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방법
물방울 작가로 알려진 김창열 작가, 2021년 타계할 때까지 꾸준히 물방울을 그려온 그가 표현하려던 것은 무엇일까?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일까? 단순히 극사실 작가로서 물방울을 생생하게 포착하는 것에만 집중한 것은 아닐 것이다. 콜렉터로서 혹은 관객으로서 작품을 제대로 읽을 수 있으려면 작가가 살아온 발자취를 살펴보면 도움이 된다.
1929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난 김창열은 16세에 월남하여 이쾌대(1913~1965)가 운영하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그림을 배운다. 그 후 1948년 서울대 미대에 입학하였으나 6.25 전쟁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게 된다. 작가는 참혹한 전쟁을 겪으며 사람이 죽거나 총알로 인해 사람의 육체가 뚫리는 장면을 보며 트라우마틱한 경험을 하게 된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상흔 자국 하나하나가 물방울이 된 것이에요. 물방울은 가장 가볍고 아무것도 아니고 무(無)에 가까운 것이지만 그 상흔 때문에 나온 눈물이에요. 그것보다 진한 액체는 없어요."
1969년 파리에 간 김창열은 마치 운명처럼 캔버스에 맺힌 물방울을 마주하게 된다. 완성된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는 캔버스를 재활용하기 위해 물을 뿌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햇빛에 반사된 물방울을 본 김창열은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되며 반평생 물방울을 그리는데 전념한다. 물방울에는 과연 어떤 의미가 담겨 있기에 그를 한 번에 매료 시킨 것일까? 물방울은 물과 다르게 하나의 주체로서 빛나기도 하고 어떤 형태를 투명하게 투과하여 보여주기도 하지만 곧 이내 공기로 증발하여 소멸해 버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김창열은 물방울을 캔버스, 마대, 신문지, 나무판, 천자문 등 다양한 소재에 그려내는 변화를 모색하지만 물방울만은 변함없이 50년동안 꾸준히 그려 냈다. 그에게 물방울이란 유리 구슬처럼 반짝이는 아름다운 존재 그 이상일 것이다. 전쟁과 죽음, 고향을 떠나 해외에서의 삶은 결국엔 끝이 있고 무(無)로 돌아간다는 자신의 경험과 깨달음이 물방울의 속성과 닮아 있어 그럴 것이다. 마치 도를 닦는 수행자처럼 물방울을 반복적으로 그리며 이미 세상을 떠난 이의 넋을 위로하고 자신의 번뇌와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함이다.
1990년대부터 김창열은 어릴 때 할아버지에게 배운 추억이 있는 천자문과 도덕경을 바탕으로 물방울을 그린 '회귀’ 시리즈'를 선보이게 된다. 무위자연 사상을 물방울에 투영시키며 자신의 철학을 확고히 하며 수행자 역할을 수행해 나간다. 과거의 기억, 고향에 대한 그리움 위에 물방울을 그려 넣으며 어느 것이든 인위적으로 바꿀 수 없으며 한때 아름답게 빛났지만 끝을 받아들여야 함을 나타내고자 한다.
작가의 인생을 돌아본 후 작품을 마주하게 되면 극사실로 묘사된 물방울이 단순히 예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슬퍼 보일 것이다. 반짝이며 소멸되기를 기다리는 물방울이 마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의 인생 같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무로 돌아가기 때문에 더욱더 아름다운 존재들에게 김창열은 물방울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해 자신의 인생 철학을 전하려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