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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일은 나와 친분이 있는 모기업 임원님에게 직접 와있었다. 원래 이런가?라는 의문이 들지 않았던 이유는 그분과 내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있다.
나는 투자 유치를 목적으로 네트워킹하는 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서로가 좋아하는 모습만을 보여주려 행동하는 그곳에서 피로함을 많이 느꼈다. 투자를 받음으로써 더 많은 고객에게 가치를 제공할 수 있는 기업도 물론 있다. 다만, 내실은 전혀 없고 투자를 받는 것이 사업을 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부류의 인간들이 있다. 사업을 한다는 것은 '가치를 제공하고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는 것'이다. 본인 회사 제품이 어떤 고객에게 필요한지도 정의하지 못하고 그저 '투자를 받고 마케팅에 힘을 쏟으면 많은 고객이 사용할 것이다.''라고 말하면 조용히 거리를 뒀다. 그렇게 투자받은 돈은 본인 품위 유지비로 제일 많이 가져간 후 사무실 임대료, 직원들 월급 등 숨만 쉬어도 나간다는 표현 그대로 사라진다. 실제로 이런 식으로 잠잠해진 인간들이 많았다. 이런 이유로 내실을 단단하게 하는 것이 나에게는 기본이었다. 어떤 투자도 없이 매출 만으로 회사를 키워왔다.
0 임원님과의 친분은 과거 휴식을 위해 떠난 해외여행에서 시작되었다. 둘 다 혼자 생각할 시간을 가지기 위해 사서 고생을 하고 있었다. 한국인은커녕 동양인도 보기 힘든 장소에서 만난 0님은 내가 되고 싶은 어른, 그 자체였다. 각종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가 서로의 인간적인 매력에 매료되었다. 그렇게 10살 이상의 나이 차이와 무관하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사실 0님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한국에 온 후였다. 우린 신기하게도 일에 관한 이야기는 했지만 그 가치관을 중심으로 이야기했기 때문에 서로의 위치는 모르고 있었다. 그저 "저 사람도 사업을 하는구나."라고 마음속에서 생각을 했을 뿐.
귀국 후 바쁜 일상을 보내다 문득 0님이 생각났다. 안부인사 겸 전화를 드렸더니 집에 초대해 주셨다.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모기업 임원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분명 본인 사업을 하는 대표이겠거니 예상했는데 의외였다. 그분은 내가 대표라는 사실도 알고 계셨고 회사 규모까지 정확하게 예측하고 계셨다. 사업에 있어서 조언을 구하고 싶으면 그분을 찾았고 그 후로 종종 저녁을 함께 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런 사람에게 메일이 왔으니 나에게는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었다. 메일을 임원들과 공유했고 긴 회의를 했다.
사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에는 내가 원하는 액수에 맞춰 엑싯을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일이 좋아졌고 직원들이 좋아졌고 회사가 좋아졌다. 이렇게 몰입해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분명 내가 고생해서 낳은 내 자식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엑싯 계획은 희미해졌고 더 잘 키우기 위한 고민 만을 해왔다. 이런 내 마음을 전부 알고 있는 0님이었고 그렇기에 인수 조건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직원들과 회사를 위해 할 수 있는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 더 큰 자본이 든든하게 뒤를 받쳐주니 우리는 더 많은 고객에게 더 많은 가치를 제공할 수 있다. 인수 과정은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우리 성장 속도는 더 빨랐다.
분명 내 자식이지만 내가 컨트롤하기에는 너무 커버렸다. 회사가 계속해서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아픈 마음은 뒤로하고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이 정도 규모의 회사를 더 큰 규모로 성장시켜 본 사람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