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해봤을 상상. 내 인생이 누군가가 짜놓은 드라마라면? 영화 '트루먼쇼' 놀이. 아침에 일어나 추잡한 얼굴로 하품을 하는 것부터 시작해 허겁지겁 아침 출근을 준비하고, 일과 중에 졸기도 하는 모습, 터덜터덜 집에 돌아와 노래를 부르며 샤워하는 모습까지 전부 누군가가 보고 있다면? 나의 트라우마부터 고난과 극복과정까지 누군가 짜놓은 각본이라면?
나 역시 평범한 상상력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혼자 추잡한 모습으로 있다가도, 누가 나를 지켜보기라도 하는 듯이 멀끔한 척 연기를 해본 적이 있다. '작작하자' 하고 이내 그만 두기는 했지만. 우리 모두 이런 상상을 하면서도 내심 알고 있다.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그런 드라마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걸. 나의 노잼 일상따위 아무도 궁금해하거나 보고 싶지 않아한다는 걸.
'트루먼쇼' 영화가 라떼들의 추억이 되어갈 때 쯤, 유튜브의 부흥으로 '브이로그'가 뜨기 시작했다. 브이로그는 자발적인 트루먼쇼다. 시청자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상상하고 그럴싸한 앵글로 카메라를 셋팅하고 멀끔한 나의 일상을 담아내기 시작한다. 평소와는 다르게 세안밴드를 한 채 세수를 하고 위아래 세트 파자마에 귀여운 양말도 신어본다. 안 먹던 아침 혹은 브런치도 만들어 먹고 느닷없는 스트레칭도 한다. 호텔에서나 봤던 흰 거위털 이불 아래에서 잠들고 일어난다.
우리는 왜 항상 이렇게 어처구니 없이 주인공이 되려 할까? 답은 명쾌하다. 현생에서 내가 '주인공'스럽지 않아서. 나 혼자라도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려고. 주인공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그럴듯한 성공이 없어서. 보는 이들의 속을 시원하게 만들어 줄 사이다가 부족해서. 트루먼의 마지막 인사처럼 아쉬움 하나 없는 결말이 나에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평범한 회사원이 되고 나면, 그리고 아기를 낳고 나면 더더욱 그렇다. 나는 회사에서 고용한 하나의 톱니바퀴에 불과하고 언제든 교체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아기가 생기고 나면 내 인생에서 나보다 중요한 존재가 생길 수도 있음을 알게 된다. 나도 회사원이 되고 아이 엄마가 되고 나니, 내 인생에서 나는 점점 엑스트라로 밀려나는 기분이 들었다.
집에서 하루 종일 있다 보니 드라마를 많이 보게 된다. 나는 드라마를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 지라 어릴 적 재미있게 보았던 사극 '허준'과 '대장금'을 몇 번이고 다시 본다. 나같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닌지 두어개의 채널에서 돌아가며 몇 번씩 재방송을 해준다. 잘 짜여진 드라마이기 때문에 50~60회차에 이르는 이야기 속에 많은 갈등과 해결과정들이 포함되어 있다. 여러번 보다 보면 작디 작은 복선들도 보인다. 예를 들면 요리를 하던 궁녀 장금이가 나중에는 훌륭한 의녀가 되는데, 궁녀 시절부터 훌륭한 의원의 싹이 슬금슬금 보이는 것이다.
허준과 대장금의 삶을 몇 번이나 되새김질 하면서 든 생각이 있다. 내 인생 역시, 드라마다. '트루먼쇼'와 '브이로그'는 허황된 상상이나 허세가 아니다. 내 인생은 드라마가 맞고 누군가 각본을 짜놓고 있다. 내가 내 인생의 작가이자 연출자이고, 주인공이자 조연이고 엑스트라다.
회사 생활하면서 나의 자존감을 한 없이 까내려 갔던 그 아저씨는 이번 회차의 '위기' 설정 구간의 조연이었던 것이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생겨나 갑자기 내 인생의 주연이 된 우리 아기, 아기를 돌보는 동안 나는 잠시 조연이 된다. 내 인생을 더 빛나게 해주기 위해 삽입된, 귀여운 배우가 등장하는 에피소드 구간이다.
나를 배신한 그 친구는 사실 개꿀잼 몰카였던 거야. 그저 내 드라마에서 고구마를 더해주기 위해 잠깐 등장한 감초 배우인 거지.
독야청청 제 갈길을 가는 나는 탄산을 한껏 머금은 주인공이고. 내 인생의 결말은 역대급 사이다일거야.
이게 정신승리든, 자기위로든 상관 없다. 어차피 내가 쓰고 내가 연출하는 내 드라마니까.
이번 회차가 재미 없게 끝나버려도 괜찮다. 다음 회차에서 다시 재밌게 반전을 넣을 예정이니까.
귀여운 아기는 보기만 해도 기분 좋으니까 비중을 늘려주자. 너의 반짝이는 눈을 보면 내가 좀 더 조연을 맡아도 괜찮을 것 같으니.
절정에 이르는 구간에 가면 지금 이 순간이 재밌는 복선으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나는 무신론자이지만, 어떤 종교에서 '이 모든 시련이 신의 뜻'이라는 말이 있듯, 이 모든 순간은 나의 드라마를 재밌게 만들 하나의 요소다.
나만이 시청자인 나의 브이로그는 매일 촬영되고 연출되며 방영된다. 내일도 시청하게 만들, 오늘의 엔딩은 어떻게 끝맺음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