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ㅇ)이 삶(ㅅ)으로 일어서는 짧은 순간에 대하여

'비해브' 에세이

by 비해브

우리는 참 많이 알고 있습니다.

손가락 몇 번만 움직이면 세상의 모든 정의와 이론이 쏟아지는 시대니까요.

하지만 그 수많은 '앎' 중에서, 내 몸을 통과해 내 것이 된 것은 얼마나 될까요?


최근 에픽테토스의 문장을 읽다 문득 멈춰 섰습니다.

"당신의 지혜를 무지한 사람들 앞에서 설파하기보다, 그 지혜가 소화되어 나타내는 행동으로 보여주라."


이 문장은 제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지식'을 먹이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지식을 '소화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는 걸까요?


소화되지 못한 지식은 '구토'와 같다

Image by Aart Beijeman from Pixabay

에픽 테토스는 재미있는 비유를 듭니다.

양들이 목자에게 자기가 풀을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보여주려고

풀을 도로 토해내지 않는다는 것이죠.

대신 양은 풀을 잘 소화시켜 보드라운 털과 신선한 우유로 증명합니다.


지금 우리의 교육 현장은 어쩌면 아이들에게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를 증명하기 위해,

소화되지 않은 지식을 날것 그대로 뱉어내게(시험과 암기) 강요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진정한 앎은 입이 아니라 삶에서 향기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응(o)이 시옷(ㅅ)이 되는 기적


한글의 모양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흥미로운 발견을 했습니다.

'앎'과 '삶'의 차이입니다.

- 앎(ㅇ): 머릿속에 둥글게 맺힌 관념입니다. 아직 어디로도 흐르지 않은, 완결되었으나 고요한 상태입니다.

-삶(ㅅ): 그 동그란 앎이 비로소 현실의 대지를 딛고 선 사람(ㅅ)의 다리가 될 때, 비로소 '삶'이 됩니다.


머릿속에 머물던 지식(ㅇ)이 세상으로 걸어나가는 실천(ㅅ)으로 변하는 것.

교육의 본질은 결국 이 미묘한 자음 하나를 바꾸는 과정에 있는 게 아닐까요?


수행자(修行者), 닦고 행하는 사람

출처: 유트브 채널 '셰프 안성재' 흑백2리뷰 선재스님 편 중에서

최근 흑백요리사2를 보면서, 인상깊었던 장면이 있습니다.

선재스님께서 함께 요리하는 사람들 모두가 도반이며,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하시는 장면이었습니다.

(참고: 도반은 함께 도를 닦는 벗을 의미)


수행의 수(修)는 단순히 배우는 것이 아니라, 거친 원석을 갈고 닦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행(行)은 그 닦인 마음을 가지고 실제로 발을 내딛는 일이죠.

배운 것을 삶에서 실천하기 위해 매일 자신을 가다듬는 과정,

그것이 교육의 진짜 얼굴일 것입니다.


인지(지식), 정의(마음), 기능(실천)이라는 교육의 세 기둥이 하나로 만나는 지점은 교과서 속이 아니라,

아이가 배운 절제를 식탁 위에서 보여줄 때,

배운 배려를 운동장에서 보여줄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우리의 앎은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


누군가에게 "나 이거 알아"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이 들 때,

혹은 아이에게 "이걸 알아야해"라고 다그치고 싶을 때,

잠시 숨을 고르고 에픽테토스의 양들을 떠올려 봅니다.


"나는 내가 오늘 배운 것을 소화시켜 어떤 행동의 털과 우유를 만들어냈는가?"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오늘 우리의 앎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다시 가슴에서 발끝으로 내려가

'삶'이라는 글자로 일어서고 있는지, 그 고요한 여백 속에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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