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엄마의 기도에 빼앗겼다.
며칠 전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내용인즉슨 돌아가신 지 6년 된 아버지 앞으로 된 몇 천만 원짜리 빚 독촉장이 날아왔다는 것이다.
다행히 적지 않은 돈을 주고 변호사를 선임해 빈틈없이 한정승인 처리를 해 놓은 덕에 해결하는데 돈이 들어갈 염려는 없지만 그래도 판결문을 다시 찾아 캐피털 업체로 송부하고 담당자와 통화를 하고.. 하는 일들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것만으로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또 엄마 모르게 몰래 만들어 놓은 도박빚이 죽은 지 6년 만에 드러난 것이다. 이미 돌아가신 아빠는 본인의 과오는 알 길이 없겠지만 남아있는 가족들에게는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주었다. 가족들에게 스트레스를 남겨주었다는 걸 알았다한들 양심의 가책이나 느끼겠냐만은..
현실은 드라마와 다르다. 세상을 살아갈 지혜가 담긴 한마디, 눈을 마주치며 대화했던 기억, 어려울 때 용기를 북돋아 주던 어른의 모습 따위는 없다. 현실에는 몰래 만든 도박빚만 자꾸 나타난다.
엄마는 미안하다 했다. 좋은 일로 연락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했다.
실제로 엄마는 좋은 일로 연락한 적이 거의 없다.
한 번은 다그치기도 했다. 엄마는 왜 속상한 일이 있을 때, 돈이 필요할 때, 기댈 일이 있을 때만 나를 찾아?
그 후로도 좋은 일로 연락한 적은 없지만 속상한 일, 돈이 필요한 일, 기댈 일이 있을 때 연락하고 나서는 반드시 좋은 일로 연락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비꼬듯이 말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아무튼 그렇게 시작된 엄마와의 통화는 한 시간이 넘도록 이어졌다. 아빠의 빚이야기부터 명절 때 쏘아붙이고 간 누나에 대한 이야기, 어렸을 때 살면서 저질렀던 실수들에 대한 변명, 하루가 멀다 하고 아빠와 다툴 수밖에 없었던 이유.. 변명.. 그리고 주님 곁으로 제발 돌아오라는 마지막까지. 모든 코스를 지나왔다.
그렇게 살다가 떠나버린 아빠가 지금 혼자서 천국에서 잘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더 속상하다 했고 주님한테 아빠 좀 혼내주라고 기도하겠노라고 했다.
그렇게 엄마랑 통화를 한번 하고 나면 나는 무너진다. 반드시 무너진다. 며칠 간 아무런 의지도 생기지 않고 에너지가 고갈되어 좀비가 된 채로 며칠을 살아가야 한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빠를 싫어했지만 엄마는 아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엄마를 많이 사랑했다. 아빠의 성격을 닮은 누나는 무뚝뚝하고 차가웠으나 엄마의 성격을 닮은 나는 살갑고 유머스럽고 따뜻했다. 그 덕에 엄마와 나는 이야기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나는 그런 엄마를 가여워하는 한편 많이 사랑했고 엄마 마음에 드는 아이가 되려고 많이 노력했다.
하지만 엄마가 변했다. 기도를 시작하면서 엄마의 세상에 기도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엄마의 신앙생활
엄마는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때쯤?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계기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겨우 일요일에 한두 시간 출석하기 시작한 엄마는 그 무렵쯤 한국 교회의 여기저기서 벌어지던 부흥회에 다녀온 이후로는 점점 범위를 넓혀가기 시작했다. 일요일에는 오전, 오후 예배에 모두 참석하고 수요일에는 수요 예배 금요일에는 구역예배, 금요 철야 예배에 모두 참석했다. 정도가 과한 것 같지만 여기까지는 괜찮다. 실제로 이 정도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주변에 생각보다 많다.
엄마의 신앙생활은 중학교 어느 여자 목사를 만나고 나서 완전히 다른 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한다. 그 목사는 본인이 하나님과 대화를 하고 하나님이 자기 입을 빌려 직접 말한다고 하는 목사였다. 그 목사는 엄마의 비루하고 가난한 삶이 엄마의 잘못된 신앙생활 때문이라고 다그쳤다. 지금부터 엄마가 기도로 우리 가정을 책임지지 않으면 아빠는 평생 가난한 노동자로 살 것이고 나는 난봉꾼이 된다고 했다. (누나에게도 무언가 저주의 말을 했었는데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의 나는 중학교 2학년 즈음 되었다. 그러니까 중학교 2학년 된 자녀는 장래에 난봉꾼이 될 것이 확실하나 엄마가 기도로 그것을 막을 수 있다. 고 하나님이 말했다는 것이다.
엄마는 그때부터 미친 듯이 기도 하기 시작했다. 매일 버스로 약 한 시간 거리에 있는 그 목사의 교회로 아침 10시까지 찾아가 오전 기도를 한두 시간 하고 교회에서 점심밥을 지어 목사를 먹이고 한두 시간 모여서 수다를 떨고 다시 두세 시간 기도를 하고 저녁밥을 지어 목사를 먹이고 저녁 기도를 두세 시간 하고 저녁 10에 교회를 나서 집에 오면 열한 시가 되었다. 나중에 그 교회는 목사의 집 근처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우리 엄마가 지어낸 점심 저녁 식탁에는 목사의 가족들이 모두 모여 식사를 했다. 그리고 나는 집에서 라면 끓여 먹거나 식은 밥을 데워 먹었다. 블랙코미디 같은 역설이지만 밥 문제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세상 무엇보다 기도가 중요했던 엄마는 기도를 쉴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나의 졸업식, 입학식 등등 부모가 필요한 어떤 행사에도 온 적이 없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 즈음에는 자신이 기도의 경지에 이르러 하나님을 직접 만나 대화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심각해진 것은 자신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이 되었다. 엄마의 기도 주제는 이즈음에는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켜 우리 집이 벼락부자가 되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그렇게 하루에 몇 시간씩을 매일 시간과 몸을 바쳐 기도하던 엄마는 자신의 기도 덕분에 하나님이 벼락부자를 만들어 줄 것으로 굳게 믿었고 실제로 벼락부자를 시켜줄 준비를 하나님은 모두 마쳤지만 아빠의 행실과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않아 실행하지 못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즈음에 아빠와 엄마의 다툼은 그릇이 되지 못한 아빠를 탓하는 엄마와 답답해하며 정확하게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를 묻는 창과 방패의 대결이 주된 내용이었다.
정말로 무서운 것은 본인이 하는 생각으로 내려진 결론이 자신의 생각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만나 응답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그녀의 말에 스스로 부여한 전지전능한 신급의 권능은 그에 반대하는 모든 의견은 마귀의 목소리였고 어떠한 소통도 허락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내게 여자친구가 생겼을 때 엄마는
"하나님이 그 애는 아니라더라 얼른 헤어지거라"라고 말했다.
아르바이트 자리라도 하나 잡으려 치면
"하나님이 그 일자리는 고생만 하고 돈도 안된다더라"라고 말했다.
아빠와 다투고 이른 나이에 돈 한 푼 없이 쫓겨나듯 독립한 나에게는
"언젠가 하나님이 돌아오시게 해 주실 테니 걱정 안 해도 된대"라고 아빠와 말하고 돈 한 푼도 쥐어주지 않았으며 그 후로 연락도 없이 1년을 살았다.
그렇게 엄마는 자신의 기도가 비록 그릇이 되지 못한 아빠 덕분에 벼락부자는 되지 못했지만 난봉꾼이 될 내 인생은 구원했다고 아직도 굳게 믿고 있다.
내 삶의 노력을 착취해 가는 엄마의 기도
제대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휴가였다. 버스를 내리자마자 공중전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어디야?"
"아들 도착했어? 엄마 지금 교회지.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으니 교회에 들렸다가 밥 먹고 가"
익숙했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 전주에 도착하면 엄마는 언제나 교회에 있었다.
휴가 기간에도 기도를 빼먹지 않았다. 아침 9시에 나가 저녁 11시에 집에 돌아왔다.
이번에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로 향했다.
그날은 왠지 교회 목사와 그 목사의 아들 (군대 가기 전에 제법 나랑 친하게 지냈다. 술도 한잔씩 하고 담배도 나눠 피우던 사이였으나 그 사이에 사명을 받고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여 신학교에 재학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 엄마가 모두 모여 있었다.
"목사님이랑 전도사님 (그 아들이다.)이 기도하다가 너에 대한 응답을 받았대, 들어 봐"라고 엄마가 말했고 그 목사와 그 아들놈이 자기가 기도하는 중에 내가 자기 아들을 "도울 자"로 응답을 받았다는 것이다.
자기 아들은 이 교회를 물려받고 나는 그 아들을 "도울 자"라는 것이다.
어리둥절했다. 그럼 자기 아들놈은 목사고 나는 부목사인가? 그것도 아니다. 나는 사명을 받은 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목사는 아니고 그냥 "도울 자"였다. 그럼 내 직업은 뭐지? "도울 자" 인가? 온갖 궁금증이 생겨났다.
하지만 엄마는 내가 "도울 자"인 것에 뛸 뜻이 기뻐했고 감사 헌금도 했다. "도울 자"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몇 가지 질문했으나 그들은 어리둥절해했다. 난봉꾼일 수밖에 없는 내 인생을 엄마의 기도로 "도울 자"로 만들어 줬는데 무슨 말이야 많냐는 태도였다. 부정적인 질문을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는 마귀에 씐 사람이 되었고 그냥 교회나 열심히 다니고 목사의 아들놈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알게 해 준다는 논리였다.
이 얼마나 폭력적인가? 자신의 미래가 불투명하기 그지없는 갓 제대한 23살의 지잡대 재학 중인 청년에게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고 결정된 진로가 "도울 자"이니 다른 생각하지 말고 우리 아들놈 부하짓을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알아서 해줄 거라니.. 그 말에 엄마는 뛸 뜻이 기뻐하고.. 감사하는 상황이..
그때부터 나는 그 목사 아들놈의 부하짓 외에는 학업도 아르바이트도 자기 계발도 우리 가족에게 모두 의미 없는 짓이 되었다.
"그 아르바이트해서 돈 몇 푼이나 번다고.."
"그 공부해서 학교 나와 봤자 어디 변변한 회사에 취업이나 하겠냐고.."
하나님 뜻에 따르는 것이 인생을 돌아가지 않는 최선의 방법이라며 엄마 따라 교회나 나와서 기도하라 했다.
하지만 그들의 뜻대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그즈음 무렵부터 학교생활을 열심히 하기 시작한 나는 과에서 점점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그때 즈음에는 제출하는 공모전마다 수상을 했다. 나를 잘 지켜본 교수는 전국 규모의 공모전 프로젝트에 나를 참가시켰고 거기서 수상까지 하게 되면서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그때도 엄마는 나의 수상경력에도 수직상승한 학점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저 교만함에 빠져 세상 공부를 하고 있는 우리 아들이 빨리 돌이켜서 "도울 자"의 역할에 집중하기를 바라고 기도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나는 서울의 한 광고회사에 인턴으로 취직하게 되었다. 이 경사스러운 일에도 엄마는 기뻐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어차피 곧 돌아올 테니 세상을 경험하게 두라는 응답을 받았다고 했다. 엄마는 여전히 자기 아들이 그 목사 아들놈의 부하짓을 열심히 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 목사와 그 목사 아들놈은 이미 내가 눈에 가시였다. 청년부 일로 몇 차례 마찰이 있었다. 그 목사 아들놈은 게으르고 책임감도 없었고 심지어 머리가 좋지 못했다. 일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부분을 내가 몇 번 지적했고 결정적으로 교인들에게 학력을 위조한 사실을 알아챘다. 가까이 지내던 탓에 우연히 재학 중이라던 대학의 교재를 보게 되었고 국내의 유력한 4년제 신학대에 다닌다던 말은 거짓말이었고 경기도의 2년제 신학교에 재학 중임을 알게 되었다. 진작부터 다른 부하를 찾기 시작했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으며 대체로 찾은 그 녀석은 아직도 그 교회에 다니면서 "도울 자"를 하고 있다고 한다. 평일에는 장인어른이 운영하는 고물상에서 일한다고 했다. 엄마는 점점 아들이 "도울 자"의 자리를 빼앗겨 가는 것을 체감하고 더욱더 열심히 어서 돌아오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나는 제법 자리를 잘 잡았다. 고용이 확정되지 않는 6개월 인턴으로 4명이 함께 취직되었는데 6개월 후에 나만 정직원으로 채용되었다. 승진도 제법 빨리 되었고 그에 따라 연봉도 빨리 올랐다.
인턴 때는 월 38만 원짜리 고시원에서 생활했다. 광고 회사는 야근이 많다는 인식이 있는데 내가 취직한 회사는 광고회사 중에서도 야근이 힘들기로 유명한 회사였다.
인턴 때는 밤 10시 이전에 퇴근한 적이 거의 없었다. 정직원 때는 더 심해졌다. 평균 퇴근 시간이 새벽 1시 ~ 2시였다. 주말 출근은 거의 매주였으며 쉴 새 없이 일했다. 정말 열심히 살았다.
엄마에게 기쁜 소식을 계속 전하게 되었다.
"엄마 나 정직원 됐어"
"엄마 나 이번에 대리로 승진했어"
"엄마 나 이번에 연봉이 많이 올랐어"
"엄마 나 이번에 팀장이 되었어"
그때마다 엄마는 대답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엄마의 기도가 이루어졌어"
무언가 일이 잘 안 되었을 때 엄마에게 투정도 부렸다.
"엄마 중요한 프로젝트에서 실수했어"
"엄마 이번에 승진될 줄 알았는데 잘 안 됐어"
"엄마 나 요즘 너무 힘들어"
그때마다 엄마는 대답했다.
"그러게 하나님이 맡겨준 사명을 감당했어야지"
아무런 축복도 위로도 되지 않음을 30대가 되어서야 깨달았다.
인과 관계가 이상했다.
열심히 노력해서 무언가가 잘됨 --> 엄마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함
열심히 노력했으나 결과가 잘 되지 않음 --> 하나님의 사명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함
엄마의 기도는 나의 노력을 착취해 자기의 것으로 만든다.
졸부인 이모가 있다. 나의 결혼식에 돈을 보태라며 엄마에게 200만 원을 건넸다고 했다.
엄마는 100만 원 자기가 써도 되는지 하나님께 기도했고 그래도 된다고 응답받았다고 한다.
그 100만 원이 아빠 엄마가 나 결혼할 때 보탠 돈의 전부다.
이모의 아들이 결혼하게 됐다. 나는 그 100만 원이 이모가 준 돈인지도 몰랐다. 그 사촌동생과 별 친분도 없던 나는 결혼식에도 안 갔고 10만 원 정도만 축의금으로 송금했다.
이모가 전화와 나에게 섭섭함을 토로했다. 그때 알았다.
엄마에게 이야기했더니 하나님이 100만 원 써도 된다고 했고 100만 원은 자기가 준 척해도 된다고 했다고 대답했다.
할 말이 없었다.
내가 40대가 된 지금도 엄마는 기도하고 있다.
매월 용돈을 보낼 때마다 여전히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으며 자기가 나를 위해 얼마나 기도하고 있는 줄 아냐며 그 기도 때문에 네가 성공해서 잘 사는 것이기 때문에 이 정도 용돈은 당연한 것이라고 한다.
그보다 하나님 뜻에 따라 사명을 감당할 생각이 없는지 여전히 물어본다.
누나는 아프다. 자기가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데 누나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서 아픈 것이라고 한다.
아빠는 암으로 죽었다. 아직도 이년에 한 번씩은 숨었던 도박빚이 튀어나와 모두를 힘들게 하지만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자신이 남편을 포기하지 않고 끝끝내 기도한 탓이라고 한다.
엄마에게 작정하고 이야기했다.
엄마의 삶은 기도하기 시작한 뒤부터 실패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고 여전히 30년째 실패하는 중이라고..
엄마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한다. 자신은 하나님과 대화하며 생사의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에 실패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기도 때문에 잘 살고 있으면서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내 삶은 내 거다. 20세가 채 되기 전에 독립하여 어린 나이에 삶을 살아냈으며 8학기의 학자금 대출 중 6학기를 내가 갚았고 취직한 이후에는 고시원에서 시작하여 내 힘으로 가난에서 벗어났으며 집에서 한 푼도 받지 않고 결혼해 (이모가 준 100만 원은 축의금으로 치겠다)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다.
내 삶은 내 거다. 엄마의 기도가 만든 것이 아니다. 기도했다고 내가 한 땀 한 땀 쌓아 올린 내 삶에 지분을 주장할 수는 없다. 나는 내 거다.
엄마..
제발 기도를 멈춰줘요.... 어려운 삶을 살아낸 나를 보고 고생했다고 말하고 위로해요..
내가 잘 살게 되었다고 하나님께 감사하지 말고 나를 보고 말해요. 잘 살아 내줘서 고맙다고...
가끔 다툴 때 격해진 감정에 막말을 쏟아내고 교회 가서 하나님께 회개하지 말고 나한테 미안하다고 말해요..
이렇게 하는 게 정상이에요.
이래야 정상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