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육아하기
나는 불과 6개월 전까진 공직을 왔다 갔다 하며 아이를 키우는 시간제. 직장맘이었다.
첫 입사부터 공직은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혀 주었고 그 옷은 엄마가 된 나에게 더더욱 허리를 졸라메게 하는 코르셋 같은 것이었다. 공무원답게 딱딱하고 융통성 없는 날들이 이어졌고 그런 나의 하루는 아이에게 줄 웃음과 여유까지 앗아가고 있었다.
하루하루 Must 일만으로도 24시간이 모자른 나에게 가장 소중한 아이를 어루만져 줄 10분조차 없이 그저 빠르게 흘러가는 그런 고된 날들이 이어졌다. 아이들에게는 하루의 계획과 시간을 맞추는 정답 있는 하루를 재촉해야만 했고 그 정답의 틀에 결국은 내가 스스로 갖혀버린 듯했다.
10년동안 언제나 마음속에서는 피어나는 내면의 무언가를 꾹꾹 눌러야만 하는 이 조직생활이 나와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이것 뿐이었고, 말 그대로 생계를 위해 그렇게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 엄마가 된 내가, 아이에게 나의 그런 마음이 내비춰질 때면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알 수 없는 내면의 아우성이 거세게 일어났었다. 그럼에도 또 다시 현실에 맞춰 살아갔지만 내가 숨쉴 수 없는 만큼 내 아이의 숨구멍도 점점 조이고 있다는 것이 진짜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이것이야 말로 내 인생을 죄없이 감옥살이 하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결단이 필요했다. 세상 풍파는 없지만 계속해서 이 곳에서 살아갈지, 신선한 바람을 맞으며 살아갈지 말이다. 나는 세상풍파 맞으며 살아있는 엄마로 살아가기를 택했다.
그렇게 곤욕스러운 감옥살이를 마치고 용기있게 밖으로 나온지 반년이 지났다.
그리고 6개월이 흐른 지금 나는 무엇이냐고?
바로 self 플로리스트가 되어가는 중이다. 이 목표를 잡고 이 길을 걷기까지는 험난한 고민과 고뇌의 시간들이 있었다.
그 시간들은 아마도 따로 이야기하기로 하고, 꽃을 만지면서 나는 진짜 생명력 있는 육아가 무엇인지 느끼고 있다. 너무 정반대의 공간속에 오랜 시간 있다 나왔기 때문일까?
하루하루 꽃에 대해 알아가면서 나는 이제야 살아 숨쉬는 삶을 알게 되었고 그 삶속에서 살아 숨쉬는 진정한 육아에 대해 다시한번 깨닫고 있다.
매 순간순간 꽃을 만지며 아이들이 얼마나 꽃과 닮았는지 그리고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꽃선생에게 배워가고 있고 앞으로도 나는 꽃으로 육아를 할 생각이다.
꽃과 아이는 이렇게도 닮았다.
관심이 없을 땐 다 거기서 거기고 그저 이쁘다 하고만 지나갔던 꽃들이 이 정도였나 싶을 정도로 그 종류가 방대하다. 그 어떤 것도 같은 것이 없다. 그 어떤 것도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바로 우리 아이들처럼
그리고 다루기 쉬워 보이는 이 작고 여리한 것들이 어찌나 다루기가 어렵고 까다로운지 그 또한 아이와 같다.
소리없이 성장하기도 하고 소리없이 조용히 시들어 가기도 한다.
마치 아이의 마음과도 같다.
그래서 깊고 유심하게 살펴보지 않으면 작은 상처가 보이지 않고 그 상처로 인해 점점 싱그러움을 되살릴 수 있는 시기를 놓쳐버린다.
다만, 다른점이 있다면 우리 아이들은 처음에는 응애응애로 시작해서 칭얼칭얼 대기도 하고 눈물로써 자기의 감정을 표현한다면 꽃은 그저 묵묵히 받아주기만 하는 애늙은이 아이 같다.
하지만 아이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양육자 앞에서는 우리 아이들은 이 애늙은이 꽃과 또 다시 같아지지 않는가?
꽃은 보기엔 여리여리하지만 줄기가 단단하여 생각보다 건강한 꽃이 있는가 하면, 굉장히 화려하고 통통한 줄기를 가지고 있지만 단단하지 못하고 작은 온도에도 민감하여 손 닿으면 바로 변하는 튤립같은 그런 연약한 꽃들이 있다.
혼자서는 초라하지만 함께하면 누구보다 아름다운 안개꽃이 있는가 하면 한 송이로도 그 위력을 발휘하는 해바라기도 있다.
우리들은 그런 여러가지 꽃들을 보며 그 꽃의 특성에 맞게 다루어준다. 따뜻한 물을 좋아하는 꽃은 따뜻한 물을, 차가움을 좋아하는 꽃들에겐 냉장고에 넣어 그 본연의 아름다움이 지지 않도록 섬세하게도 길러내야한다.
왜 혼자서 따뜻한 물을 좋아하느냐고 유난을 떠느냐고 비난하지 않고, 더운 여름날 차가움을 좋아하는 꽃에겐 시원한 방한칸이라도 다 내어줄 심산이다.
안개꽃에게 왜 해바라기처럼 크지 않냐고 나무라지 않고 해바라기에게 왜 얼굴이 이리도 크냐며 나무라지도 않는다. 비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안개꽃은 안개꽃이고 해바라기는 해바라기일 뿐이다.
그런면 나를 포함 우리 부모들은 이처럼 꽃과 같은 우리 아이들에게도 꽃처럼 대해주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차가움을 원하는 아이에게 따뜻한 물을 강요하기도 하고, 따뜻함을 요구하는 아이에게 냉랭한 찬바람을 일으키기도 한다.
키가 작은 아이에게 좀더 커야한다고 세상의 잣대를 들이밀고 공부를 못하는 아이에겐 옆집 아이 이야기를 거들먹거리며 그에 반만큼은 따라가야 한다며 재촉한다.
안개꽃에게 해바라기만큼 얼굴이 커지라 하면 그럴 수 있을까?
과연 안개꽃의 얼굴이 해바라기만큼 커지면 그 안개꽃은 여전히 아름다울까?
해바라기에게 안개꽃처럼 소복소복한 느낌으로 작아지라하면 그게 가능할까? 가능하다해도 여리여리해진 해바라기가 과연 혼자만의 아름다움을 내뿜을 수 있을까?
꽃과 같은 우리 아이들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장미같은 아이에게 날카로운 가시를 다 떼어내버리고 나면 그 아이의 매력이 남아있을지,
둥글둥글 겹겹이 쌓인 것이 매력인 라넌큘러스 같은 아이에게 너무 복잡하니 심플하게 꽃잎 몇장만 남겨두자한다면 과연 그 겹겹의 둥근 아름다움이 남아 있을지,
온도에 따라 오므렸다폈다하는 신비하고 섬세한 튤립같은 아이에게 언제나 꿋꿋한 선인장처럼 일관되길 바라면 그 신비하고 오묘한 매력이 과연 남아있을지,
아이들에게 같음을 요구하고 다름을 버리고자 한다면 그것은 되지도 않을 뿐더러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세상을 잃도록 강요하는 것과 같다고 꽃의 세상을 보며 깨달았다.
모두다 시들어버려 사막같은 세상을 만들어 버리고자 하는 것과 다름 없다는 것을 꽃의 세계에 비유해보면 알 수 있다.
공무원 엄마로 살아가던 시절에는 정답이 있어야 했다.
색깔은 어때야 하고 크기는 어때야 하고 어떤 향이 나야하고 시들시들 나약하면 안되고..등등 여러가지 정답이 있었다.
나의 아이가 어떤 꽃인지 모르고 나라는 환경에 맞춰 그저 틀 안으로 아이를 밀어넣으려 했던 것이다.
'밥 잘먹고 잠 잘자고 씩씩하게 놀아야하고 키는 커야하고 공부도 적당히 했으면 좋겠다' 란 나의 작지 않은 작은 소망 때문에 아이들을 사막에 놓인 꽃으로 만들어 버릴 뻔했다.
모두다 시들어 버릴 뻔했다.
꽃선생이 나에게 일러준 아이는 꽃과 같음을 조금이라도 함께 느끼고 꽃으로 육아하는 세상으로 함께 나아가고 싶다.
그래서 모든 아이들이 자신만의 이름을 가진 나다운 꽃으로 성장하여 형형색색의 꽃밭을 이루는 세상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며
나는 오늘도 공무원 엄마보다는 플로리스트 엄마가 되어 신선한 바람 맞으며 꽃으로 육아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