않는다. 후회가 되는 일이 남은 것도 아니고 할머니와 아낌없이, 있는 힘껏 사랑을 나눈 기억이 가득한데도 슬픈 마음과 눈물은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눈물이 멎고 나니, 아빠가 생각났다. 아빠는 심장질환으로 다음 날 입원과 시술을 앞두고 있었다. 병원에 다녀오는 길 할머니가 위급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당장 오라는 요양병원의 부름에도 당장 갈 수 없던 상황. 병원에서 입원 전 검사를 마치고 돌아가, 요양병원으로 곧장 가서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단다. 마지막으로 잡은 할머니의 손은 이미 차가웠고, 차가운 할머니의 몸을 이리저리 살핀 의사 선생님은 사망 선고를 내렸다. 할머니의 죽음은 이미 몇 분 전이었으나 공식적으로 사망한 시각은 마지막으로 아들을 만난 순간이었다. 아들의 손을 잡고서야 할머니는 이승에서 '죽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 아빠, 엄마, 큰 고모 내외는 장례식장에 있었다. 아빠 얼굴을 보면 바로 울지 않을까 싶었는데 우리는 생각보다 덤덤했다. 장례지도사와 장례 절차를 상의하고 오늘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잘못 입력되어 있는 가족들의 이름을 수정하고, 가족들의 계좌번호를 받아 가족들이 지인에게 알릴 부고 문자를 보냈다. 아빠와 엄마도 부고 문자를 보낼 지인 리스트를 확인하고 연락을 돌렸다. 장례식장에서 가장 넓고 좋은 층이 우리에게 배정됐다. 그날 장례식장 건물에는 우리 외에 아무 사람이 없었다. 서늘하고 조용한 장례식장에서 사무실과 빈소를 오가며 필요한 물품을 정신없이 챙겼다.


멀리 사는 가족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몇 년 만에 가족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했다. 할머니의 장례식으로 인해 모였는데 우리는 웃고 있었다. 야, 얼마만이니. 얼굴 좋네. 오느라 힘들었지.

인사를 나누다 막내 고모와 눈이 마주쳤다. 눈물이 많은 막내 고모는 나를 끌어안고 "네가 가장 수고했다" 말했다.

"내가 뭘. 우리 아빠가 제일 고생했지."

"아니, 할머니가 너를 가장 예뻐하고, 너도 할머니한테 참 잘했잖아."

"응. 할머니가 나 제일 예뻐했지. 그래서 할머니가 나 기다려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 시간만 기다려주면 됐는데.."

울먹이는 막내 고모 품에서 이야기하다 나도 모르게 또 눈물이 터졌다.


한바탕 끌어안고 울던 우리는 다시 다른 가족들을 만나 각자 웃고 각자 들뜬 목소리로 대화했다. 직원이 다가와 상복이 몇 개나 필요한 지 물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을 한 명씩 위아래로 훑으며 사이즈를 말했다. 우리 엄마는 44, 나는 55, 사촌언니는 66, 큰 고모는 88. 88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구시렁대는 큰 고모의 반응에 우리는 모두 다 같이 웃었다.


남자 상주는 팔에 완장을, 여자는 머리에 핀을 꽂는다는 것.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왼쪽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오른쪽에 완장을 차는 것이라 그것만 보고도 누가 돌아가신 건지 파악 가능하다는 것. 유교식으로 장례를 진행하면 빈소에 제사상을 차리고, 기독교식으로 진행하면 꽃으로만 꾸며진다는 것. 입관은 무조건 돌아가신 다음 날 진행하는 것이라 우리 할머니처럼 낮에 돌아가시면 상대적으로 장례식 준비할 시간이 생긴다는 것. 가까운 사람이 돌아가신 건 처음이었기에 새롭게 알게 된 장례 관련 정보가 쉼 없이 머리에 채워졌다.


단아하게 꾸며진 빈소에 들어와 손님을 기다리며 서있자니 갑자기 멍해졌다.

내가 지금 어디 있는 거지?

왜 할머니 사진이 저기에 있는 거지?


그동안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할머니는,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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