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순례길 800km #2
아들을 런던에 돌려보내고 혼자 걷는, 어떤 의미에선 이제야 제대로 된 순례길.
오늘 지나간 곳은 사하군이다. 많은 순례자들이 힘들어하는 메세타 지역, 황야의 한가운데 있는 곳이자, 800 km 순례 여정의 딱 절반 거리에 있는 도시다.
한때, 부르고스와 왕좌를 다툴 만큼 경제적으로, 종교적으로 번성했던 도시가 사그라지고 이제 영광의 흔적만 남았다. 그러나 수많은 순례자들이 순례 절반 완성을 기념하는 콤포스텔라를 받기 위해서 반드시 오는 곳이니, 도시의 정신은 살아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길을 걷는 내내 나 자신뿐만 아니라 나를 둘러싼 모든 이들에 대한 상념이 가득했다.
불현듯 최무룡이란 이름이 떠 올랐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내 어릴 적 아니, 나의 모친이 젊었을 때 최고로 사랑했던 배우이자, 탤런트 최민수의 아버지다.
오래전 최민수 씨가 돌아가신 아버지가 보고 싶다며 눈물짓는 모습을 티브이쇼에서 본 적이 있다. 내가 영화배우 아버지를 가진 최민수 씨에게 부러운 게 한 가지 있다. 바로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생한 모습을 자기 아버지가 출연한 영화만 틀면 언제든지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아버지의 모습, 동작, 그리고 음성... 마치 당신이 최민수 씨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것은 어린 토토가 40년 후에 알프레도가 남긴 검열로 잘린 키스 장면을 모아서 붙인 시네마 천국이다.
학교에서 각자 본인이 살아온 역사를 20 장 가량 분량의 PT로 만들어 발표하는 시간. 일명 Pecha Kucha ("PK")로 '잡다한 신변잡기 이야기'..
여름 방학 시작 전 마지막 수업에서 학우들 앞에서 발표한 나의 PK는 이렇게 시작했다.
My father lost his father at his age of 13
이후 ‘이 문장’이 순례길 내내 내 가슴을 아리게 했다. 이 단순한 문장 하나가 나의 아버지의 고단한 인생 역정을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PK를 만들기 위해 계속 가족사진을 찾았는데 나와 아버지가 단둘이 찍은 사진은 고등학교 입학 때 찍은 단 하나의 사진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 나에겐 그나마 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라도 있는데, 13살 때 아버지를 잃은 내 아버지는 그의 아버지를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 얼굴 표정, 목소리가 기억에 있을까?
카미노를 걸으며 50세 넘은 아들이 이제야 ‘이 문장’ 이 80세 된 아버지의 인생에 어떤 의미였는지 절감한다. 그런 이유로 18세 된 아들과 같이 걷고 있는 카미노 여정은 나에게 특별하다.
길에서 아들과의 시간을 영상으로 기록하려는 나의 집요한 시도의 배경을 아들이 알 턱이 없다. 휴대폰 영상으로 우리 두 사람의 모습과 음성을 남기려 하는데 아들이 쑥스럽다며 자꾸 도망간다.
그러나 나의 아들이 내 나이가 되어 우리가 찍고 있는 이 영상을 보게 된다면, 화면에 나오는 초로(初老)의 나의 모습은 이제 그의 모습이 됐을 터이고, 영상 속에 있는 어린 학생은 그가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을 그의 아들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들과 카미노 내내 찍은 영상은 아들이 40년 뒤에 보게 될 아빠의 '시네마 천국'이다.
오늘 나를 만나기 위해 내가 묵는 알베르게에 안 작가가 왔다. 채 낫지 않은 발로 무려 35km를 걸어서 왔다. 안 작가는 세 딸의 엄마이자, 공무원이자, 작가다. 막내딸 출산 후 산후 부기가 채 빠지지 않은 상태에서 카미노를 걷고 있었고 우리 부자와 로그로뇨에서 만났다.
셋이 같이 걷다가 메세타 지역에 당도했을 때 나는 아들을 런던에 데려다 주기 위해서 중단했고, 안 작가는 발가락 통증으로 메세타를 버스로 통과해 버렸다.
나는 다시 메세타로 돌아왔고, 안 작가는 레온에서 산티아고까지 나머지 구간을 걸은 후 버스로 통과한 메세타로 돌아와서 걷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도보 순례길의 온전한 완성을 위해서 메세타로 돌아와야 했던 것이다.
안 작가는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여전히 강렬한 뙤약볕이 남아 있는 저녁 6시를 훌쩍 넘겨서 도착했다. 안작가가 알베르게 문턱에서 쓰러지듯 주저앉자, 알베르게 주인장이 차가운 수건을 건네주며,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사하군에 도착한 모든 순례자들이 함께 만든 음식을 먹은 후 숙소 뒷산으로 떨어지는 석양을 같이 본다. 그게 100년 넘은 전통이란다.
아버지와 아들, 시네마 천국, 카미노의 인연, 100년의 시간, 살아 있는 정신은 무한한 시간과의 연결이다.
내 영혼의 치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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