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me that have never been..

내가 선택하지 못한 것들

by 불지않는 면빨

수업시작 후 모든 새로운 것들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반 친구들과 제법 친해졌고 그들의 배경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생각보다 훨씬 다양하고 재밌는 배경을 가진 친구들이 늦깎이 공부를 한다고 모여 있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내 익숙한 영역 밖의 다양한 세상을 경험한 친구들을 알게 되는 즐거움을 느낀다.


반 친구들 중에는 인도 육군병원 외과과장 (나와 같은 50대 초반의 최고령), 영국 유명 과학 매거진의 편집장, 영국 해병대 특전사 장교, 미국 하버드대학 로스쿨 강사, 스페인 전역에 영화관 500개 체인을 운영하고 있는 재벌 (?) 친구, 일본 아사히 티브이 음악프로 PD 등이 있다.


특이한 건 우리 반의 1/3 정도를 차지하는 여성들 대부분이 법률가다. 또한 그들 중 아무도 졸업 후 다시 변호사로 돌아갈 계획이 없단다. 결국, 그들 역시 Mid-career life에서 큰 변화 (Transformation)를 시도하기 위해 모인 친구들이다.


소위 중년의 격변기를 관통하고 있는 늙은 학생들의 프로그램답게 MBA 과목에는 없는 철학과목이 하나 있다.

바로 Biography 수업이다.


우리 자신들의 지난 온 삶을 반추하고 앞으로의 삶의 방향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는 취지의 수업인데 학점도 크지 않고 보통 이런 수업이란 게 알맹이가 없는 거라 모두 시큰둥해하며 마지못해 참석하는 분위기였다.


수업의 숙제가 각자 Pecha Kucha ('PK')를 PT 20 장 짜리로 만들어서 제출하는 것이다. Pecha Kucha는 일본어로 '쓸데없는 아주 작은 이야기 즉, 자기의 신변잡기'를 말한다는 의미로, 각자의 지금까지 인생 여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고, 많은 영향을 끼친 사건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원하는 사람은 자기 PK를 6~7분 내에서 반 친구들에게 발표해도 되었다 (물론 발표하면 좋은 성적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 반 친구들이 자원해서 발표하는 것을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PK 첫 발표날 두 명의 친구가 발표자로 나섰다.




첫 발표자는 영국 해병대 특전사 장교로서 해군의 장학금을 받아 본 과정을 밟고 있는 친구인데, 실제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보스니아 등 동시대 지구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에서 수행한 작전들을 소개했다. 특히, 이라크에서 수행한 작전으로 영국 군인으로서, 당시 미국 대통령 오바마로부터 백악관에 초청받아 대통령과 악수하는 사진도 소개했다.


그러나 모든 전쟁은 상처를 남겼다. 실제 아프간과 이라크 작전 중 폭탄이 터지면서 바로 몇 미티 앞에서 형제처럼 지낸 동료가 참혹하게 죽는 모습을 목격해야 했고, 깊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체격 좋은 군인의 이미지와 상반되게 성격이 유순하고 부드러워서 모든 친구들이 좋아했다. 본인의 PK 발표 후, 반 친구들이 전쟁터에서 동료들이 참혹하게 죽어가는 장면을 봤으면서도 어떻게 일상생활을 차분하게 유지할 수 있는지와 앞으로 계획을 질문했다. 친구 대답이 실제로 전쟁과 일상을 최대한 분리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고 졸업 후 군에 돌아가는 것보다 보안 관련 일을 하면서 자기도 아들을 영국사립학교에 보낼 수 있는 아빠가 되고 싶단다.


그 역시 더 할 수없이 빛나고 영광스러운 영국 해군 장교라는 타이틀을 버리고 민간인으로 전향하려고 한다. 인생이란 긴 항로의 중간 즈음에서 뱃머리를 크게 틀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발표자는 아래의 멘트로 시작했다.


It's Me that have never been
과거에 선택하지 않은 결과의 나


친구가 말하길,


"인생은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가 항상 있고 지금의 나는 그 선택하지 않은 길의 나이다. 지금의 나는 과거 내가 선택하지 않았거나, 선택할 수 없었던 결과의 나이다"


이 친구는 인도계 영국인으로 영국 최대 과학 매거진인 New Science 편집장 출신이다. 편집장 출신답게 달변이고 지식이 풍부하여 비록 자그마한 체구의 인도계지만, 반 친구들이 그의 지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나 역시, 출판과 디자인에 관심이 많은 아들 때문에 관련 산업에 대해서 자문을 몇 번 구했던 터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던 친구였다.


친구의 PK는 이어진다.


인도인 아버지의 외동아들로 3~4 살 때 영국으로 이민 오면서 겪은 삶은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 결과의 이고,


2000년 뉴욕 맨해튼 월드트레이드센터 100 층에서 일할 때 영국인 여자 친구를 만났다. 그녀와의 결혼과 뉴욕에서의 경력 중에서 고민을 많이 했지만, 결혼과 함께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1년 뒤, 뉴욕의 자기 사무실이 911 테러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지금의 나는 그때 뉴욕을 선택하지 않은 결과의 이고,


교실 대형 스크린 위의 PT 화면은 면사포를 쓰고 있는 아름다운 영국 아가씨와 고풍스러운 영국 성당에서 찍은 사진으로 넘어간다.


'so we got married and live happily ever after'


로 끝날 줄 알았는데 결혼 후 2년 만에 아름다운 반려자가 암으로 죽음을 맞이하면서 이것 역시 내가 선택하지 않은 현재의 이고,


911 사고를 절묘하게 피한 행운과 아름다운 부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란 불행의 극적인 대조에 우리 반 여자 친구들의 눈이 발갛게 충혈되기 시작했고 은퇴를 앞둔 노 철학교수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후의 방황, 외로움, 슬픔 등의 장면으로 이어진다. 잡지사 편집장으로 승진하고 첫 부인과 사별 후 다시 만난 두 번째 반려자의 모습 그리고 최근에 태어나 아직 강보에 싸여 있는 쌍둥이의 모습이 나오며 그의 PK는 아래의 멘트로 마무리되었다.


우리 인생에서 때론 두 번째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두 번째가 항상 두 번째 베스트 선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은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결과이고, 많은 경우 선택하지 않은 것이 자기 의지와 상관없는 경우가 많지만, 항상 최선의 선택을 위해 노력하고 있고 무엇보다 그러한 인생에 대해서 겸손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선택하지 않은 길,

선택할 수없었던 길,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길'


편집장의 사유 체계가 특이했다. 보통은 인생은 자기가 선택한 결과라고 얘기하는데 이 친구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혹은 선택하지 못한 것의 결과라고 뒤집어 보는 시각이 신선했다.


그의 말이 맞다. 우리가 자신의 인생을 다 만들어간다고 생각하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가며 죽는다. 많은 부분이 주어지고 정해진다.


다만, 최선을 다할 뿐이고 내가 정하지 못하는 인생에 대해서 겸손할 뿐이다.




페챠쿠챠 (PK) 발표 후 우리 반, 아니 학교 전체를 충격에 빠뜨리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우리 반의 한 친구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민머리의 강렬한 인상을 가졌지만 영국 최대 은행 HSBC의 시니어였고 명료한 발음과 지적인 질문이 내뿜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항상 수업시간을 주도했던 친구였다.


개인적으로는 세 아이의 아빠이자 이혼한 중년...


무엇이 그를 세상과 이별하게 했는지 알 수 없지만, 동년배 중년들이 용기 있게 고백한 자신의 페챠쿠챠도, 변화를 꾀하고 자 선택했던 갱생학교 과정도 그를 치유하지 못한 것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