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31.
나는 실패를 정말로 못 견디는 것 같다.
성공의 역사, 더 정확하게는 '성공으로 보이는 역사'를 너무 오래 겪어왔다.
솔직히 작년까지만 해도 평점 4.5 안 나오면 죽는건 줄 알았다. 지난 수 개월 간 많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내가 기록한 높은 성적을 말할 때 은근한 자만심이 밑바탕에서 끓고 있었는데, 지금은 성적이나 학력이나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어느정도 체화가 되었다.
명백하게, 우리 아버지께서는 학력 콤플렉스가 있었다. 대학교에 매우 아슬아슬하게 떨어져서, 고졸로 기술직을 맡고 있다는 사실에 약간의 박탈감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사소한 지식 하나 아는 것에 매우 집착하셨다. 자신은 아는데 남은 모르는 게 있으면 그게 자신이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임을 증명한다는 듯이, 타인의 지적인 단점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깎아내리는 것이 이제는 아버지의 지워내기 힘든 습관이 되었다.
그 습관이 나에게도 자주 향했었다. 아버지의 마음 한 켠에는 나에 대한 깊은 자부심과 기대감. 자식 중 누군가가 사회적으로 몹시 성공한 사람이 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막내 아들인 나일 것이다, 아니면 더 나아가서, 막내 아들인 나는 분명히 성공할 것이다. 앉아서 편하게 많은 돈을 벌고, 남들에게 무시받지 않는 직업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투명하게 표현해서 '열등감'에 가까운 감정을 이따금씩 나를 향해 표출하곤 하셨던 것 같다. 인정욕이 몹시 커서, 무언가 칭찬받을만한 일이 있으면 엄마부터 쳐다보는 아버지의 성격 상, 중고등학교에서 줄곧 가장 높은 성적표를 받아오고 명문대에 진학한 내가 '헛똑똑이'임을 증명하는 것은 곧 비록 아버지 본인이 명문대를 나오지는 못했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분야에서 지적인 능력을 두루 갖춘 '진정한 똑똑이'임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내가 어떤 말을 하는데 그 속에 들어가있는 지식이 본인 생각에 '헛소리'이면, 일단 비웃고 보셨다. 그러나 내 말은 대부분 올바른 지식이었다.
내 생각에 그것이 나에게 독이 되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갖고있는 것과 똑같은 열등감, 그리고 '지적으로 인정받아야한다'는 강박증을 나에게도 심어주었다. 학창시절에 전교1등은 나의 존재 가치였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이 공격받는 일은 내 존재를 위협하는 일이었고, 그렇기에 외면하거나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남이 내가 한 작업에 대해 혹평하거나 무시하는 것을 보면, 감정이 밑바닥까지 내려간다. 정서적으로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 여유가 체화된 또래 친구들에게는 이런 기질이 없다. 오히려 혹평을 바란다. 자신의 지위를 억지로 올려놓지 않아도, 스스로가 당연히 존재 가치를 지닌다는 생각이 깊이 뿌리내려 있다. 그런 사람들은 본인의 재능이 허락하는 곳까지 매끄럽게 성장한다. 나는 어느 길을 달리든 오프로드처럼 덜컹대니 성장이 자주 정체되는 것 같다.
막말로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이 나에게 딱 어울린다. 학벌이 좋고, 성적이 높고, 몇몇 지식들을 갖고 있고, 이런저런 꿈이 있고, 이런저런 것들을 할 줄 아는 사람. 막상 내용물이 있는가? 나는 아직도 삶을 찾아 헤매고 있다. 아직 나에게는 온전한 나만의 삶이 없다. 불안과 열등감으로부터의 완벽한 은신처가 없다. 영원히 없으려나? 작년까지는 삶이 한 20% 정도 있었고, 지금은 50% 정도 있다. 100%에는 도달할 수 없더라도 내년까지 80%까지는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일단은 분명히 삶이 매우 빠르게 개선되고 있다. 가끔은 신기할 정도로. 하긴 고등학생 때 침대에 누워서 매일 하던 생각이 "이대로 눈 감고 영원히 못 일어났으면 좋겠다"였는데 스스로를 성실히 되돌아보지 않아서 몰랐을 뿐 이미 삶은 지옥이었다. 당장 눈 앞의 과제 -입시가 걷히고 숨통이 조금 트이니 나아졌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지 내 기질과 감정 상태는 언제나 밑바닥에 있었다.
이제 어느정도 내 삶을 스스로 만들어나갈 역량과 환경을 갖추어냈고, 지레 겁 먹는 일이 현저하게 줄어들었으니 올라갈 일만 남았다. 그렇기에 아직은 미숙한 점이 많더라도 미래를 생각할 때에는 언제나 낙관적인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성공보다도 실패다. 실패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 남의 성공을 보고도 맹목적인 열등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자신감. 할 수만 있다면 대학교를 그냥 자퇴해버리고 싶은데. 아직 그건 좀 아닌 것 같다. 아닌가? 모르겠다. 어쨌든 활주로가 있어야 비행기가 날아오르는 것인데 나는 넓적한 날개를 지닌 비행기면서도 스스로가 헬리콥터인 양 행동하고 있었다. 변명을 조금 보태 말하자면, 환경이 나에게 헬리콥터가 되도록 요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날기도 전에 추락할 뻔 했다. 다시 비행기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할 것은 없다. 많은 생각을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바라보자.