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장으로 가득한 인간 조건, 시간의 해부학
『타타르인의 사막(문학동네/한리나 옮김/1940)』은 환상 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며 보르헤스, 쿳시 등 대가들의 찬사를 받은 디노 부차티의 국내 초역 장편이다. 글쓰기 이외에도 그림, 무대 디자인 등 여러 방면에서 다재다능함을 증명했던 그는 스스로를 “기자와 작가를 취미로 하는 화가”라고 일컫는데 시선을 뗄 수 없는 표지의 삽화 역시 부차티의 작품이다. 중국어판과 영어, 프랑스 판의 표지 역시 요새를 내세우지만 부차티의 그림은 무척이나 매혹적이다.
“장교로 임명된 조반니 드로고가 도시를 떠나 그의 첫 부임지인 바스티아니 요새로 향한 것은, 9월 어느 아침이었다.(7p)”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타타르인의 사막”은 도시를 떠나며 드로고가 ‘떠나야’ 했던 것들, ‘요새로 향하며’ 의심과 열망을 비롯한 감정의 격동과 동시에 그가 겪어낸 것들과 매번 같은 얼굴이지만 현격히 멀어져 가는 ‘9월 어느 아침들’에 대한 이야기다. 물론 9월의 어느 아침들은 하루의 어느 때, 사계절의 어느 시기로건 대체될 수 있다. 그리고 요새로 가는 길에 들은 말들, “요새라니요?”, “무슨 요새 말입니까?(11p)”에서는 ‘이제 시작이군!’하는 혼잣말을 내뱉게 한다. 부차티가 도스토옙스키와 카프카의 문학에서 영감을 받아왔다는 해설의 소개처럼 도입부에서 또렷이 연상되는 장면들이 있다. 바로 요새를 찾아가는 드로고의 여정이 카프카의 “성”에서 성을 찾아가는 토지측량사 K나 알바로 무티스의 작품에서 제제소를 찾아가는 마크롤 가비에로와 겹쳐 보인다.
요새에 들어섰으나 드로고의 마음은 불편하다. 지금 돌아가고 싶다, 당장 돌아가겠다고 말하나 ‘절차’ 때문에 ‘적어도 이 주 정도’는 걸린다는 답을 듣는다. ‘이 주의 유예’는 “중위가 여기서 넉 달을 머무른다면 최선의 해결책이 될 겁니다.(34P)”라는 말로써 넉 달로 연기되고 보이지 않는 올가미는 마련된다. “그리고 바로 이날 밤-오, 그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잠 같은 건 달아나버렸을 것이다-바로 이날 밤, 그에게서 시간의 돌이킬 수 없는 도주가 시작되었다. (60P)” ‘시간의 돌이킬 수 없는 도주’라니! 한참을 이 문장에 빠져있다.
‘시간’을 말하는 작품들은 주저없이 선택하고 아끼게 되는데 “타타르인의 사막”은 ‘시간의 해부도’라 볼 만큼 시간이 간직하고 있는 거의 모든 ‘결’, 드러나 있거나 숨겨진 비밀들을 끌어내 펼쳐보인다. 문장까지 아름답고 처연하게, 반박할 수 없는 논리로 ‘시간’을 그려내기에 읽는 내내 허망함과 긴장, 슬픔과 후회, 무엇도 담보할 수 없는 미미하고 소모적인 인간 조건인 노력 또는 노오력에 부대낄 수 밖에 없었다. 드로고가 겪는 감정들과 때로 전면에 드러나는 두려움은 곧 나의 것이고, 매마른 땅을 바라보는 눈은 그가 아닌 독자의 것이라는 사실에 “더 늦기 전에 도망쳐, 드로고! 지금 속고 있는 거야!” 그를 흔들고 싶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무엇으로부터?’ 라 묻게 된다. 요새로부터, 사막과 타타르인의 전설로부터, 환영이나 망상으로부터,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허울뿐인 자부심으로부터, 머리를 쓰고 너를 속이며 가장무도회를 끝내지 않는 악한 동료들로부터! 그러나 결국 ‘시간’으로부터, ‘삶’으로부터에 이르자 도망치는 것은 그 무엇도 고칠 수 없음을, 우린 결코 도망칠 수 없음을 깨닫고 만다. “좋은 것은 뒤에, 아주 뒤에 있는데, 그가 모른 채 그 앞을 지나쳐버렸다고. 오, 되돌아가기에는 이제 너무 늦었고, 뒤에서는 그를 쫓아오는 무리의 웅성거림이 점점 크게 들려온다. 하지만 텅 빈 하얀 길 위에서, 그들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63P)” 모른채 지나가 버렸던 그 많은 것들,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 그저 스쳐버렸던 그 많은 것들을 그려본다.
“그들의 행운과 모험, 그리고 적어도 각자가 한 번쯤은 경험할 기적같은 시간이, 저 북쪽 사막으로부터 올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불분명해지는 이 막막한 우연을 위해, 군인들은 인생의 전성기를 요새에서 소모하고 있었던 것이다.(71P)” 다른 선택은 불가능했을까 물었을 때 ‘이미 너무 늦었다’고, 또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하는 변명이 따른다. 시간은 드로고를 비롯한 사람들을 길들이고 익숙한 습관은 무감각한 일상으로 안락함을 선사한다. 실존과는 거리가 먼, 그 순간에도 시간은 무서운 속도로 도피하고 있음을 감추는 안락함이다. “한편, 책상 맞은편의 시계추는 계속해서 삶을 바스러뜨리고 있었다. (141P)”
초현실적으로 열악한 상황에서도 비열하고 이기적인 본성에 충실한 모략과 갈등은 너무도 현실적이다. 인간의 여러 유형이 단순하기에 더 웅장한 서사 아래 경고하듯 흔적을 남긴다. 마치 내일이라는 시간이 있을 것처럼 “내일 해야 할 일······(167P)”을 마지막 말로 남기는 앙구스티나는 어리석은 것인가, 애처로운 것인가, 누구나 그럴 것인가. “그때로부터 사 년이 지났다. 인생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시간이었다. 수많은 희망이 옳았음을 보여줄 만한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루하루의 나날들은 쏜살같이 지나갔다.(173P)” 작품 속 시간의 흐름은 귓전에 초침이 울리듯 점점 압박감을 더해가고 꽤 실제적으로 감각된다.
미처 자각할 틈도 없이 우리가 맞을 마지막 시간. “드로고는 삶의 중요한 일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는 환상을 놓지 않는다. 그는 결코 오지 않은 자기의 때를 인내심 있게 기다린다. 미래가 끔찍할 정도로 짧다는 생각, 다가올 시간이 무한하며 아무 거리낌 없이 낭비해도 되는 무궁무진한 부유함처럼 여겨졌던 옛 시절이 더는 아니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241P)” 새로 부임해 오는 중위를 우연히 만나는 드로고는 오래전 기억속에 생생한 그날을 떠올린다. 계속해서 또 다른 조반니 드로고들은 요새에 도착할 것이고 떠날 것인지, 어떤 교훈도 약속도 없이, 마치 시지프스처럼! 드로고가 마지막 적, 북쪽의 이민족 타타르인이 아닌 인류 공동의 적을 만나는 마지막 장면들은 가슴아픈 여운을 남긴다.
군에서는 이 년이라는 시간은 사회 경력상 사 년에 해당한다고(18P) 유혹적인 조건을 내놓기도 하면서 속도를 가늠할 수 없는 물리적인 시간 크로노스에 견주어 퇴색되지 않을 의미로 남을 수 있는 시간인 카이로스가 떠오르기도 했다. 익숙한 습관이 주는 편안함을 경계하기 위해 깨어있는 의식을 경주할 것, 그와 같은 나의 익숙함의 고리는 무엇일까도 되새겨본다. 때론 장편의 연작시같고 꿈속 장면에서는 동화 같기도 해서 하나의 소설 안에서 다채로운 감동을 경험했다.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가 이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나온 만큼 다음 독서로 이어질 수도 있겠고, 무엇보다 부차티의 단편집 “60개 이야기”가 출간을 앞두고 있다니 설레인다. 기다리는 동안 발레리오 주를리니 감독의 영화로, 그 안에서 엔니오 모리꼬네의 주제 음악으로 맥박에 맞춰 심장이 뚝뚝 떨어지는 것같은 작품 “타타르인의 사막”을 감상하며 기억하려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물론 재독이겠지만. 어쩌면 발췌와 필사도 필요한 “새겨야 할” 명작이다.
<20210321 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