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데 왜 서로를 할퀴는가

[책은 도끼다#5 l 말그릇] 정서적 문맹을 넘어 감정의 자유로

by 비해브

주말, 갑작스럽게 어머니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이야기는 익숙하고도 아픈 풍경이었습니다.

동생과 아버지의 깊어지는 갈등, 그리고 몸 돌볼 겨를 없이 술에 의지하는 아버지에 대한 걱정이 가득했습니다.


예전의 저였다면 어머니의 하소연에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며 화부터 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최근 읽은 김윤나 작가의 《말그릇》과 여러 인문학 서적들은 저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여유를 주었습니다. 물론 메신저라는 매체가 주는 ‘생각의 틈’도 한몫을 했지만요.

'그동안 어머니 혼자 이 감정의 소용돌이 중심에서 얼마나 고단하셨을까?'

'그런데 왜 어머니는 본인이 해결할 수 없는 두 사람의 관계 때문에 이토록 스스로를 갉아먹고 계실까?'

질문의 끝은 결국 저 자신을 향했습니다.

'나는 왜 예전에 화부터 냈을까? 우리는 서로를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면서,

왜 정작 표현의 순간에는 비수 같은 말만 골라 던졌던걸까?'


1. 분노라는 가면을 쓴 서툰 사랑

아버지는 딸의 앞날이 걱정되어 잠을 설치지만 입을 여는 순간

"너 언제까지 그럴 거냐"는 서슬 퍼런 비난이 터져 나오고,

딸은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어 밤을 지새우지만 마주 앉으면

"아빠는 잘하고 있냐"며 가시 돋친 방어 기제를 내뱉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분노'로 번역해서 내보내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가족의 대화에는 이토록 지독한 '오역의 필터'가 끼어 있습니다.

서운함도, 불안도, 애틋함도 모두 '화'라는 일차적인 감정으로 뭉뚱그려진 채,

가족은 서로를 가장 잘 아는 타인이 되어갑니다.

아니, 우리는 서로를 가장 잘 알기는 하는 걸까요?


2. '나'를 잃어버린 객체들의 만남

왜 우리는 자신의 감정조차 정확히 모르는 '정서적 미아'가 되었을까.

부모 세대는 생존이라는 거대한 해일 앞에서 '자아'를 돌볼 틈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삶은 '나'로 존재(Be)하는 것이 아니라,

생계를 책임지는(Have) 것과 '가장'이라는 역할로 버티는 것이었습니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자란 자녀 세대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구시대적 성공 공식에 맞춰 학교와 학원을 배회하느라,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를 탐구할 시간이 주어지지 못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모르는 두 객체가 만나 대화를 시작하니 대화는 평행선을 달리고 상처만 쌓입니다.

정체성을 모른 채 ‘역할’만 남은 관계에서 가족이라는 소속감은 희미해지고, 실존적 외로움만 커집니다.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사랑을 확인할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 버리는 것,

이것이 우리 가족들이 처한 서글픈 현실이 아닐까요.


3. 충.조.평.판의 역설과 말그릇

아버지가 쏟아낸 날 선 충고는 사실 '자식이 잘되길 바라는 사랑'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충고, 조언, 평가, 판단(충.조.평.판)은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너는 왜 내 기대만큼 살지 못하니?" 혹은 "왜 조언처럼 살지 못하니?"라는 부정의 메시지로 읽힙니다.

김윤나 작가는 말은 기술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담는 그릇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진정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의미가 무엇인지, 그 감정과 동기를 분명히 파악하고 이름 붙여줄 수 있을 때 비로소 타인을 향한 내 말도 온전히 표현될 수 있습니다.

내 말그릇이 비좁으면, 상대를 위한 나의 진심을 담지 못하고 넘쳐버려 결국 상처가 됩니다.


4. 감정의 주인이 되는 '새로운 자유'

자유를 꿈꾸는 저에게 이번 사건은 또 하나의 자유 영역을 열어주었습니다.

바로 '내 감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감정이 나를 이끄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감정의 주인이 되어 그 감정이 속삭이는 진실을 해석하는 입니다.

요동치는 상황 속에서도 나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제가 발견한 가장 소중한 순간이었습니다.


결국 해결의 실마리는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가족이라 할지라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합니다.

서로의 인생에 대한 과도한 책임감을 내려놓고, 각자가 자신의 몫을 온전히 책임질 때

비로소 우리는 서로를 '통제 대상'이 아닌 '존엄한 인격체'로 마주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은 정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기다리고

넘어질 때 지지하고 격려해주는 일이 아닐까요.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추천 도서: 《말그릇》 (김윤나 저)

9791185952987.jpg 출처: 인터넷 교보문고

흔히 말을 잘하는 것을 화려한 '대화 기술'이 좋은 것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하지만 인스턴트 음식을 조리하는 법을 안다고 해서 실제 요리 실력이 느는 것이 아니듯,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대화는 단순한 기술이 아닌 '역량'의 문제입니다.


이 책은 기술 너머에 있는 진정한 소통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내면의 그릇을 키워 내 말에 '사람'을 온전히 담아내고 싶은 분들께,

그리고 자신과 타인을 더 깊이 탐구하고 싶은 모든 분께 이 책을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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