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꿈 내가 살게

모든 게 기적이다

by 불지않는 면빨

해가 점점 짧아져서 오후 4시면 땅꺼미가 내려앉고, 빗줄기는 점점 밀도를 높여가며 진해지고 있다.

가을을 넘어 겨울로 접어드는 11월. 하반기 수업도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과 친구들의 취업 동향들이 속속 확인되면서 동기들 모두 내색은 하지 않지만, 안도, 희망, 불안, 초조, 절망 등 세상만사 온갖 감정들이 각자의 상황에 따라서 교차되고 있었을 터이다.


Tech 관련 수업 때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던 인도 친구 Sayu는 증권 투자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이미 외부 기관에게서 투자를 받았다.

부동산 관련 가족 사업을 했던 영국인 폴은 학과 동기들 몇 명을 모아서 전기차 rent 사업을 창업하기 위해 학교 도서관을 마치 창업 사무실처럼 이용하고 있었고,

하버드 로스쿨 강사 출신 미국 여성 변호사 프레처는 현재 수업 중인 학교의 강사로 초빙되었고,

또 다른 여성 변호사 출신 크리스티나는 자선 단체의 사외이사로 내정되었다.

물론 국비나 회사 full 스폰을 받은 싱가포르 수미와 일본 은행 친구들은 무사히 본국으로 귀국하면 되었다.


안타깝게도, 자기 나라 회사 고위직 출신들인 브라질 친구들은 영국에서 Job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거 같으나, 별 성과는 없어 보였다.


사실 내 상황 역시 브라질 친구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가을부터 여러 경로를 통해서 취업 자리를 알아보고 있었지만, 딱히 진전된 곳은 없었다. 완연한 겨울로 접어들면서, 내 마음은 불안을 넘어 점점 초조해졌다. 이 나이에 거액의 학비를 쓰고 졸업 후 취업을 위해 집에서 두문불출하는 장면은 꿈이라면 제대로 된 악몽일 테다.


이 장면은 어찌 나에게만 악몽일까? 아내는 대 놓고 말은 하지 않지만 주말 통화 때,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아내의 목소리에 불안과 초조가 묻어났다.


작년 말 한국을 떠나기 며칠 전, 사회에서 오랜 친분을 쌓아 온 선배 부부와 저녁을 했다. 나의 때 늦은 도전을 축하하고 응원해 주시면서도, 졸업 후 취업이란 현실적인 문제 역시 걱정하시면서 당부했다.


"KS, 내 경험으로 어려울 때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사람은 막상 내 곁에 오래 있었던 친한 사람이 아닙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의외의 사람이 도움을 줄 때가 많아요. 그런 사람을 귀인이라고 부르지요. 진짜 인생에 귀인이 있어요.. 그런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특히 취업을 준비할 때 친소관계를 떠나서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잘 살피기 바랍니다. 누가 KS에게 귀인일 줄 모릅니다"


선배가 얘기한 나를 구원할 귀인은 누구란 말인가? 아무리 살펴봐도 귀인은커녕 귀인 비슷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11월 초 어느 아침. 무거운 몸과 마음을 이끌고 학교로 가는 전철을 타기 위해 야외 플랫폼에 들어섰다. 전광판을 보니, 다음 기차는 10분이나 더 기다려야 한다. 세상의 모든 이데올로기 중 귀차니즘을 가장 숭배하는 나에게 비는 정말 나를 귀찮게 하는 것임을 혼자 투덜거리고 있는데 휴대폰 화면에 '마눌'이 울린다.


"응... 아침부터 웬 전화야?

여보, 나 어제 진짜 이상한 꿈을 꿨어. 여보! 나 알지? 잠들면 꿈을 절대 안 꾸는 거. 아들 태몽도 꾸지 않았던 난데 말이야.

응.. 알지.. 신기하네... 근데 무슨 꿈인데? 개 꿈 아냐?"


아내는 꿈 이야기를 영국 시간 댓바람부터 신나게 얘기했다. 듣고 보니, 단순한 개 꿈이라기엔 스토리가 있고, 본인 사업과도 관련 있는 신기한 꿈이었다.


"당신... 내가 당신 꿈 살까?

뭐? 내 꿈을 산다고? 음... 그래 팔지 뭐. 팔게. 근데 얼마 줄 거야?"


누구보다 도움이 필요했고 (꿈이라도..), 아내 역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테니, 꿈이든 뭐든 줘야 할 판이었다.


그 날밤,

휴대폰 톡소리에 잠을 깼다. 평소에는 잠결에 듣는 톡소리는 무시하는데.

평소 연락하던 헤드헌터에게서 온 톡이었다. 오랜 기간 인연을 이어오던 지인이고 능력 있는 헤드헌터인데 내 취업 자리를 한 번도 알아 봐 준 적이 없었던 터라 내심 조금 섭섭해하고 있던 참이었다.


"안녕하세요. 급하게 연락드릴 일이 있어 영국 밤 시간인데도 톡을 드립니다.

xxx 회사에 저희 회사가 후보를 추천했는데 저희 회사가 괘씸죄에 걸렸는지 후보가 떨어졌어요. 현재 후보 추천 요청이 xxx 헤드헌터 사로 넘어갔으니, 그 회사에 이력서 넣어 보고 연락도 직접해 보세요. 그 회사가 다른 후보를 추천해 버리면 모든 게 끝나니, 마음이 급해서 이렇게 급하게 톡을 드립니다."


톡을 읽고 기분이 이상해졌다. 아침에 마눌에게서 꿈을 샀는데 당일 밤에 이런 톡을 받다니... 이게 무슨 우연인가?


마침 지인이 알려 준 헤드헌터 사는 내가 여름부터 계속 연락해 오던 곳이었다. 헤드헌터사 임원에게 xxx 회사 자리를 특정해서 언급하니, 어떻게 알았나며 같이 진행을 해 보자고 한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12월 초, xxx 회사로부터 계약서를 받았다. 물론 그 한 달은 피를 말리고 내 간장을 다 태우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과정이 끝난 후 한국에서 기약 없는 이력서를 계속 쓰지 않아도 된 것에 너무나 안도했다.


아내가 틈만 나면, 나의 취업은 자기 꿈 덕택임을 강조하며 부심을 드러낸다. 이 부심은 자기가 조금이라도 불리한 상황일 때 여지없이 호출된다.


맞다. 나의 때 늦은 유학의 시작과 끝에 항상 아내가 있었다. 아내가 꾼 꿈은 아내의 기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한 밤중 급 톡을 날린 내 지인은 생각지도 못했던 나의 귀인이었다.


그러나 나의 진정한 귀인은 이 모든 것을 주재하신 그분이다.


모든 게 나에게는 기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