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are many...

Possible Selves

by 불지않는 면빨

두 달의 여름방학이 끝났다. 카미노 여행과 함께...

덕분에 나의 카미노 여행기가 학교에 소개되었다.


하반기 수업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내가 속한 슬론 프로그램 전공 수업은 거의 마무리되었고, 선택과목 수업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젊고 똑똑한 MBA 학생들과 같이 수업을 듣고 그들과 경쟁하며 학점을 따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우리 반 꼰대들의 표정에도 사뭇 긴장과 진지함이 감 돌았다.


하반기 수업 시작은 슬론 학생들에겐 또 다른 의미를 가졌다.


1월 초부터 12월 중순까지 딱 1 년짜리 프로그램이다 보니, 수업 시작 무렵의 꽃 피는 봄은 늙수그레 학생들에게 돌아온 청춘의 설렘과 들뜸을 선사했고, 뜨겁지만 경쾌한 유럽의 여름은 다시 못 올 마지막 청춘의 늦바람처럼 자유와 해방의 시간을 허락했다.


뜨거운 여름 공기가 선선한 가을바람으로 바뀌자 들뜸, 열정, 해방감은 바람처럼 사라지고, 프로그램 종료 후 '무엇을 하며 먹고 살 지'란 에누리 없는 현실감이 쑥 고개를 쳐들었다.


자기 가게의 반년치 수익금을 털어서 흔쾌히 내 노땅 유학을 지지한 아내도 가을바람이 가져온 초조함을 비켜나진 못했다.


"여보! 한국에 당신이 교류하고 있는 어딘가에 연락 함 해 봤어요? 이제 서서히 취직 자리를 알아봐야죠..

응... 이미 이력서를 헤드헌터사 여러 군데 넣었어... 연락이 있겠지 뭐... 지금이 9월이니 조금 빠르기도 하고..

알았어요... 당신 졸업해도 들어가야 할 돈은 아직 많은데 당신 나이도 있고 해서 취직이 잘 될지 걱정이네요.

걱정하지 맙시다... 어떻게 되겠지... 나도 노력하고 있으니..."


그랬다. 나뿐만 아니라, 반 친구들도 여름 방학 끝나자마자 활발히 구직 활동을 하고 있었다. 소위 사돈에 팔촌의 끈을 동원하고 학교에서 마련해 준 온갖 기업체와의 미팅에 빠짐없이 참석하며 자기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주중 수업에 갑자기 양복을 입고 온 친구는 어김없이 인터뷰 내지 기업체 행사가 예정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 역시 덩달아 가급적 기업체 미팅에 참석하여 얼굴 들이밀며 관심 있는 척했지만, 영국인도 아니고 영주권도 없는 50 대 초반 한국 꼰대에게 관심이 있을 턱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마음은 초조해져 갔다.




슬론 프로그램에서 배운 키워드 두 개가 있다.

하나는 longevity 고, 다른 하나는 Possible Selves다.

이 두 개의 단어는 Pair 다. 직관적으로, 장기수명을 버텨내기 위해서는 시간의 변천에 따라 다양한 직업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학교가 자랑하는 대표 지성인 'Herminia Ibarra' 교수님의 명저 'Working Identity'에 나오는 중심 단어


POSSIBLE SELVES


내 영국 시간을 관통하며 머리에 맴돌고 있던 단어였다. 솔직히 말하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다르지 않다.


과정 졸업 후 당장 먹고살기 위해서 즉시 구해야 할 직업에 대한 초조감도 매우 컸지만, 그 직업 이후에 난 또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실마리를 찾지 못한 초조감도 못지않았다.


교수님은 자기 커리어를 재창조하는 과정을 아래와 같이 9개 전략으로 설명했다


act then reflect 너무 많은 고민하지 말고 일단 행동하고 수정해 가라

flirt with your selves 진정한 단 하나의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고, 내가 하고 싶은 여러 가지 일들을 테스트하는 과정이다. 시도 자체를 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자신 뒤에 숨는 것이다.

live the contradictions 변화는 과정이다. 현재의 일과 앞으로 할 일 사이의 어정쩡한 상태를 즐겨라

make big change in small steps 모든 것을 한 번에 바꾸고자 하는 큰 결단의 유혹을 피하라. 작은 성공과 성취가 연이어지면 거대한 변화가 찾아온다

experiment with new roles 초반부터 큰 약속을 하지 말고 작은 프로젝트나 단기 업무를 통해서 시험하라

find people who are what you want to be 일에만 중점을 두지 말고, 롤 모델을 찾아라 가급적 내가 속한 같은 사회 공동체가 아닌 곳에서

dont wait for a catalyst 대격변의 순간은 없다. 일상 속에서 조금씩 변해가는 것이다.

step back periodically but not for too long 가끔 한 발짝 물러나 왜 변하고자 하는지 돌이켜 봐라. 그러나 너무 오래 고민하면 돌아오지 못한다.

seize windows of opportunity 기회는 열리고 닫힌다. 주위의 자연스러운 기회를 최대한 이용하라


We are many...

이 수업을 들으면서, 우리 과 학생들 중에서 누가 Possible selves에 도전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두 친구가 눈에 띄었다.


한 친구는 자기 Pecha Kucha를 첫 번째로 발표했던 영국 해병 특수부대 장교이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리더십 교관 친구이고, 다른 친구는 아사히 티브이 엔터테인먼트 PD 친구다.


특수부대 장교 친구는 군 재직 중에도 틈틈이 프리미어 리그 대표 구단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리더십을 가르쳤고, 특수부대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영국 대형 헤지펀드의 리더십 담당 이사로, 본 과정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도 입사가 확정되었다. 특수부대와 대형 헤지펀드... 완벽히 상반된 두 조직, 굳이 유사점을 찾자면 군에서 특수부대가 가장 군기가 세고, 민간기업 중에서 헤지펀드가 제일 힘들게 일하니, 소위 고생을 감내해 내는 인내력이지 않을까?


일본 친구는 소위 미디어 제국들로부터 인터뷰가 쇄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친구는 재일교포로서 (한국말은 거의 하지 못하는) 아사히 티브이 음악 프로그램 PD였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인데, 졸업 후 굴지의 글로벌 미디어 회사의 직원으로 가는 것보다, 자기 전문 분야를 살려 Music streaming App을 개발/제작하는 스타트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불현듯 Possible selves와 내 아내가 오버랩이 되었다.

내 아내는 항공사 승무원 출신으로 일반 회사의 비서를 했다가, 어릴 적부터 예쁜 것을 좋아해서 우연한 기회에 보석 공부를 하게 되었고 (사실 우연한 기회는 아니고 결혼한 지 3년이 지난 후 내가 몰래 카드 긁어 그녀 수업을 등록해 버렸다), 보석 회사에서 근무했으며, 유명 보석 shop에서 판매원을 하다가 현재 코딱지만 한 자기 보석 shop을 운영하고 있다. 승무원에서 보석 shop 사장으로의 변신...


아내야말로 본인의 취향과 재능에 맞는 일을 찾아가는 과정을 경험한 자기의 다양한 가능성을 테스트한 Possible Selves의 완벽한 본보기였다.


내 롤모델은 멀리 있지 않았다. 바로 옆에 있었다.


학교 공부를 한 지 벌써 7년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과거해 왔던 일을 지금도 하고 있다. 운 좋게도...

그러나, 나의 Possible Selves를 찾아가는 과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도 그 과정일 줄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