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변 기행 (2회)

그때는 고생인 줄도 몰랐다

by 김희재


덕신은 가난하고 조그만 마을이었다. 중대장 관사는커녕 우리가 세를 들 만한 집도 없는 전형적인 어촌이었다. 큰살림은 마을 회관 한 귀퉁이에다 쌓아놓고 마치 캠핑을 온 것처럼 살아야 했다. 전기밥솥과 전기 프라이팬, 옷가지들만 챙겨서 부엌도 따로 없이 방 한 칸만 얻었다. 신혼살림이 아니라 자취살림 같았다.


넓은 해안에다 병력을 죽 깔아 놓고 중대장은 밤새도록 순찰(巡察)하러 돌아다녔다. 남편은 낮에 병사들이 자는 시간에 잠깐 집에 들러 속옷만 갈아입고 나갔다. 밥도 잠도 다 부대에서 해결했다. 전투복에 얼룩무늬 헬멧을 쓰고 산적두목처럼 시커멓게 그을린 아빠가 오토바이를 타고 들어서면 아이는 제 아빠인 줄도 모르고 무섭다고 낯 갈이를 하며 뒷걸음질을 했다.


그렇게 서로 슬쩍 얼굴만 보고 지나가도 남편은 내가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므로 편안했다. 나는 그의 곁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덕신에서는 울진 읍내로 완행버스를 타고 장을 보러 다녔다. 아이의 예방접종도 읍내에서 했다. 털털 버스로 30분 이상이나 구불구불 달려가야 했다. 시간표도 모르는 버스를 온종일 기다리느라 녹초가 되었다.


그래도 읍내에 다녀오면 모처럼 콧바람을 쐬고 온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덕분에 나는 한 번도 이런 시골에서 살아보지 못했다. 이렇게 가끔 아기를 업고 나들이하는 것도 전원생활의 낭만이라고 여겼다.


나의 낭만주의는 계절이 바뀌면서 본색을 드러냈다.


우리 방은 연탄아궁이조차 없었다. 나무를 때서 살아야 하는 시골집에서 미리 준비해 놓은 땔나무도 없이 겨울을 나야 했는데,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궁이.jpg 시골 부엌 아궁이


다들 자기들이 겨울을 날만큼의 나무만 미리 준비해 둔 까닭에 돈을 주고 살 수도 없었다. 부득이 생나무를 해다가 때야만 했다.


평생 처음 해보는 일이라 나무 때는 일이 어려운 판에 물기 축축한 생나무에 불을 붙이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온 집안을 다 곰 굴로 만들다시피 연기만 나고 불은 잘 붙지 않았다. 생나무에 불을 붙이느라 실랑이를 하다 보면 눈이 매워서도 눈물이 나지만 쌓였던 외로움과 서글픔에 가슴속이 더 매캐하니 아팠다.



간신히 초저녁에 불을 지펴서 군불을 넣어도 새벽 두세 시만 되면 방은 여지없이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 남편도 없는 방에서 아이 곁에 웅크리고 누워 얕은 잠을 잤다. 새벽 네 시까지는 억지로 견딜만하지만 더는 등이 시리고 추워서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 밤중에 팔뚝만 한 쥐가 우글거리는 어두운 부엌에 혼자 나가서 다시 불을 지필 엄두는 나지 않았다. 추워서 입술이 새파랗게 질린 아이를 그대로 두고 볼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아이를 솜 포대기 둘러서 업고 얇은 담요를 푹 뒤집어씌우고는 햇살이 확 퍼질 때까지 방안을 서성거렸다. 그렇게 새우는 밤은 유난히 춥고도 지루했다.


그런 밤이면 언제나 추위도 아랑곳없이 밤새 오토바이를 타고 순찰을 돌고 있을 남편과 초소에서 바다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서 있을 그의 부하들을 생각했다.


살을 에는 바람 속에서 오로지 나라를 지킨다는 일념으로 밤을 새우고 있을 그들에게 비하면 이 정도는 추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금빛 고운 여명이 문 창호지를 뚫고 들어와 온 방을 가득 채울 때까지 아이를 업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며 서성거렸다. 그러다 보면 비록 발은 시려도 마음은 그렇게 시리지 않았다.


마치 나도 남편과 함께 해안 초소를 돈 것 같아 가슴속까지 뿌듯하고 훈훈해졌다.


그럭저럭 차츰 불을 지피는 요령이 생기고, 밤새 추위를 나는 것도 그리 고통스럽게 느껴지지 않게 되어갈 무렵 무사히 해안 근무를 마쳤다. 우리는 다시 예비대로 돌아왔다.


(3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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