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투자은행 직장인 이야기 : 돈이 전부인 회사
글로벌 투자은행에는 없는 것 : WHY
"그래서 이번주에 얼마를 벌었어?"
이것이 내가 다니는 글로벌 투자은행에서 하는 주간 회의 내용의 전부이다.
현재 한국 시장 상황이 어떠했는지, 한국 고객들은 어떤 상품을 찾고 있는지 , 최근 우리의 경쟁사는 한국 시장에서 어떤 상품을 팔고 있는지 등등 나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회사와 나의 비즈니스를 장기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지에 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게다가 나의 회사는 한국에 진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 글로벌 투자은행이다. 당장의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기적 계획을 가지고 회사가 어떻게 하면 안정적으로 수익을 낼 수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주간회의에서 나의 보스가 물어보는 것은 늘 똑같은 질문이다.
"그래서 얼마를 벌었는데?"
사모투자의 세계는 보통 2-3달간의 호흡으로 딜이 움직이고, 성사된다. 즉 담당 매니저가 새로운 딜을 발견하며, 이를 투자자에게 소개하고, 투자 분석을 하여 최종적으로 Closing, 즉 실제 돈이 투자되기까지는 최소 2달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게다가 인프라 같이 수 조원 단위의 투자금액과 다수의 투자자가 참여하는 경우에는 길게는 6개월 이상이 소요되기도 한다. 따라서 사모투자에서는 당장의 돈을 버는 것보다 담당 매니저가 어떤 딜을 가지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게다가 연초에 5-6개의 딜을 가지고 시작을 하더라도 여름 전까지 절반이라도 Closing 시킬 수 있다면 굉장히 뛰어난 실력의 매니저이다. 그만큼 중간에 변수도 많고 Closing까지의 과정이 매우 험난하다. 그래서 나는 늘 이런 표현을 쓰곤 했다.
"Closing을 위해 인간의 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을 90%까지이다. 나머지 10%의 성공은 하늘에 맡기는 거다."
따라서 사모 투자의 세계에서 돈을 버는 것은 중, 장기적인 전략을 세우고 이를 꾸준하게 밀고 나갈 때에 비로소 성취되는 결과이다. 당장 월요일에 투자자한테 투자 제안서를 보낸다고, 그 주 금요일에 투자자가 돈을 보내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장기적인 비즈니스 계획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것이 시장의 수요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에 한국 기관투자자들은 해외 부동산 투자에서 많은 손실을 입었다. 그리하여 투자 수요는 빠르게 해외 사모대출로 옮겨 갔다. 그리고 이를 발 빠르게 눈치챈 경쟁사들은 사모 대출 투자를 국내 기관투자자들에게 소개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
나는 입사 후 1년 넘게 나의 비즈니스 활동과 한국 투자자들의 수요 상황을 Weekly Report로 작성하여 매주 금요일 퇴근 전까지 보냈다. 한국에서 사모대출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있고, 심지어 어떤 경쟁사가 최근에 한국 투자자에게 어떤 딜을 소개해주었는지까지 다소 비밀에 가까운 정보까지 나의 보스 및 내부 관련자들에게 빠짐없이 매주 이메일로 보냈다. 그러나 약 1년 전 나의 맥이 탁 하고 빠지는 사건을 경험하고 나서는 더 이상 만들지도 보내지도 않았다.
어느 날 나의 보스 이메일로 이런 메일을 보냈다.
"최근에 한국 투자자가 투자한 사모대출 건이 어떤 게 있는지 나에게 조사해서 보내줘"
세상에! 내가 1년 넘게 한국 투자자가 어떤 사모 대출에 투자하고 있는지 매주 보내줬는데, 이게 무슨 말인가?
"영업직원의 실적인 부진한 것은 갑자기 그가 영업방법을 까먹어서가 아니다. 자신의 영업 능력에 대한 '믿음과 기대'를 잃었기 때문이다 "
- 밥 프로터, 부의 원리
결국 나는 내가 회사에서 매주 작성한 Weekly Report가 나의 성과로 연결될 것이라는 믿음과 기대를 상실하였다. 그리고는 이 활동을 중단하였다.
"모든 위대한 기업은 WHY로부터 시작한다."
- 사이먼 시넥. Start with WHY
나는 이 회사에서 일하기 전 약 10여 년간 3군데의 한국 회사를 다녔다. 한국 회사들은 공통적으로 매년마다 하는 의식이 있는데, 바로 신년사이다. 신년사에서는 보통은 사장이나 은행장 같은 그 조직의 가장 높은 사람이 나와서 회사의 미션을 설명한다. 사실 주니어 시절에는 그런 말들이 뜬구름 같은 이야기 같았고, 전혀 현실에 와닿지 않는 나이 많은 꼰대 사장님의 일장 연설 같은 느낌이었다. 주로 내용은 "고객 감동을 실천합시다." "업계 최고의 1등 회사로 만듭시다." 등등 같은 말들이다.
나는 2016년부터 2021년까지 약 5년간 국내 은행 계열사의 운용사에 사모펀드 매니저로 근무했었다. 당시 회사는 기존 Private Equity 중심의 사업에서 글로벌 사모 대체투자 - 부동산, 인프라, 인수금융으로 사업 부문을 확대했고, 나는 글로벌 부동산팀을 이끌면서 수많은 사모 펀드를 만들고 운용했다. 그 시절 사장님의 신년사는 늘 똑같았다.
"블랙스톤 같은 글로벌 최고의 사모투자 운용사가 되자."
그 당시에는 잘 느끼지 못했지만, 지난 세월을 함께 한 팀원들과 같이 소주 한잔을 기울이며 지난 이야기들을 하다 보면 그 당시 우리 팀, 그리고 회사의 모든 직원들은 그 말을 마음속 깊이 자부심으로 간직하고 살았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글로벌 최고의 사모펀드 매니저처럼 일했다. 뜬구름 같은 말이었지만, 어쩌면 헛되이 외치는 사장님이 구호 같았지만, 그래도 그 회사에서는 최소한 우리가 일을 하는 WHY는 존재했던 것이다.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글로벌 투자은행 역시 주기적으로 Townhall Meeting이라는 형태로 주기적으로 Top Management가 나와서 회사의 현황을 설명한다. 여기서 하는 메시지는 늘 똑같다.
"올해 수익 목표는 작년 대비 25% 성장하는 것이고, 이를 도달하려면 더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각 부서별로 할당된 실적을 얼마나 채우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놀랍게도 이게 끝이다. 그나마 한국 회사들이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내세우는 미션이나, 회사가 추구하는 방향 등 WHY에 대한 소리는 놀랍게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나의 보스의 보스인 만큼 좀 더 큰 그림을 말하고 있기는 하다.
"그래서 이번 달에 얼마 벌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