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마지막수업 - 김지수
2022년 2월, 작년 이맘때쯤 한국에서는 이어령 선생님과 관련된 기사가 끊임없이 나왔다. 시대의 지성이 별세했다는 소식에 모든 미디어 매체에서 애도의 물결이 끊이지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어령 선생님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바가 없었다.
나는 우연히 추천받아 읽게 된 대담형식의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아직 나에게는 다소 어려운 책이었다. 이어령선생님의 질문과 대답을 듣고 무릎을 탁 치며 ‘아, 그래! 역시, 인생이란 이런 거지!’하고 백 프로 공감하진 못했다. 오히려 매 페이지를 넘기며 ‘저런 가치관으로 나도 살아가야겠다’는 배움의 시간을 가졌다.
이어령
남자들은 병이 들거나 나이가 들면 추레해지기 마련이지만, 나의 스승은 매주 화요일, 깨끗하게 다려진 터틀넥 스웨터를 입고 목에 ‘확대경’을 걸치고 나를 맞았다.
그를 볼 때마다 나는 활화산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 번도 지적 폭발을 멈추지 않은 활하산 같은 선지자.
그의 저택에서 나는 한 번도 주눅 든 적은 없지만, 선생이 풍기는 위용에 여러 번 숨을 고르곤 했다.
모르겠어. 나는 평생 도전이 필요한 인간이었네. 계속 쓰고 또 쓰고 다시 썼네. 강해서가 아니라 약해서 다시 하는 거라네.
혼돈은 내게 목마름 그 자체야. 호기심이라는 덩어리지. 여기 파면 물이 나올까? 저기 파면 물이 나올까? 즐거운 카오스, 해결되지 않는 갈증이지. ‘대통령이 돼야겠다.’ ‘장관이 돼야겠다.’하는 그런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면 그 우물 앞에서 멈췄겠지. ‘어, 시원하다. 다 됐다.’ 그러고 나면 그다음은 어떻게 살아? 그래서 나는 의도적으로 갈증을 남겨둔다네. 다 채우지 않아.
반면 두레박들은 눈이 반짝반짝해. 좀 까칠하고 불만도 많고 빨리 걷지. 딱 두레박이야. 두레박들은 원하는 거 줘도 금방 딴 거 할 사람들이야. 붙들려고 하면 떠나버려. 지적 보헤미안인 거라. 내가 늘 말하는 우물 파는 사람들이라네. …… 두레박스타일은 한 곳에 안주하지 못하고 직업도 이것저것 여러 가지야. 인생이 변화무쌍해서 ‘나는 왜 이럴까’ 곧잘 후회해도 자살은 안 해. 다음이 또 있으니까.
나는 내가 쓴 희곡이 무대에 올라갈 때는 연기 지도며, 무대감독까지 내가 쫓아가서 해. 내 작품 올라가면 현장에서 죽치고 살았어. 진상이지. ……현장가서 이래라저래라. 참 많이 했네.
노동은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는 거야. 노동에서 벗어나는 걸 쉰다고 하지. 내 일이 나한테는 노는 거였어. 나는 워커홀릭이 아니라 재미에 빠진 인간이었다니까. 허허.
‘이어령’을 검색하면 업적이 끝이 없다. 문화부 장관, 88 올림픽 기획, 한예종 설립에 기여 그리고 끊임없는 창작활동까지! 선생님의 눈부신 성과를 보면 ‘24시간을 혼자 따로 더 선물 받으셨나?’ 싶을 만큼 놀랍다. 어쩌면 일을 향한 열정과 호기심이 선생님 삶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한다.
나도 반짝이는 눈, 정갈한 자세를 유지하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일을 계속하고 싶다. 얼마 전 동료 엔지니어를 만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나의 동료 W는 작년 이 맘 때쯤, 새로운 부서로 발령이 났다. 그 부서는 회사사람들이 기피하는 부서였다. 업무량과 윗선에서 들어오는 압박의 강도가 남달라서 그 부서에서 일을 한다고 하면 회사사람들은 ‘당분간 건강 잘 신경 써.’라는 말을 건네기도 했다.
“일은 어때? 할만해?” 걱정 어린 눈을 담아 나는 질문했다.
“어우, 생각보다 개꿀이야. 나도 처음에는 걱정했는데, 일이 많은 만큼 팀에 똑똑한 사람도 많아서 매 번 새로운 인사이트를 배워. 요즘은 일도 별로 부담 없어.”
내가 받은 대답은 나의 생각을 비껴나갔다. 오히려 일에 대해서 불평했던 내 모습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어쩌면 일에 대한 친구와 이어령 선생님 같은 긍정적인 마음가짐 그 자체가 열정을 일깨워주는 것 같다. 이렇게 깨달았음에도 또 일을 시작할 때 투덜거릴 내 모습이 눈에 선하지만, 재미를 느끼며 일을 하려 애써봐야겠다.
피할 수 없는 죽음
방사능 치료받고 머리털 빠지며 이삼 년 더 산다 해도 정신이 다 헤쳐지면 무슨 소용인가. 그 뒤에 더 산건 ‘그냥’ 산 거야. 죽음을 피해 산 거지. 세 사람 중 한 명은 걸려서 죽는다는 그 위력적인 암 앞에서 ‘누군가는 저렇게도 죽을 수 있구나’하는 그 모습을 남은 시간 동안 보여주려 하네
하이데거가 그랬지. 일상적 존재는 묻혀있는 존재라고. 내가 여러 번 얘기하지 않았나. 덮어 놓고 살지 말라고. 왜냐면 우리 모두 덮어놓고 살거든. 덮어 놓은 것을 들추는 게 철학이고 진리고 예술이야. 그런데 지금 우리 시대가 가장 감쪽같이 덮어놓고 있는 게 무엇일 것 같나? …. 그건 죽음이라네. 모두가 죽네. 나도 자네도
엉엉 소리 내 울고 피눈물을 흘리는 것도 행복이라네. 늙은이는 기막힌 비극 앞에서도 딱 눈물 한 방울이야.
고등학교 윤리시간에 ‘죽음’이라는 키워드를 보면 ‘하이데거!’하며 고민도 없이 객관식 문제를 찍느라 바빴던 내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죽음’을 깊이 있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죽음은 고유하고 대체될 수 없으며 명백한 사실임에도 나는 죽음의 개념이 낯설다. ‘우리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깨닫고 현재의 시간을 더욱 가치 있게 보내야 한다.’는 말을 되새기며 죽음을 피해 사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게 삶의 시간을 흘려보내야지.
종교와 신
고통 없는 죽음이 콜링인 줄 알았나? 아니야. 고통의 극에서 만나는 거라네. 그래서 내가 누누이 이야기했지. 니체가 신을 제일 잘 알았다고 말일세. 신이 없다고 한 놈이 신을 보는 거라네.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작 신을 못 봐.
운명론이라고요? 결국 인간의 행운과 불운은 예정된 프로그램대로 흘러간다는 그 운명론이요?
크게 보면 그렇다네. 그리스 사람들이 운명론자들이었어. 동시에 그들은 합리주의의 극치를 추구했던 사람들이었네. 지금 인간들이 발견한 물리학, 철학, 수학, 천문학, 미학 다 그리스 사람들이 해놓은 걸 기반으로 하고 있지. 그런데 지혜의 끝까지 가본 그 사람들이 운명을 믿었다는 거야. 그 증거가 신탁이야. 신이 맡겨놓은 운명. 지혜 있는 자들은 그 운명을 사랑했네. 운명애. 아모르파티라고 들어봤지? 소크라테스, 플라톤 같은 현자들은 다 신탁을 믿었네. 신탁을 믿고 나아갔기에 지혜자가 됐지.
그렇다면 운명을 아는 자가 지혜자인가요?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의 출발이지. ....... 그가 살펴보니 아테네 사람들이 다 똑똑한 척을 하는 거야. 자기는 모르는 게 너무 많은데. 사람들은 물어보면 다 안다고 하거든. 그때 신탁의 의미를 깨달았지. ‘아, 내가 모른다는 걸 안다는 게 이 사람들보다 똑똑하다는 이야기구나.’ 소크라테스는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지혜라고 봤네. 자신이 무지하다는 걸 아는 자가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 한 사람이었던 거야. ‘나 자신을 알라’ … 지능과 덕으로 최선을 다해도 우리는 다가올 운명을 바꿀 수 없네. 데카르트처럼 모든 것을 회의하면서 끝까지 가도. 이성과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순간과 만나게 돼. 빅데이터가 모든 걸 설명해주지 못해. 합리주의의 끝에는 비합리주의가 있지. 그렇다고 타고난 팔자에 인생을 맡기고 자기 삶의 운전대를 놓겠나? 아니 될 말일세. 그리스에서 말하는 운명론이란. 있는 힘껏 노력하고 지혜를 끌어모아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라는 거야. …... 이걸 이해해야 하네. 인간의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도, 죽을힘을 다해 노력해도 어찌할 수 없는 저편의 세계. Someghing great가 있다는 거야. 지혜자만이 그걸 받아들일 수 있네. Something great를 인정하고 겸허해지는 것은 머나먼 수련의 길이야.
계몽주의를 enlightenment라고 해. 그런데 어둠이 우리를 행복하게 했는지 빛이 우리를 행복하게 했는지는 명쾌하게 결론지을 수는 없어. 중세적 평화가 오늘날 보다 낫다는 사람들도 있거든. 중세에는 근세와 같은 첨예한 갈등, 현대의 테러와 전쟁은 없으니까. 기독교라는 하나의 가치 속에서 살았잖나. 객관적으로 보면 불행했는데 개개인으로 보면 의심 없이 모든 것을 신에게 맡겼으니 순종의 태도로 공포를 이겼지. 세례 받으면 천국 간다고 믿고 평화 속에 산 중세의 인간이 행복한 건지. 눈 뜨고 개인의 자아를 향해서 끝없이 회의하고 투쟁한 대낮의 인간 enlightnment를 지닌 오늘의 우리가 행복한 건지. 나는 아직 모른다네. 다만 자네에게 얘기한 대로 우린 짐승이 아닌 인간이잖아. 주체적 인간으로 인간의 운명을 어떻게 바꿔가느냐. 그 선택지 속에서 폭넓은 사고를 해야 해. 동양 사상만 갖고도 안되고. 서양 사상만 갖고도 안돼. 나도 자네도 포함해서 모든 현대인은 중세와 근세의 역사적 수레바퀴가 지나간 발판의 한복판에 고아처럼 떨어져 있는 거야.
나는 무교다.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친구들과 놀기 위해서 교회로 가곤 했다. 찬송가는 멜로디가 좋아서 불렀을 뿐이다. 아마 중학생 때부터는 교회를 가지 않았다. 찬송가보다는 가요가 좋았고, 친구들은 학교에서도 사귈 수 있어서 점점 교회는 나에게서 멀어졌다. 성인이 되면서도 여전히 무교지만 나는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심리가 궁금했다. 왜 신을 믿을까? 괜히 미술관에 중세 시대 파트만 나오면 나는 빠른 걸음으로 르네상스 섹션으로 넘어갔다. ‘에이, 너무 현실감 없어!’하며 중세 시대 작품을 지나친 내가 놓친 종교의 아름다움은 분명히 있어 보인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궁금하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신이 한 개인에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선생님의 말씀처럼 그 종교를 믿으면서 찾을 수 있는 마음의 평화가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가치인 것 같다.
나만의 자기다움
투표 결과에 만장일치가 많다면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야. 그러면 왜 민주주의를 하나? 왕이 다스리고 신이 통치하면 되는 거지. 민주주의의 평등은 생각하고 말하는 자의 개별성을 인정하는 거라네. 그 사람만의 생각, 그 사람만의 말은 그 사람만의 얼굴이고 지문이야. 용기를 내서 의문을 제기해야 하네. 간곡히 당부하네만, 그대에게 오는 모든 지식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지 말게나.
개미는 있는 것을 먹고, 거미는 얻어걸린 것을 먹지만, 꿀벌은 화분으로 꽃가루를 옮기고 스스로의 힘으로 꿀을 만들어. 개미와 거미는 있는 걸 gathering 하지만, 벌은 화분을 transfer 하는 거야. 그게 창조야.
럭셔리한 삶. 나는 소유로 럭셔리를 판단하지 않아. 가장 부유한 삶은 이야기가 있는 삶이라네. ‘스토리텔링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럭셔리지.
남의 뒤통수만 쫓아다니면서 길 잃지 않은 사람과 혼자 길을 찾다 헤메 본 사람 중 누가 진짜 자기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나.
앙드레 지드가 서른여덟 살에 쓴 단편이 <탕자, 돌아오다>라네. 그걸 읽으며 나는 눈물을 흘렸어. 집 나갔다 돌아온 아들이 아버지에게 차마 못한 말을 어머니에게 고백하지. ‘나는 아버지가 잡아주는 기름진 양보다 가시밭길 헤매다 굶주림 속에 따먹은 썩은 아가베 열매가 더 달았어요.’라고.
허허. 궁극적으로 인간은 타인에 의해 바뀔 수 없다네.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만족할 수밖에 없어. 그게 자족이지. 자족에 이르는 길이 자기다움이야. 남이 이랬다고 화내고 남이 저랬다고 감동해서 그 사람의 제자가 되는 게 아니란 말일세. 남하고 관계없이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경지를 동양에서는 군자라고 해. 군자가 되는 것이 동양인들의 꿈이었지. 스스로 배우고 가르치고, 스스로 알고 깨닫는 자. 홀로 자족할 수밖에 없는자…… 그래서 군자는 필연적으로 외롭지.
바다에 일어나는 파도를 보게. 파도는 아무리 높게 일어나도 항상 수평으로 돌아가지. 아무리 거세도 바다에는 수평이라는 게 있어. 항상 움직이기에 바다는 한 번도 그 수평이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다네. 하지만 파도는 분명 존재해. 나의 죽음도 같은 거야. 끝없이 움직이는 파도였으나, 모두가 평등한 수평으로 돌아간다네. 본 적은 없으나 내 안에 분명히 있어. 내가 돌아갈 곳이니까. 촛불도 마찬가지야. …... 항상 좌우로 흔들려. 파도가 늘 움직이듯 촛불도 흔들린다네. 왜 흔들리겠나? 중심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야. …… 그게 살아있는 것들의 힘이야.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나만의 중심이 있는 스토리텔링이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 책에서 가장 많이 반복된 일관적인 메시지 같다. 항상 흔들리는 파도와 촛불도 결국 중심을 찾아가는 것처럼 흔들림에 낙담하지 않고 나도 내 중심을 믿고 나아가야겠다.
손잡이가 있는 너와 나의 관계, 그리고 그 사이의 엷은 막
배꼽은 내가 타인의 몸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유일한 증거물이지. 지금은 막혀있지만 과거엔 뚫려있었지 않나. 타인의 몸과 내가 하나였다는 것, 이 거대한 우주에서 같은 튜브를 타고 있었다는 것. 배꼽은 그 진실의 흔적이라네.
엄마 없다? 엄마 있네! 어찌 보면 그게 우리 인생의 전부라네.
'엄마 있네’의 확신이 있으면 인생에 바람구멍이 뚫려버리죠. 가장 가까운 타자가 시야에서 사라져도 영영 떠난 게 아니라는 믿음, 그 믿음이 인생에서 얼마나 소중한지, 저는 압니다.
혼밥이 유행이라고들 하는데 그것도 거짓말이야. 먹으면서 찍어 올리면. 그게 혼밥인가? 혼자 밥 먹는 것은 짐승들이나 하는 행위라네. …… 함께 먹는 걸 얼마나 좋아하면 축구에서 상대편이 골을 넣었을 때도 ‘한 골 먹었다’고 하잖아. 그게 실점이고. Lost 인 상황인데도 굳이 ‘먹었다’고 해.
한솥밥을 먹는다는 말에는 엄청난 결속력이 있거든 서양도 마찬가지야. 회사를 company라고 하는데 com이 함께고 pany가 빵이야. 회사라는 말도 결국 한솥밥을 먹는 공동체라는 뜻이야.
타자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게 사랑이고. 그 자리가 윤리의 출발점이라네. 타자를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위해 왜곡해선 안돼. … 안다고 착각할 뿐. 내가 어머니를 아무리 사랑해도 어머니와 나 사이에는 엷은 막이 있어. 절대로 어머니는 내가 될 수 없고 나는 어머니가 될 수 없어. 목숨보다 더 사랑해도 어머니와 나의 고통은 별개라네. 존재와 존재 사이에 처진 엷은 막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위선을 떨지. ‘내가 너일 수 있는 것처럼’
이 컵을 보게. 컵은 컵이고 나는 나지. 달라. 서로 타자야. 그런데 이 컵에 손잡이가 생겨봐. 관계가 생기잖아. 손잡이가 뭔가? 잡으라고 있는 거잖아. 손 내미는 거지. 그러면 손잡이는 컵의 것일까? 나의 것일까?’
서로의 것이죠.
컵에 달렸으니 컵의 것이겠지만, 또 컵만의 것은 아니잖아. ‘나 잡아주세요’라는 신호거든. ‘손잡이 달린 인간으로 사느냐. 손잡이 없는 인간으로 사느냐.’ 그게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어머니는 나한테 그래. …… 속으로 중얼거리는 거야. ‘엄마, 나 이거 해냈어.’
어머니도 남이라는 사실 말일세. 펄펄 끓는 내 이마에 어머니의 차가운 손이 닿는 순간, 뜨거운 이마와 찬 손이 닿는 그 자리에 미세한 벽이 만져졌지. 엷은 막이.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절대 하나의 몸이 될 수 없는 엷은 막을 느껴. Inframince 앵프라맹스라고 아주 미세한 차이야. 모든 사물, 모든 현실에는 그런 엷은 막이 있어. 나한테는 그것을 뚫는 게 영성이라네.
내 딸 민아는 죽기 전에 정말 충만한 시간을 보냈다네. 일 년간 한국에서 내 곁에 가장 오래 머물렀지. 죽음에 맞서지 않고 행복하게 시간을 쓴 거야.
에너미는 안돼. 라이벌이어야지. 라이벌의 어원이 리버야. 강물을 사이에 두고 윗동네 아랫동네가 서로 사이가 나빠. 그런데도 같은 물을 먹잖아. 그 물이 마르고 독이 있으면 동네 사람이 다 죽으니, 미워도 협력을 해. 에너미는 상대가 죽어야 내가 살지만, 라이벌은 상대를 죽이면 나도 죽어. 상대가 있어야 내가 발전하지. 같이 있는 거야.
그런 사람이 바로 21세기의 리더고 인재라네. 어느 조직이든 이쪽과 저쪽 사이를 좋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조직은 망하지 않아.
최근에는 가족들과 서로 오해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고 했어. 딸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내고 나니 가장 아쉬운 게 뭔 줄 아나? 살아있을 때 그 말을 해줄걸’이야. …… 지금도 보면 눈물이 핑 도는 것은 죽음이나 슬픔이 아니라네. 그때 그 말을 못 한 거야.
그래서 너희들도 아버지한테 ‘이 말은 꼭 해야지’ 싶은 게 있다면 빨리해라. 지금 해야지 죽고 나서 그 말이 생각나면, 자꾸 울어.
세상에서 딱 떨어지는 것이 없는 가장 미묘한 것이 바로 내가 아끼는 사람들과의 관계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도 다른 사람에게 손잡이를 내어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없이 손잡이를 내어주되 그 관계가 친밀할수록 ‘우리는 엷은 막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는 말씀도 기억에 남는다. 결국에 우리 모두는 남이니까 엷은 막의 경계를 함부로 넘지 말고 더 다정하게 서로를 대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작고 아름다운 것들
지우개로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것들이 있지. 작고 아름다운 것들. 요즘엔 그런 것들로 공백을 채워나가고 있어. 세 줄로 된 글. 3행시라고나 할까. 가령 사람이 발톱을 깎는 모습을 상상해 보게. 청승맞아 보이지? …. 그런 내 모습을 내가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애틋해. 어느 날 엄지발톱을 깎다 보니 새끼발톱이 보이더라고. 80년 가까이 존재 감 없이 제일 고생한 놈. 너 거기 있었구나.
이상하게 나는 책에서 이 구절이 너무 기억에 남는다. 괜히 누군가 발톱을 깎는 모습을 상상하니 그 사람이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불공평한 이 세상에서의 운
결정된 운이 7이라면 내 몫의 3이 있네. 그 3이 바로 자유의지야. …… 아버지 집에서 지냈으면 편하게 살았을 텐데. 굳이 집을 떠나 고생하고 돌아온 탕자처럼 …… 어차피 집으로 돌아올 운명일지라도. 떠나기 전의 탕자와 돌아온 후의 탕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네. 그렇게 제 몸을 던져 깨달아야 잘났거나 못났거나 진짜 자기가 되는 거지. 알겠나?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수만 가지 희비극을 다 겪어야 만족하는 존재라네.
‘모든 것이 정해진 운명’이라고 해버리면 패자는 변명거리가 생겨. ‘내가 지는 건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운이 없어서’라고. …… 그런데 인생의 마디마다 자기가 책임지지 않고 운명에 책임을 전가하는 건 고약한 버릇이라네. …… 인간이 노력할 수 있는 세계에 운을 끌어들이면 안 돼. 세상은 대체로 실력대로 가고 있어. 그래서 나는 금수저 흙수저 논쟁을 좋아하지 않아. ‘노력해 봐야 소용없다’는 자조를 경계해야 하네.
나는 나의 성과들이 노력으로만 이뤄냈다고 오만하게 생각했던 시절이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생겼다. 면접에 떨어지면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 노력만으로 답이 되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내 노력이 부족해서 떨어졌을까? 가끔, 그 회사의 채용 분위기, 당장 필요한 스킬 셋, 컬쳐핏등에 따라 면접의 당락이 결정된다. 그냥 선생님 말씀처럼 그 운의 기운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그 운이 나에게 다가오길 기다리며 이 불공평한 세상에서 많이 시도하고 순간순간에 책임을 지며 살아야겠다.
의심하고 질문하자
그래서 유한한 인생을 사는 우리는 질문해야 하네.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건 무엇인가?
그렇지. 내가 어릴 때부터 남들과 다른 점이 바로 그거였어. 한 번 문제를 붙들면 풀릴 때까지 놓지 않았지.
미국엔 진화론도 지동설도 믿지 않는 사람이 아직도 4천만 명이나 돼. 그래도 사는 데는 문제가 없어. 왠지 아나?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는 데 수학적 진실. 과학적 진실. 삶의 진실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야. 그걸 알아야 하네. 그런데 어릴 때 야단맞을까 두려워 딴소리 안 하고 고분고분 둥글둥글하게 살면 무엇이 진실인지 모르고 살게 돼. 안타까운 일이네.
그럼. 모르는 시간을 음미하는 거야. (활짝 웃으며) 모르는 게 너무 많거든
모르는 게 남아있어서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물론이야. 여섯 살 때부터 질문을 시작한 이래. 나는 타인과는 내내 껄끄럽고 소외되고 외로웠다네. …… 다르게 산다는 건 외로운 거네. 그 외로움이 사회생활에 불리하지만. 그런 자발적 유폐 속에 시가 나오고 창조가 나오고 정의가 나오는 거지.
나는 대학생 때부터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 않겠어’하는 똥고집이 있었다. 의외로 질문할 거리가 생겨서 교수님에게 질문하려고 질문을 정리하다 보면 어느 정도 내 선에서 답을 찾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사회생활의 많은 일들은 정답을 혼자서는 찾을 수 없었다. 동료의 도움이 있어야 해결이 되는 신입시절, 나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는 선배가 있었다. 일 년 차 때 그분을 내심 미워했던 기억이 있다. 회의실만 가면 긴장상태였고 전날 밤부터 코드를 다시 보고 장표를 몇 번이고 체크했다. 정말 사소한 것부터 질문하셨다.
변수명이 그런 이유가 있어?
그 함수는 내부적으로 다수의 기능이 있는데 왜 분리안 했어?
왜? 왜? 왜?
답변을 똑 부러지게 했을 리가 없던 나는 질문을 다소 공격적이라고 받아들였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하며 푸념을 하며 힘들어했는데 이젠 그 선배를 생각하면 고마울 뿐이다. 나는 업무를 하면서 ‘왜?’를 꼭 생각하려 노력한다.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생각해 보는 것은 분명히 어렵지만 의심 속에 새로운 답이 있다. 일뿐만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나는 의심해야 한다. 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변화
밤 사이 내린 눈은 왜 그렇게 경이로울까요?
변화잖아. 하룻밤 사이에 돌연 풍경이 바뀌어버린 거야. 우리가 외국 갔을 때 왜 가슴이 뛰지? 비행기 타고 몇 시간 날아왔더니 다른 세상이 된 거야. …비에는 경이가 없어. 그런데 눈은? 고요하지. 고요한데 힘이 세. 그거 아나? 서양사람들은 눈을 소리로 표현하라고 하면 빗자루로 쓰는 소리를 내. 한국사람은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고 하거든. 소리가 없어도 ‘펑펑’이라고 표현하는 거야. 얼마나 낭만적인가.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게 인간사인데 ‘예스’와 ‘노우’만으로 세상을 판단하거든 메이비를 허용해야 하네. 메이비가 가장 아름답다고 포크너가 그랬잖아. 메이비 덕분에 우리는 오늘을 살고 내일을 기다리는 거야.
예술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나에게 딱 5분을 줬어. 그게 한예종 탄생 5분의 비사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물었지. …… 천재가 있으면 특별교육시켜야 해요. 특권이 아니에요. …... 예술가들은 그 재능 빼면 세상 못살아요. 아무것도 못해서 범죄자 돼요. 그러니 자비를 베풀라는 말이에요. 학교를 만들어주는 게 자비에요.
예술가의 마지막은 쓰레기통이라는 거지. 사라져야 해. 그것을 화랑에 들이고 박물관에 진열하고 경매하고, 그건 상품이지.
상처
사람들이 필록테테스를 왜 버렸나?
상처 때문에 버렸죠
그거야! 상처 때문에 버렸지만 상처를 가진 자가 활도 가지고 있는 거라네.
결국 필록테테스는 자기를 버린 민족과 동지를 용서하고 그 섬을 떠나 활과 함께 트로이 전쟁터로 간다네
다양성
추방하고 격리하는 사회는 위험한 사회야. 반대로 상처와 활을 동시에 가질 수 있는 사회. 그게 창조적인 사회고 희망이 있는 사회라고 나는 말하는 걸세. …… 민주주의의 표본이지만 또 선거할 때마다 가장 ‘꼴통짓’을 하는 게 미국이야. 그러나 그게 미국의 힘이고 희망이라네. 일사불란하게 투표하고 통제하는 사람들은 지금 미국보고 엉망이라고 하는데, 괜한 걱정이야. 그 ‘엉망진창’이 어마어마한 힘이네.
다양성의 힘이겠죠. 카오스를 허용한 사회의 에너지일 테 고요.
그게 상처의 에너지야. 반면 통제사회, 무균사회는 상처를 포용할 힘이 없어. 너의 치유와 나의 치유를 나눌 수 있는 타자가 없어. 내가 없어. 전부 낯선 타자뿐이네. 이걸 정치적으로 보면 안 돼. 사회적 병폐, 악, 우리가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그것까지도 ‘끌어안는 것’, 그게 추위를 느끼는 거야. 추위를 함께 느껴야 한다네. 추위 속에서 타자와 내가 하나 될 수 있는 거라고.
그들처럼 제너럴 리스트가 돼야 해요. …… 그렇게 인간과 학문의 전체를 보려고 했던 르네상스맨이 다빈치와 괴테였어요. 그런데 제너럴리스트들은 종종 욕을 먹어. ‘전공이 뭐냐’는 거죠. 허허.
미국으로 출장을 간 적이 한 번 있다. 당시 행사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는 오전에 있었던 키노트 연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회사의 기술에 대해서 홍보하고 왜 이 기술이 중요한지 어필했다. 나는 인상 깊었던 이 행사를 멀리서 사진을 찍으며 감탄하며 봤다. 카메라로 찍었던 사진을 찬찬히 집에서 돌이켜봤을 때, 나는 놀랐다. 행사진행자는 백인 여성, 첫 발표자는 아시안 남성과 중동출신 여성이었다. 그다음 연설자는 흑인 여성이었고 남미 남성이 뒤이어 나왔다. 계속해서 사진을 넘겨볼 때마다 인종과 성별이 한 번도 겹치지 않는 것에 나는 좀 놀랐다. 행사 관계자들의 의도였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미국인이 자부심을 느끼는 ‘다양성’이라는 가치에 그저 놀라며 박수를 쳤다. 이런 무대들은 누군가에게 ‘저기에 나랑 닮은 사람이 있고 나도 one of them이 당연히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줄 수 있다. 적어도 나에게 그런 희망이 생겼다. 혼란스럽고 융합하기 어렵지만 ‘다양성’의 가치는 피할 수 없다. 선생님의 말씀은 나의 편협한 생각을 향해 따끔하게 조언해 주신다. 우리가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것까지도 끌어안으며 그것을 인정해야 진정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
내 것인 줄 알았으나 받은 모든 것이 선물이더라
암 선고받기 이전의 선생님과 이후의 선생님도 그런 과정을 거치셨나요?
나도 마찬가지네. 이전의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내가 되었지. 어떻게 이렇게 태연하고 관대해질 수 있을까 시어. 뒤늦게 생의 진실을 깨닫게 된다네. 모든 게 선물이었다는 걸. 마이라이프는 기프트였다는 목사님 같은 소리가 아니야. 내 집고 자녀도 내 책도 내 지성도……. 분명히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다 기프트였어. 내가 벌어서 내 돈으로 산 것이 아니었어. 우주에서 선물로 받은 이 생명처럼, 내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더라고.
돈
인간이 발견한 것 가운데 가장 기가 막힌 것이 돈이라네. 인간은 절대 혼자 살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교환을 하며 살아가지. 우리가 숨을 쉬는 것도 식물과의 교환이야. 우리는 탄소를 내뱉고 식물은 산소를 내뱉지. 모든 생명가치는 교환인데. 핵심은 세 가지야. 첫 번째는 피의 교환이라네. 그게 사랑이고 섹스지. 사랑은 생식이라는 목적을 벗어나지 않아. 교환가치가 없다면 인종은 멸종되겠지. 그다음은 언어교환. 그리고 돈의 교환이라네. 돈의 교환을 통해 생산과 쇠와 시장이 만들어지는 거지. 세상이 복잡해 보여도 피, 언어, 돈 이 세 가지가 교환 기축을 이루며 돌아가고 있어. … 그렇다면 돈이란 무엇인가? 아주 간단해. 내가 돈의 주인이 되면 돈은 나의 최고의 협력자고, 하인이 되면 나는 최악의 인간이 되는 걸세.
사랑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고 성내지 않는 것이며…… 불구덩이에 뛰어들어갈 용기가 있어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불현듯 ‘별들의 오해’라는 말을 썼다. 우리는 몇 십만 광년 걸려 지구에 도달한 별 빛을 보고 있지만, 이미 그 별은 사라진 별일 거라고 너와 나 사이에 있는 사랑, 믿음, 미움……그 마음을 내가 느꼈을 법한 순간에 이미 네 마음은 그보다 먼 데 가버리고 없는지도 모른다고. 너와 나라는 별은 이미 마음이 지나간 길, 식어버린 빛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하나
지금의 한국 사회는 어떻게 흘러갈까요? 미래를 낙관할 수 있습니까?
지금은 밀물의 시대에서 썰물의 시대로 가고 있어요. 이 시대가 좋든 싫든, 한국인은 지금 대단히 자유롭고 풍요하게 살고 있지요. 만조라고 할까요. 그런데 역사는 썰물과 밀물을 반복해요. 세계는 지금 전부 썰물 때지만, 썰물이라고 절망해서도 안 됩니다. 갯벌이 생기니까요.
나는 10년 뒤 이 책을 다시 읽고 싶다. 좀 더 어른이 되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