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리 Aug 27. 2022

치매 노인의 여생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할머니의 치매가 악화되고 있다.

작년에 처음으로 치매 진단을 받으셨지만 사실 단기 기억상실은 꽤 오래전부터 있었다. 본인의 나이, 계절, 날짜, 시간 어느 것도 제대로 알고 계신 것이 없었다. 내가 언제 집으로 돌아가는지는 하루에도 몇 번씩 묻기도 하셨다. 몇 년이 되니 이마저도 익숙해져서 같은 이야기를 여러 번 해드리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로.


그럼에도 할머니에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은 몇 가지는 되려 본인이 여러 번 말씀하곤 했다. 언니가 몇 년 전 율동 추는 영상을 찍었던 그때 그 노래라든지, 형부와 내 남편의 별명(일식이와 삼식이), 비슷해서 외우기 좋은 언니와 나의 대학 이름과 같은 사소한 기억은 할머니의 뇌리에 제대로 박혀있다. 아빠가 어린 시절 모유를 얼마나 오래 먹었는지, 첫째 고모가 처음으로 할머니에게 손주를 안겨주었을 때 했던 말, 둘째 고모가 본인의 생일을 챙겨주지 않는다고 항변한 사건, 막내 고모가 가난한 형편에 부자들이나 다닌다는 명문대학에 입학해 고생한 일 같은 꽤나 오래된 일도 어제 일처럼 기억하신다.


할머니가 들려준 과거 이야기 중 가장 귀여웠던 것은, 아빠를 임신했을 때 태동이 느껴져 남편을 불러서 만져보게 하면 거짓말처럼 잠잠했다는 이야기다. 몇 번을 들어도 재밌고 사랑스러운 이야기. 그 이야기를 하며 만삭이었던 내 배를 쓰다듬던 할머니의 주름지고 따뜻한 손의 감촉은 지금도 생생하다.


치매가 악화된 지금은 방금 드신 밥도, 알이 크고 여러 개라 겨우 넘긴 약을 드셨다는 사실도 기억을 못 할 정도다. 무엇보다 간병을 맡고 있는 아들과 며느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배변 문제였다. 얼마 전까지는 워커에 의존해 방에 딸린 화장실까지 가는 건 가능한 정도였는데, 항상 타이밍이 늦어서 바지를 모두 적시곤 했다. 지금은 화장실에 갈 기력이 없어 기저귀를 채우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너무 답답하고 덥다며 계속해서 거부하신다. 나이가 먹어도 등이 굽지 않은, 키 크고 건강한 할머니로 지내는 것이 나름의 자부심이었기에 꼼짝도 못 하고 누워만 있으면서 두툼한 기저귀를 차야하는 현실이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대변을 봤다고 이야기해놓고 소변만 본 것은 예삿일이고, 이불까지 대변이 잔뜩 묻기도 하고, 기저귀를 가는 도중 소변이 나오기도 한다. 본인이 기저귀 차고 있다는 사실도 잊을 때가 많아서 지금 소변이 마려우니 어서 화장실로 데려가 달라고 소리치는 일도 허다하다.


악화되어가는 상황 속에서 가장 상태가 안 좋아진 것은 간병인인 엄마와 아빠였다. 몸이 약한 엄마는 본래도 저체중이었던 몸무게에서 3킬로 정도가 더 빠졌다. 다른 장기가 아픈 일은 있어도 배탈이 난 적은 별로 없는데 최근에는 위와 장이 모두 안 좋아졌다. 무얼 먹어도 속이 편치 않으니 원래도 많지 않던 식욕이 더 없어질 판이었다. 아빠 역시 건강한 몸은 아닌데, 매일 밤 30분 간격으로 소리치는 할머니의 수발을 들다 보니 잠 한 숨도 못 잔 상태로 다음 날 아침 출근을 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누군가를 원망하게 되는 상황들, 반복되지만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갈등에 심리적으로 지친 상태가 된 것이 문제였다. 그럼에도 엄마 아빠는 즐거운 자신의 일을 찾고, 이따금씩 쉬면서 손녀들의 영상을 보는 것으로 행복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렇게 애를 써야 버틸 수 있는 삶이니까.


바로 앞 화장실도 제 발로 갈 수 없어 침대에만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하는 할머니의 하루. 기력이 쇠해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누워서 영양 음료를 드시며 기저귀로 배변 처리를 하고, 방금 있던 일조차 기억을 못 하는 할머니의 일상. 눈도 귀도 어두워져 답답한 마음에 아들과 며느리를 부르며 소리를 치면 밤새 지친 얼굴로 달려오는 얼굴들. 이런 치매 노인의 여생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손녀인 내가 딸아이를 데리고 2  친정에 머무는 동안, 할머니는 매일 증손녀의 얼굴을 새로운  바라봤다. 소리 지르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도리어 구연동화처럼 느껴져 재밌었는지, 딸아이는 증조할머니 얼굴만 보면  소리로 까르르 웃곤 했다. 방금 전까지 소리치던 할머니도 어렴풋 증손녀의 웃는 얼굴을 마주하면 이내 따라 웃으셨다.  번을 말했지만 여전히 기억  하는 증손녀의 이름은, 가장 어린 손녀의 이름으로 대체되곤 했다. 그럼에도 할머니와 딸아이는 둘만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제  돌이 되어  하는 말이 없는 우리 아가는 '왕할머니' 부르며 할머니가 드셔야 하는 영양 음료의 빨대를 꺼내 구멍에 꽂은  정확히 할머니 입에 가져다 드리고, 여러 알의 약도 흘리거나 몰래 훔쳐먹지 않고 얌전히 할머니  위에 올려두기도 했다. 그렇게 다가가서는 할머니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며 가만가만 웃는 것이었다.



평생 자녀와 손주들을 길러내며 많은 사랑을 나눴던 할머니는, 구순이 넘은 지금까지 불같은 성정을 지녔음에도 많은 사랑을 돌려받고 있다.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 임계치를 한참 전에 지났음에도 사랑의 마음으로 버텨내는 아들과 며느리. 종종 집에 들르거나 전화를 걸어 말이 통하지 않는 할머니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대화를 이어가는 딸들. 한 달에 한 번씩 증손녀를 대동하며 2박 3일 묵고 가는 손녀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증조할머니에게 다가와 온몸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증손녀들. 그 사랑의 형태가 모두에게 만족스럽거나, 모두를 감동시키지 않더라도 각자에겐 최선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전달되고 있다. 원래 사랑이란 완벽하지도, 완벽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니던가.


어느 날 할머니는 매일 아침 드시던 약을 거부했다. 이걸 먹으면 내가 더 건강해져 오래 살 것이니 먹지 않겠다고. 이렇게 살아서 무얼 하겠냐며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할머니의 말처럼 누군가의 시선엔 혼자 힘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방금 일도 기억 못하고, 가족들을 힘들게만 하는 삶이 존속될 이유가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으로, 할머니의 삶이 끝나야 할 이유가 있을까?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면 일상을 살아갈 수 있다. 계속해서 이야기하면 당장은 잊은 것처럼 보여도 할머니의 어딘가에 '태동 이야기'처럼 새겨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할머니의 일상은 함께 사는 이를 힘들게 하지만 그만큼 할머니가 살아있음으로 해서 느끼는 자녀들의 안정감도 있을 것이다. 자녀들에겐 유일하게 남은 부모이고, 손주들에게는 어린 시절 양육자였으니까. 모두 할머니와 함께한 어린 시절의 추억이 존재하고, 그 추억으로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으니까.


무엇보다 누군가의 인생은 의미가 있어야만 가치 있는 것이 아니다. '죽지 못해 산다'는 말처럼, 우리는 죽지 않았기 때문에 살고 있다. 죽지 않았기 때문에 산다. 살고 있으니까 산다. 누군가를 사랑했던 기억으로 사랑받으면서 살고, 누군가에게 힘이 되었던 만큼 누군가에게 의존하면서 산다. 할머니 삶은 지금 한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90년 평생 쌓아온 세월 속에 있다. 언젠가 닥칠 할머니의 죽음이 마냥 아름답고 고결하진 않겠지만 우리 중 그 누구도 할머니의 삶이 무의미했다고, 무가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할머니의 마지막이 낯선 어느 요양병원의 병실일지라도 할머니의 사랑은 온통 내 곁에 남아있을 테니.



매거진의 이전글 치매 걸린 할머니 옆에 앉아 바라본 풍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