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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Nomadic Person Jun 01. 2023

도자기가 다비드상이 되기까지

이수경의 Translated Vase

Installation View of Translated Vase, 2009


우리에게 도자기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어릴 때 교과서에서 배웠던 고려청자와 조선시대 백자일 것이다. 혹은 집에 장식품으로 놓여 있거나 박물관에 전시된 옥색 빛의 매병이나 흰 빛깔의 달항아리 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밥과 국, 반찬을 담는 그릇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 생활에 친근할 정도로 침투해 있는 이 도자기라는 소재는 과연 파인아트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옛 모형을 똑같이 구현하거나 기능성이 있어야 하기에 공예품일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작가 이수경은 깨진 도자기 파편을 모아 붙여 그녀만의 새로운 조형물을 만들었다. 이 파편들은 도공들이 완벽한 도자기를 재현하지 못하였을 때 부셔서 생겨난 것으로 그저 버려지는 존재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작가는 서로 다른 모양과 모티프를 가지고 있는 파편들을 금박으로 이어 붙여 새로운 형태를 만들었고, 도자기도 파인아트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작가의 작품 타이틀은 Translated Vase로서 공예품이라 취급하는 도자를 그것도 완벽하지 못하여 버려지고 쓸모 없어진 조각들을 금박으로 봉합하여 “번역된 도자기”라는 이름으로 재 창조 시켰다. 일반 우리가 생각하는 도자기 모습과 다르게 그녀의 작품은 추상적이다. 주렁주렁 열린 포도송이 같기도 하고 거대한 비누방울 같기도 하다. 아니면 우뚝 서 있는 사람 같기도 하다. 부숴진 도자기를 이어 붙였지만 날카롭지 않고 도자기가 가진 둥근 성질로 유기적 형태를 띄고 있으며 리드미컬하기까지 하다. 또한 작가는 시대와 스타일에 구애 받지 않고 청화백자, 분청, 청자, 옹기 등 다양한 도자를 자유롭게 콜라주처럼 배열하였다. 작품 안에는 기존의 도자와 다르게 여러 형태의 모티프들이 등장한다. 물고기, 새, 용, 모란 등 한 도자기 안에는 하나의 주제로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는 법칙을 거부하고 부분적으로 보이는 여러 형태의 모티프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어울러져 시각적으로 다채 롭기까지 하다.


그녀가 말하는 “번역하다”의 의미는 무엇일까? 서양인들이 알아볼 수 있게 우리의 미술을 서양의 스타일로 번역시킨 것을 말하는 것일까? 작가는 마치 르네상스 시대의 미켈란젤로가 다비드상을 대리석으로 조각한 것처럼 도자기를 이어 붙여 단상에서 우람한 몸체를 뽐내고 서 있게 만들었다. 다비드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다윗으로서 어린 소년이 작고 여린 신체조건에도 불구하고 거인 골리앗을 물리친다는 권선징악 같은 내용이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이 어린 영웅을 높은 단상에 서 있는 2m의 키를 가진 완벽한 신체조건의 성인 남자로 표현하였다. 이수경 작가는 완벽하지 못하여 쓸모 없어진 도자기 조각들을 24k 순금을 이용하여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표현하였다. 이 도자기 조각들은 마치 다비드상처럼 당당하고 불완전하지 않다. 마치 미켈란젤로가 대리석으로 다비드상을 조각하고 높은 단상에 세워 경외심을 부여한 것처럼 이수경 작가는 깨지고 약한 도자기 조각들을 하나의 재료로서 완전하게 만들어 관객들에게 도자기의 거대한 존재감을 부여하고 있다. 단상에서 자신의 다양한 문양을 뽐내는 하나의 형태가 된 도자기가 관객들의 존경을 받기 위하여 서 있게 만든 것이다. 웅장한 탑과 같은 이 우람한 유기체 모형의 도자기 조각들은 관객들에게 압도감을 선사한다. 밑으로 내려다 보던 책장에 올려져 있는 많은 물건 중 하나인 공예품이 아닌 시선을 위로 올려 하나의 작품으로서 우러러보게 만들었다.


 Nine Dragons in Wonderland in the 57th Venice Biennale


한국의 미술은 서양처럼 다양한 미술사조와 스타일 그리고 그 미술을 해석하는 방법론이 없었다. 그러나 도자기는 다르다. 동양이 서양보다 우위에 있었다. 17-18세기 유럽에서는 Chinoiserie(시누아즈리)라 하는 중국풍 도자뿐만 아니라 도자기에 새겨져 있던 건축 스타일, 모티프까지 인기를 끌었었다. 19세기에는 중국의 명나라가 망한자 일본이 만들어낸 도자기와 그것을 덮던 포장지였던 우키요에가 인기를 끌며 프랑스 인상주의에 큰 영향을 끼친 Japonism(자포니즘)을 만들었다. 사실 이 자포니즘 문화는 조선의 도공들이 이끌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진왜란(1592-1598)은 다른 말로 도자기 전쟁이라고 한다. 그 당시 일본은 자신들이 선망하던 이도 자기를 얻기 위하여 많은 도공들을 납치하였다. 그 중 이삼평과 백파선은 일본에서 백자를 만드는데 성공하였고 이를 아리타 자기라 하였다. 유럽과 미국의 많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일본 도자기는 거의 대부분 아리타 자기로서 일본의 최초 청화백자이다. 그만큼 동양의 도자기는 서양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예술작품 이었고 그 중심에 한국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도자기가 서양이 패권을 쥐면서 공예품으로 전락해 버렸다. 즉 경제적, 문화적 패권을 서양이 갖게 되면서 파인아트는 Oil on canvas가 되었고 동양의 파인아트인 도자기는 공예품이 되어 버렸다. 문제는 우리가 그 패권을 따르고 모방하고 있다. 그들의 문화와 미술이 우월하다고 믿고 따라하려 하며 우리의 것을 무시하는 행위를 지금까지도 하고 있다.


이수경 작가가 말하는 “번역하다”는 단순히 서양인들의 눈에 맞게 도자기를 해석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지금 세대를 위한 언어이다. 한국 전통미술에도 파인아트가 있었고 오히려 유럽인들이 열광하던 작품이었다고 알려주는 것이다. 현재 우리들이 생각하는 파인아트는 무엇일까? 대리석 혹은 청동으로 성서나 그리스 로마 신화 내용을 조각한 것은 파인아트가 되고 도자기에 용을 그린 것은 공예품 혹은 유물이라고 한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미술을 낮추어 생각하고 서양의 개념에 맞 추어 한국미술을 끼어 맞추려 하는 것이다. Frantz Fanon(프란츠 파농)의 저서 Black Skin, White Mask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보면 프랑스 식민지를 벗어 난지 몇 십 년이 흘러도 흑인들 스스로 흑인은 열등하고 백인은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통용되는 가치 기준을 백인이 만든 것이기에 그들의 언어, 문화가 우월하다 생각한다. 자신들만의 문화와 역사가 식민지로 인하여 부정 당하고 없어졌기에 백인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들의 백인다움을 보이려 애쓴다는 것이다.


마치 한국의 역사와 비슷하다. 우리는 일본에게 식민지배를 35년간 받았다. 일본은 산에 말뚝을 박고 경복궁과 덕수궁을 허물었으며 창경궁은 동물원으로 변하였다. 한국식 이름을 쓸 수도 없고 글도 쓸 수 없었다. 우리의 자아를 없애 버린 것이다. 또한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 가마터는 부숴졌고 도자기와 부처 조각상은 손상을 입거나 약탈당하였다. 그들은 잔인하고 철저하게 한국 미술과 문화의 대를 끊고 말살하였다. 해방된 후 바로 그 지배자를 이긴 국가인 미국의 지배를 다시 받으며 급속도로 서양문화를 받아들였다. 우리의 전통미술과 문화는 비참한 역사를 겪으며 50년 이상 끊겨 있었다. 그 기간은 지금 세대의 사람들에게 한국에 미술이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한다. 서양 미술사조는 알아도 한국의 미술사조는 알지 못한다. 오히려 우월한 서양인들처럼 보이기 위하여 그들이 정의한 미술의 개념에만 집중한다. 현재 한국에는 현대미술과 유물, 유적지만 있을 뿐이다. 그 둘은 도자기 파편처럼 조각난 상태로 버려져 있다.


이수경 작가가 도자기 파편들을 하나의 형태로 만들기 위해 적용한 기법은 24k 순금으로 깨진 칠기나 도자기를 봉합하는 일본 전통 기법인 kintsugi (킨츄기)이다. 일본은 무로마치 시대 (1336-1573) 부터 Zen Buddhism(선종)의 영향을 받은 wabi-sabi(와비-사비)가 전통 문화이자 미학이 되며 chanoyu (일본전통 차 예법)를 중시하게 되었다. 그들은 다완이 깨지면 버리기 보다는 완벽하지 못한 불완전한 상태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하여 오히려 깨진 부위를 금박을 입혀 강조하였다. 그 당시 일본 문화를 가장 잘 표현한 조선식 다완은 귀족들 사이에서 존경을 받는 스타일로 자리잡게 되었다. 하지만 이 다완은 조선에서는 서민들이 밥그릇으로 사용되었기에 투박하고 색깔도 희지 않아 무시당하던 도자기였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는 완벽하지 못함을 아름답게 여기어 지금까지도 사랑받게 만들었다. 즉 투박한 밥그릇이 누구에게는 아름다움일 수 있고 미의 정수로서 최고라 칭해 질 수 있는 것이다. 이수경 작가는 마치 그 시대의 일본인들처럼 깨진 사금파리도 아름답게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불완전한 아름다움을 극대화 시키기 위하여 금박으로 여러 색을 가진, 여러 모티프를 가진 도자기 파편들을 이어 붙였고 관객들에게 당당히 현대작품으로서 선 보였다.


일제침략기와 모던화를 겪으며 조각나고 투박한 한국미술은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름다울 수 있고 이것은 오히려 귀히 여겨질 수 있다. 매끄럽지 못하고 결함이 있지만 그것도 우리가 겪은 역사이고 부족하기 때문에 느껴지는 특유의 질감일 수 있다. 이수경 작가는 “전통을 새롭게 해석하였다 라는 말을 싫어한다” 하였다. 그녀는 단순히 전통 도자기를 서양식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번역한 것이다. 서양미술에만 젖어든 우리에게 도자기도 우리의 파인아트 재료라는 것을 번역하여 일깨워 주는 것이다. 지금은 공예품이자 옛날의 유물로 전락해버린 도자기 이지만 유럽의 대리석과 같은 우리의 순수미술 재료이었고 전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미술작품 이었다고 알려주는 것이다. 깨지고 버려진 사금파리를 금박으로 붙여 거대한 존재로 만들고 단상에 세운 것처럼 한국의 미술도 과거와 현재가 분열된 채로 깨져 있지만 그것을 오히려 우리 스스로 아름답다 여기고 봉합하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수경 작가의 번역된 도자기는 우리에게 도자기도 물이나 술을 담는 그릇 이상이었고 미술관에 당당히 서 있는 다비드상이 될 수 있다는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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