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순례길 800 km #1
1월 개강 이후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갔다. 달라도 너무 다른 개성들의 집합인 나의 스터디 그룹 4 멤버들과 좌충우돌하면서 그럭저럭 과제도 제출하고 시험도 치르면서 어느 듯 여름 방학이 다가왔다.
그동안 고등학생 아들이 가끔 주말에 기숙학교에서 내가 있는 곳으로 나올 때면, 아이가 좋아하거나 내가 자신이 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고 아이와 와인 한잔씩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도했다. 내가 음식을 만들고 아들이 설거지를 담당했다. 우리 두 남자가 누구의 도움 없이 끼니를 해결해 나가야 하는 진짜 자취의 환경이 두 부자 사이에 놓여 있었던 심리적 장벽을 조금씩 허물수 있기를 바랐다.
두 달의 여름 방학 동안 뭘 할까 고민하던 6월 어느 주말, 마침 집에 와 있던 아들의 눈치를 보며 오랫동안 내 마음에 두고 있던 말을 꺼냈다.
"아들! 방학 때 뭘 할 거야?
뭘 하긴, 숙제해야지. 학교에서 주선해 주면 인턴도 하고 싶고.
그래? 음... 우리 카미노 갈까? 아빠 이 길을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었어.
으잉... 카미노가 뭐야?
카미노 데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몰라? 스페인 순례길. 프랑스 피레네 산을 넘어서 스페인 서쪽 끝에 있는 산티아고까지 800km 순례길.
헐... 800km? 얼마나 걸리는데?
하루에 20km씩 걸어도 40일 이상은 걸릴걸.
...
...
그... 그래... 생각해 볼게..."
그리곤 아들은 말이 없었다. 당연히 아들에겐 너무 힘든 길이고 또한 별 재미도 없는 길이다. 그것도 별로 친하지 않은 아빠와 40일 이상을.
나는 이 길을 10년 전부터 알았고, 너무나 아름다운 길임을 들었다. 언젠가 꼭 한 번은 가야 할 길이었다.
아들과 갈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길이다.
51세가 맞이한 두 달의 방학, 이 기회를 놓치면 내 인생에 다시는 갈 수 없는 길임을 직감했다.
몇 주가 지난 후 다시 아들이 내 거처로 왔을 때 물었다.
"아들! 생각해 봤어?
음... 생각해 봤는데, 학교에서 주선한 인턴을 해야 해서 가더라도 2주밖에 못 갈 것 같아.
그래? 좋아 그럼 2주만 가자. 그런데, 한 가지 더 부탁이 있어?
뭔데 또?"
...
...
...
한 참을 머뭇거리다가,
“400 파운드만 빌려줄래? 아빠가 취직하면 갚아줄게. “
"헐..."
그랬다. 퇴직금을 쪼개 쓰며 버티고 있었지만 난 늘 쪼들렸고 아들은 한국에서 친인척들이 주신 세뱃돈이며,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던 아들이 영국에서도 틈틈이 책 표지 디자인 알바를 하면서 모은 돈으로 자기 용돈을 충당하고 있었다.
그렇게 아들과 2주간의 까미노 여정을 합의하고 ‘헐’ 소리를 두 번이나 들으며 빌린 400파운드를 보태서 두 Boy 들만의 생애 최초 장거리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순례길 출발 후, 첫 며칠간 들뜬 기분에 내 능력치를 초과하는 속도로 걸었던 결과로, 일주일쯤 되자 발바닥 물집이 심하게 잡혔다. 어쩔 수 없이 카미노에서 첫 번째로 쉬어 가는 도시인 로그로뇨에서 하루 더 머물며 발바닥 물집을 치료하기로 했다.
로그로뇨 도착 이튿날, 순례자 숙소인 알베르게가 아닌 일반 숙소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곳에서 사달이 났다.
그날따라 아이가 우울해했고, 한국에 있는 자기 엄마와 페이스타임 통화 역시 시큰둥하게 해서 내가 한 소리를 했는데 아이가 갑자기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운다.
힘들었던 것이다. 내가 다 알 수 없는 그의 학교 생활이 힘들었던 것이고, 두 남자끼리 잘 지내려고 노력하는 것도 힘들었던 것이다.
아이는 한참을 울었다. 시원하게 울고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아서 인지 아이 표정이 한결 홀가분하게 보였다. 우리는 배가 고팠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을 때인데, 아이는 숙소 근처 마트에서 돼지고기를 사 오고, 나는 어제 봤던 중국 마트에 가서 쌀과 카레를 샀다. 그리고, 조그마한 인덕션이 있는 숙소에서 아이와 같이 밥을 하고, 돼지고기를 굽고, 카레를 만들어서 둘이 몸을 부대끼며 밥 해 먹었다.
아이와 첫 일주일 150km를 대면 대면 걸었고, 그날 후 나머지 일주일 150km를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걸었던 것 같다. 이유는 모른다.
아들이 당초 약속했던 2주를 넘겨 나와 걸어 주었다. 약속대로 아이의 여름방학 인턴 때문에 아이를 런던에 데려다주고, 나는 중단했던 순례길 지점인 메세타 지역으로 이번엔 홀로 돌아왔다.
아이가 여름 방학 인턴을 마친 후, 아내와 함께 산티아고 직전 마지막 100 km 지점에서 나에게 다시 합류했다. 아이는 순례길을 최종적으로 400km를 걸었으니, 딱 절반을 걸은 셈이다.
이래저래 두 달이 걸린 카미노 여름방학이 지난 후, 꼭 카미노에서의 시간 때문인지 알 수없지만, 아이가 나와 길을 걸을 때 더 이상 이어폰을 끼지 않는다.
우리 Boy 들 사이가 조금씩 좋아지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