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의 출발점을 찾아 떠나다
차가 포항을 지나자 오른편 차창 너머에 바다가 예전처럼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창문을 조금 열자 비릿하고 찝찔한 갯바람이 확 끼쳐 들어왔다. 냄새만으로도 나는 이미 고향에 돌아온 나그네 심정이 되어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목구멍이 뻐근하도록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왈칵 솟구쳤다. 오랜만에 그리운 이를 만난 듯 벅찬 감격은 이렇게 바다 내음을 타고 밀려들었다.
끝 모를 수평선 너머까지 죽 널려있는 자잘한 구름 사이로 크고 작은 배들이 점점이 박혀있다. 옛 앨범을 들추어내듯 정다운 풍경이다. 무심한 바다는 언제나 변함도 없다. 여전히 그 리듬과 동작으로 제 몸을 뒤집어 허옇게 거품을 뒤집어쓰며 시치미를 뚝 떼고 누워있다.
우리는 경북 울진 죽변을 찾아가는 길이다. 딱히 찾아갈 만한 집도 없고, 꼭 만날 사람도 없었지만, 우리의 젊음과 추억을 찾아서 무작정 떠난 길이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아이들의 고향, 그 애들의 생가를 찾아가는 길이다.
15년 전, 내가 처음 죽변에 도착을 하던 날은 이른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결혼한 지 채 1년도 안 된 새댁이 남편을 찾아 허위허위 달려오는 길이었다.
결혼 후 남편은 광주 보병학교를 거쳐 영양에서 내륙중대장을 하고 있었다. 같은 연대에 속해 있던 해안 중대에서 사고가 나는 바람에 그 중대의 후임 중대장으로 가게 되었다.
남편은 가방 한 개만 달랑 들고 떠났다. 나는 임신 7개월의 몸으로 이삿짐 실은 트럭을 타고 따라갔다.
그는 나를 맞아 반길 겨를도 없었다.
갑작스레 부임한 남편으로서는 사고로 온통 쑥밭이 되어 술렁이는 중대원들의 마음을 수습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남편은 홑몸도 아닌 내가 이사를 하고 짐 정리를 혼자서 힘겹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처럼 밤낮으로 부대 일에만 매달렸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나는 그런 남편을 야속하다고 생각하거나 서운해하지 않았다.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 여겼다.
나는 바쁘고 힘든 남편이 나 때문에 신경 쓰지 않게 해야겠다는 소박한 마음으로 그저 말없이 그의 곁을 지키며 해안 중대장 생활을 시작하였다.
해안 중대는 교대로 예비대에서 휴식과 정비를 하고 다시 해안으로 배치가 되는 법인데, 사고를 낸 우리 중대는 다른 부대보다 몇 개월을 더 예비대에 머무르며 정비를 하였다.
예비대에 있는 동안 남편은 같은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도 내게는 너무나 먼 당신이었다. 어쩌다 잠깐씩 집에 들어와서도 신경은 온통 부대 쪽에다 곤두세우고 있었으므로 곁에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중대장 관사는 부대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도 부대와는 또 하나의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밖에서 보면 그곳에 집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게 지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고 오직 바다와 백사장과 키 작은 해송만 빼곡히 둘러 서 있을 뿐인 외딴집. 종일토록 말 한마디 건네줄 사람 하나 없는 그 집은 저 푸른 초원 위에 세워진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마을과는 멀리 떨어져 있고 시내버스도 그리로는 다니질 않았다. 시장을 가려면 족히 5리나 되는 길을 남산만 한 배를 안고 걸어가든지, 숲 사이로 난 오솔길을 뚫고 국도로 올라가서 무작정 지나가는 아무 차라도 세워서 태워 달라고 부탁을 해야 했다.
그렇다고 대위 봉급에 매번 읍내로 전화를 해서 택시를 불러 타고 다닐 수도 없었다.
남편의 중대장 오토바이 뒤에 마누라가 매달려 타고 다닌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남편은 거의 매일 저녁 중대원들을 번갈아 가며 중대장 관사에서 식사하자고 초대하였다.
그 바람에 나는 배를 쑥 내밀고 뒤뚱거리며 열심히 시장을 보러 다녔다.
시장에서 오는 길엔 운이 좋으면 관사 쪽 방향으로 가는 택시를 잡아타기도 하고 완행버스를 만나기도 했다
이렇게 어렵사리 장을 보아다가 매일 장정들 저녁을 해대느라 부엌에서 헤어나지 못하면서도 난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이심전심으로 남편의 의중을 헤아려 짐작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내가 남편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몇 달 동안 거의 모든 중대원을 중대장 관사로 불러다 개별적으로 식사하며 대화를 하고 나자 뒤숭숭하던 중대 분위기가 많이 정돈되었다. 사고의 악몽에 시달리던 중대원들 모두가 다시금 씩씩하고 믿음직한 패기를 되찾았다.
부대가 제자리를 찾고 안정되어 가는 사이에 나는 첫 아이를 낳았다. 전남 광주에서 잉태되어 경북 영양을 거쳐 울진 죽변 예비대 관사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아이가 태어난 지 겨우 두 달이나 지났을 무렵, 남편의 부대는 해안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울진에서 한참을 남으로 내려와 덕신 마을로 이사하였다.
(2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